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칭 ‘용골 뒷머리’라는 구릉에 위치한 굴식 돌방무덤[石室墳]이다. 원래는 6∼8곳 정도가 있었던 듯하나 현재는 3곳만 남고 나머지는 파괴되어 없다.
3곳 모두 구덩이를 판 뒤 그 안에 자연석을 수직으로 정연하게 축조하였다. 남북방을 장축(長軸)으로 해 5∼10°가량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봉토는 모두 원형이다. 돌방[石室]은 모두 장방형으로 규모는 길이 213(제3호분)∼250㎝(제1호분), 너비 57(제3호분)∼76㎝(제1호분), 높이 56(제3호분)∼65㎝(제2호분)이다.
동서장벽(東西長壁)은 2단 또는 3단으로 축조하였다. 북벽은 판상석(板狀石)을 1매(제2호분) 또는 2매(제1호분) 연결해 직립시켜 놓거나, 장대상석(長臺狀石) 2매를 2단으로 쌓아올렸다(제3호분).
남벽은 제2호분을 제외한 제1·3호분은 파괴되고 없다. 제2호분의 남벽은 장대상석 2장을 2단으로 포개놓아, 동서장벽에 물리지 않고 완전히 바깥에 쌓았으며, 그 바깥에는 다시 6개의 괴석(塊石)을 둘러놓아 도괴될 위험을 보완하였다. 여기서 남벽이 최후에 쌓아진 것을 알 수 있으며, 굴식돌방임이 분명하다.
뚜껑돌[蓋石]은 자연석 4장을 이용하였다. 바닥은 아무 시설도 없었으며, 배수로나 회를 바른 흔적도 없었다. 특히 제1호분의 동벽 중간쯤에는 깊이 45㎝, 너비 26㎝의 옆방이 있었는데, 그 속에서 청자 2점이 발견되었다.
유물을 살펴보면, 제1호분에서 청자병 2점, 청자완(靑磁盌) 1점, 은제차자(銀製釵子) 1점 등 모두 4점이 출토되었다. 제2호분에서는 차자·숟가락[匙]·완(盌)·조각 등 청동제품이 각각 1점씩 모두 4점이 출토되었다. 이 중 차자 2점은 모두 북벽의 중간지점에서 동향한 채로 가로놓여 있어 북침(北枕)임을 알 수 있다. 제3호분은 유물이 전혀 없었다.
한편, 출토유물 중에는 신라시대 고분에서 많이 발견되는 장신구나 무기류·귀금속제품 등이 전혀 없어 문화성격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또 3곳 모두 남향한 채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으로 볼 때, 당시에 유행한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은 가족단위의 무덤군임을 알 수 있다.
출토된 청자병의 연대가 11세기 초로 추정되므로 고분의 축조연대도 11세기경, 즉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려시대까지도 돌방무덤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