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수장품(隨葬品)’, 일본에서는 ‘부장품’이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유물·매장유물·부장품 등 여러 가지 용어로 불리고 있다.
그러므로 무덤 내외에 고정으로 시설한 것들, 예를 들면 즙석(葺石)·곽(槨) 등은 포함시키지 않으나 그 재료인 목재·돌 등은 부장품에 포함시켜서 다루고 있다.
부장품의 기원은 멀리 구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 즉 원시인의 인지(人智)가 발달함에 따라 일상생활에서 석기·골각기·목기 등의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고, 가족·친지 등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리워하여 무덤을 기념물화하면서 시체와 함께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을 매장하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인류의 문화가 더 진전되어 사후(死後)의 세계를 인정하게 되자 생전의 생활이 계속되도록 많은 부장품을 넣게 되었다. 여기서 각 민족과 시대·지역에 따라 다른 매장사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장품 습관도 자연히 함께 변화되었다.
부장품 습관, 즉 묘 안에 어떠한 물품을 어떠한 양상으로 넣느냐 하는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부장품조합(副葬品組合)’이라고 한다. 이 부장품조합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여 확실하게 밝힐 수 있는데, 특히 주인공의 신분을 예민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대상이 된다.
우리 나라의 고분에서 부장품을 살필 수 있는 것은 청동기시대 무덤들에서부터이다. 청동기시대 무덤은 지석묘(支石墓)·석관묘(石棺墓)·석곽묘(石槨墓)·토광묘(土壙墓)·옹관묘(甕棺墓) 등 여러 종류와 형태가 있다.
지석묘는 겉으로 나타나는 어마어마한 규모에 비하여 부장품조합은 가장 약소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마제석촉·무문토기편의 조합이 가장 기본적이고, 여기에 혹은 마제석검·마제석부 등과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가락바퀴 등이 한 가지 혹은 두 가지가 추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옥류와 청동기 등은 극히 드문 편이다.
석관묘에서도 일반적으로는 지석묘와 비슷한데, 다만 특수한 예외가 있다. 예를 들면 부여 송국리석관묘에서는 석관의 규모도 컸을 뿐 아니라 부장품에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대형관목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석곽묘에서는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부여 연화리 등지의 무덤에서 보는 것처럼 세형동검 외에 의기(儀器)에 속하는 방패형동기(防牌形銅器)·나팔형동기(喇叭形銅器)·원개형동기(圓蓋形銅器)·조문경(粗文鏡)·세문경(細文鏡) 등 청동기가 두드러지고, 또 마제석촉·흑도(黑陶) 등도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부장품조합과 무덤형식은 중국 동북지방의 무덤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대동강 유역에 밀집 분포되어 있고, 또 영천 어은동, 경주 조양동·구정동, 울주 입실리, 화순 대곡리 등지에서 발견, 조사된 바 있는 토광목곽묘에서도 세형동검·세문경 등이 기본을 이룬다.
그 밖에 수레부속품·마구 등의 청동제품과 철검 등 철기류가 포함되어 있는데, 시기의 진전에 따라 청동기와 수량이 서로 반대되는 다소(多少)의 비율을 이루었다. 물론 이 목곽묘들의 부장품조합은 무덤의 구성형식과 함께 중원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부장품조합은 중국 한나라의 후장 풍습의 강한 영향을 받아 수량이 늘고 질적으로도 호화롭게 된다. 고구려의 적석총이나 석실분, 백제의 석실분·전실분, 신라의 석실분, 가야의 석실분 등은 일찍 도굴되어 완전한 부장품조합을 발견하기는 무척 어려우나, 수습된 작품을 통하여 보면 경주의 적석봉토분이나 무령왕릉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대단히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부장품조합임을 알 수 있다.
경주의 경우는 장신구류·무구류·마구류·공구류·토기류 등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다. 장신구류에는 금관·은관·금동관을 비롯하여 귀걸이·곡옥·요대 등이 있고, 무구류에는 철제장검·화살촉·창끝·단갑·규갑 등이 있다.
마구류에는 말안장의 전륜후륜·말재갈멈추개·행엽·운주(雲珠)·등자(鐙子) 등이 있고, 공구류에는 철제도끼·괭이·낫·칼 등이 있으며, 토기류에는 고배(高杯)·항아리·독·접시·기대(器臺) 등 일상용기와 제기류가 포함되었다. 이 밖에 천마총의 천마도·철제솥·청동합·초두(鐎斗)·항아리 등도 대형고분에서는 자주 보이는 것이다.
무령왕릉은 백제고분으로서도 그렇지만 왕릉으로서도 극히 희귀하게 매지권(買地券 : 誌石)이 있고, 그에 따른 화폐[五銖錢]·진묘수(鎭墓獸)·대형동경·동자상(童子像)·청자사이호(靑磁四耳壺) 등 중국식 부장품이 더 들어 있었다. 이것은 물론 당시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빈번하고도 실질적인 교류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 신라와 가야고분에서 종종 발견되는 철정(鐵鋌)은 당시에 중간재료적 가치를 지닌 일종의 화폐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시체의 바닥에 수십 개 또는 수백 개씩 깔아 주인공의 부(富)를 함께 과시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부장품 성격의 다른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백제의 후기에 유행한 부여지방의 판석조석실분(板石造石室墳)은 판상석을 잘 다듬어서 규모있게 조립하고 처녀분인데도 부장품이 전혀 없는 경우가 송국리와 송학리 등지에서 확인되었다.
이 현상은 두가지 이유에서 오는 것으로 추측된다. 하나는 불교의 보편화로 불교 특유의 박장(薄葬:장례를 간단히 지냄.) 풍습에서 오는 것일 수 있고, 또 하나는 당시 당나라에서 제정, 실시하던 박장령(薄葬令)의 영향일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의 경우 당나라의 영향으로 7세기에 박장풍습이 실시되지만, 백제에서도 문헌기록에는 없으나 7세기 전후한 시기에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박장풍습은 삼국시대 후기에 함께 유행을 보기 시작하여 통일신라시대에도 그대로 계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1960년대에 도굴된 전 효소왕릉(傳孝昭王陵)의 경우에는 격식과 규모를 갖추어 짠 궁륭상천장(窮窿狀天障)의 석실인데도 부장품의 흔적은 전혀 없고 단지 깨어진 골호파편만이 수습되었다. 이 경우는 불교식 화장묘로 추측된다.
나말여초(羅末麗初)에 이르면 부장조합도 크게 바뀌어 나갔다. 신라에 비하여 부장품의 수량이 줄어들 뿐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크게 달라진다. 즉 호화롭던 장신구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단지 채자(靫子 : 화살을 넣어두는 통) 정도로 그치게 되고 토기·마구 등도 생략되어 전체적인 분위기가 질박 검소하게 변하여 갔다.
이것은 불교의 영향도 있겠지만 직접적으로는 금(金)·요(遼) 등 북방의 영향을 크게 받는 데서 오는 것이다. 물론 새로이 백자·청자·동경 등이 기본품목으로 추가되기도 하였다.
고려 중기 이후 무덤구조는 점차 소형 석곽묘·토광묘·회곽묘(灰槨墓)로 주류가 바뀌는데, 묘 안의 공간은 더욱 축소되고 대신 부장품을 위한 부실(副室 : 側室)이 마련되기도 하고, 토광의 경우는 벽에 소형의 감실(龕室)을 설치하는 경우도 많아진다. 부장품도 일상생활의 애완품으로 바뀌고 소형의 명기(明器)풍으로 대치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말기에 와서는 점차 부장품 풍속이 소멸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