서봉총 ()

경주 서봉총 표지석
경주 서봉총 표지석
고대사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
이칭
이칭
노서동 제129호분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경주 대릉원 일원(慶州 大陵園 一圓)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2011년 07월 28일 지정)
소재지
경북 경주시 노동동 261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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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서봉총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되었는데 당시 스웨덴의 황태자가 참여하여 봉황 장식의 금관과 목걸이, 귀걸이 등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이를 기념하고자 스웨덴의 한자명인 서전의 ‘서(瑞)’ 자와 봉황의 ‘봉(鳳)’ 자를 따서 서봉총이라 하였다. 5세기 중엽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무덤의 주인은 신라의 왕비나 왕비에 버금가는 최고 지배층의 여성이다. 이 무덤에서는 ‘연수원년신묘(延壽元年辛卯)’라는 기년명이 적힌 은합이 출토되어 신라고분의 편년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
개설

일제 강점기인 1926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고이즈미〔小泉顯夫〕등이 발굴하였다. 이 고분 발굴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가 참가한 것을 기념하여, 스웨덴의 한자명인 서전(瑞典)의 ‘서(瑞)’ 자와 이 고분 출토 금관봉황(鳳凰) 장식에서 ‘봉(鳳)’ 자를 따서 서봉총(瑞鳳塚)이라 이름지었다. 이 고분에서는 ‘연수원년신묘(延壽元年辛卯)’의 기년명(紀年銘) 은합이 출토되어 신라고분의 편년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봉총은 종래 경주 노서리 고분군의 일원으로서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7월 28일 경주 노서리 고분군을 비롯한 5개 고분군이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통합되면서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내용

경주 노서동 제129호분이다. 1921년 경주 금관총(金冠塚)이 우연히 발견된 이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는 1924년 금령총(金鈴塚)식리총(飾履塚)을 발굴하였으나 모두 봉분이 없어진 폐고분이어서, 신라고분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봉분이 일부 남아 있는 이 고분을 1926년 발굴하였다고 한다.

발굴 전에 이 고분 주위에 들어선 민가들에 의해 봉분은 크게 훼손되어 있었으며, 발굴 결과 이 고분의 남쪽 부분 일부는 이 고분보다 뒤에 축조된 다른 고분과 중복되어 있어 두 고분이 표형(瓢形) 쌍분(雙墳)이며, 서봉총은 그 표형분의 북분으로 추정되었다. 남분은 1929년 영국인 데비드(Devid)가 경비를 부담하여 발굴조사하고 데비드총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두 고분의 중복 범위가 좁고 무덤덧널의 방향도 크게 다르며 출토유물의 격도 차이가 있어 원래 표형 쌍분으로 축조된 것인지는 의문점이 많다.

조사 결과 이 고분은 매장부체부인 덧널의 주위와 위에 냇돌을 쌓아 적석부를 구축하고 그 위로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봉분 주위로는 냇돌로 호석을 쌓아 두른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밝혀졌다. 고분 중심부의 원지반에 동서 길이 4.7m, 남북 너비 3.7m, 깊이 60㎝의 얕은 토광을 파고 그 내부에 냇돌을 2단 정도, 다시 그 위에 잔자갈을 12∼15㎝ 정도 깔아 바닥을 구축하고 덧널을 설치하여, 덧널은 완전히 지상에 위치하였다. 덧널은 두께 15∼18㎝의 각재로 짰으며, 크기는 동서 길이 3.6m, 남북 너비 2.2m로 추정되었다.

덧널 벽과 돌무지 사이에는 잔자갈을 채웠는데 이곳의 잔자갈에는 붉은 색으로 주칠(朱漆)된 것이 많았다. 덧널 안에는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피장자가 안치된 나무널을 동서로 길게 놓았고 그 동쪽은 부장품 구역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 부장품 구역은 장축이 남북인 직사각형 모양이어서 원래 나무로 짠 부장품 수장궤가 나무널과 T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적석부는 덧널을 중심에 두고 동서 길이 17.4m, 남북 너비 10.2m의 범위에 각을 죽인 직사각형으로 냇돌을 쌓아 올려 구축하였는데 남아 있는 최고 높이는 4.7m였으며, 적석부 표면은 흑갈색 점토로 피복되어 있었다. 적석부 위로 쌓은 봉토는 남아 있는 호석으로 보아 직경 약 36m, 높이 약 9.6m로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대형급에 속한다.

출토유물을 살펴보면, 나무널 안에서는 동쪽으로 머리를 둔 피장자가 착장하고 있었던 금관과 관수식(冠垂飾), 금제 태환식(太環式) 귀걸이, 마노 대롱옥 · 수정 다면옥 · 각종 곡옥을 꿰어 만든 목걸이, 금 · 은 · 유리구슬을 꿰고 끝에 비취 곡옥을 단 가슴장식, 금제과대(金製銙帶)와 요패(腰佩), 금 · 은 팔찌와 유리팔찌, 금반지 등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금제 태환식 귀걸이는 이외에도 금관의 동쪽과 과대 아래에서도 요패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나무널 안에서는 이와 같은 장신구 외에는 소형의 금동장 도자가 1점 출토되었을 뿐이며, 대형요패가 피장자의 오른쪽 허리 아래에 착장되어 있었다. 이는 관수식과 귀걸이가 태환식인 점과 함께 여자 무덤이 확실한 황남대총(皇南大塚) 북분과 같은 특징이어서 서봉총의 피장자가 여자였음을 말해준다.

피장자가 착장한 장신구 중 금관은 다른 신라 금관과 마찬가지로 테 위에 나무모양 장식과 사슴뿔모양 장식을 세운 것이나, 내부에 속모자 모양의 골격을 설치한 것이 다르다. 이 골격은 금관의 테 안쪽에 금판을 전후좌우로 세워 위에서 ‘십(十)’자 모양으로 교차시키고, 그 교차점에 세 마리의 봉황형 장식이 달린 금판을 부착시킨 것이다. 유리팔찌는 다른 신라고분에서는 유례가 없는 것이며, 요패들과 함께 피장자 허리부분에서 나온 태환식 귀걸이는 태환을 사격자(斜格子)로 투조한 것으로 이례적이다.

나무널 동쪽의 부장품 구역에는 바닥에 세발 달린 쇠솥 2개와 각종 토기를 배치하고, 그 위에 칠기(漆器), 금 · 은 · 청동제 그릇, 유리그릇, 마구(馬具), 각종 유리구슬들이 놓여 있었다. 그 중에는 뚜껑에 새모양 꼭지가 달린 청동 초두(鐎斗), 금제완 2개, 은제대합이 있다. 칠기 중에는 입과 끝부분에 금동장식을 끼운 뿔모양 잔, 연꽃무늬가 그려진 국자와 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리용기는 2개가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몸통부분에 청색 물결무늬가 배치된 대부배(臺附杯)였고, 다른 하나는 남색의 완이다. 부장품은 이외에도 나무널의 좌우와 서쪽에서 약간의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 부장품들 가운데 은제대합(銀製大盒)에서는 뒤에 뚜껑 안쪽 면과 그릇 바닥에서 바늘 같은 것으로 새긴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연수 원년인 신묘년 3월에 대왕(大王)이 이 은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서봉총 은합의 이 명문은 경주 호우총(壺杅塚) 출토 청동호우에 새겨진 을묘년명(乙卯年銘)과 함께 지금까지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에서 발견된 단 2개의 기년명 가운데 하나로 신라고분의 편년 연구 등에 극히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다만 불행히도 연수는 지금은 알 수 없게 된 잃어버린 연호로서, 고구려의 연호였을 것으로 추정될 뿐 그 사용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여기서 신묘년은 서기 391년, 451년, 511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서봉총의 상대연대는 황남대총 남 · 북분보다는 늦고 천마총(天馬塚) · 금령총보다는 이른 시기로서 신라에서 돌무지덧널무덤 축조기의 중기 쯤에 해당된다.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은 6세기 전반경에는 이미 소멸되었으므로, 은제대합의 신묘년은 서기 511년은 너무 늦고 대체로 451년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서봉총은 이 연도에서 멀지 않은 5세기 중엽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분의 규모와 출토유물로 보아 당시 신라의 왕비나 또는 왕비에 버금가는 최고 지배층의 여성묘였을 것이다.

의의와 평가

서봉총은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금관, 금제과대와 요패가 출토된 대형분으로 마립간시기 신라의 왕 · 왕비릉 급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되어 발굴보고서도 발간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연수 신묘명 은합의 출토로 신라고분의 편년에 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 연구에서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황남대총 북분과 함께 당시 여성도 금관을 착용하였음을 알려주는 자료로서도 의미가 크다.

참고문헌

「연수재명신라은합우(延壽在銘新羅銀盒杅)에 대한 일·이의 고찰」(이홍직, 『최현배선생환갑기념논문집,』 1954)
「慶州瑞鳳塚の發掘」(小泉顯夫, 『史學雜誌』38-1, 1927)
『朝鮮古代の墓制』(梅原末治, 座石寶刊行會,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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