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3월에 발굴 조사되었다. 이 고분의 발굴은 1971년 7월의 공주 무령왕릉의 발견과 1972년의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사시[長沙市] 우리패[五里牌]에서 발견된 마왕퇴고분(馬王堆古墳)과 함께 세기적인 대발견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고분이 위치한 곳은 다카이치지구의 서남쪽 사카아이[坂合]지구의 히노쿠마[檜隈]지역이다. 주변에는 아스카시대[飛鳥時代]의 여러 유적이 있다. 북쪽 200m 지점에는 나카오야마고분[中尾山古墳]이, 북쪽 1㎞ 지점에는 덴무지토릉[天武持統陵]과 겐메이릉[欽明陵]이 있다. 서쪽 1㎞ 거리에는 이와야야마고분[岩屋山古墳]이 있고, 남쪽 250m에는 분무릉[文武陵]이 있다. 동쪽 500m에는 요시노천[吉野川]을 건너 세키부타이고분[石舞臺古墳]이 자리잡고 있다.
구릉의 남사면에 만들어진 원형의 분구는 지름 18m, 높이 5m로, 점토와 모래를 1층씩 교대로 섞어 판축방식으로 쌓아올렸다. 내부묘실의 크기는 길이 2.65m, 너비 1m, 높이 1.13m이다. 구조는 잘 다듬은 판석으로 짠 횡혈식석실계통이다. 정확히 말해 연도(羨道)가 없는 횡구식석곽(橫口式石槨)의 구조를 띠고 있다.
석곽은 분구 중 지면상에 위치해 있다. 석곽 바닥은 분구 저면과 거의 일치하고, 방향은 남향이나 서쪽으로 5°가량 치우쳐 있다. 석곽은 응회암을 판상으로 다듬어 규격에 맞춰 조립하였다.
바닥은 3매를 깔았는데, 입구쪽 돌이 특별히 크다. 벽은 바닥돌의 북쪽 돌 위에 판석을 세워 북벽을 만들고, 양측에 각각 3매의 판석을 연접해 세워 측벽을 만들었으며, 남쪽 입구에도 1매의 판석을 끼워서 막았다.
천장은 판석 4매를 사용해 평천장을 구성하였다. 석곽 내부의 크기는 길이 265.5㎝, 너비 103.5㎝, 높이 113.4㎝이다. 내부의 전표면에는 약 2∼7㎜ 정도의 회발이를 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남아 있는 부분은 적다.
석곽의 남쪽 전방에는 연도가 없고, 남벽(폐쇄석)에 잇대어 너비 45㎝의 사이를 두고 양측에 25㎝의 도랑이 남쪽 전방으로 패어 있는데 길이는 290m이다. 이것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지만 묘도(墓道)로 추측된다.
석곽 내에는 목곽을 안치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발견된 조각[片]을 보면 표면에 베[布]를 바르고 그 위에 옻칠을 하였다. 관은 본래 석곽의 중앙에 놓였던 것으로 보이고, 크기는 길이 2.02m, 너비 57㎝이다.
관을 제외한 출토유물은 이미 도굴을 당해 극히 일부만이 수습되었다. 그 중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① 금동장투식금구(金銅裝透飾金具) : 관식금구의 일종으로 꽃잎과 나뭇잎모양으로 구성되어 중심에는 국화문을 배치하였다. 전체적인 문양은 경주 안압지의 임해전지(臨海殿址)에서 발견된 보상화문전의 모양과 거의 동일하다. 지름 10.8㎝, 두께 0.1∼0.2㎝, 무게 48.2g이다.
② 해수포도문경(海獸葡萄文鏡) : 지름 16. 8㎝, 두께 1.5㎝, 무게 1,220g이다. 중심에는 사자 6마리와 포도문을 새기고 변두리에는 포도문·나비·새 등을 새겼다. 중국에서도 유례가 드문 동경이다.
③ 은제도장금구(銀製刀裝金具) : 대도파두(大刀把頭)인 주금(胄金), 칼집에 장식하는 물미[石突], 역시 칼집 윗부분에 장식하는 산형금물(山形金物)이 있다. 공예기법상 당나라와 신라에 통하고 있다.
그 밖에 청색 소형옥 936개와 하지키(土師器)와 스에키(須惠器)에 속하는 토기 22점이 발견되었다. 토기는 대부분이 접시와 그 뚜껑이다.
다카마쓰총이 중요시되는 것은 고분의 묘실벽에서 일본 최초로 극채의 벽화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고분에서는 처음 나타난 것이다. 벽화의 화제·배열·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화제는 사신도(四神圖)·일월도(日月圖)·성수도(星宿圖)·인물군상(人物群像) 등 4가지로 크게 구분된다.
사신도는 북벽에 현무, 동벽 중앙에 청룡, 서벽 중앙에 백호가 그려져 있으나, 남벽에 통례적으로 그려져 있는 주작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일월도는 청룡 위에 일상(日像)을, 백호 위에 월상(月像)을 배치하여, 금박과 은박을 써서 나타내고 구름과 산을 함께 그렸다.
성수도는 천장에 그렸다. 인물상은 청룡의 북쪽에 4인의 여자상, 남쪽에 역시 4인의 남자상을 그렸고, 백호의 남북 양쪽에도 같은 방식으로 8인을 그렸다. 이 16인의 인물들은 각기 지물(持物)을 들고 있다.
벽화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비중은 사신도에 있다. 이는 고구려의 중화 진파리1호분 및 강서 삼묘리의 대묘·중묘의 그것과 유사한 양식과 기법을 보이고 있어 8세기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고분의 피장자 문제와 아울러 고구려와 백제 중 어느 나라와 더 관계가 깊은가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의 연구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