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미추왕릉 ( )

선사문화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신라 제13대 미추왕의 능.
이칭
이칭
대릉, 죽장릉(竹長陵), 죽현릉(竹現陵)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삼국시대
관련 국가
신라
관련 인물
미추왕
높이
13.5m
지름
59.1m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9년 08월 27일 지정)
소재지
경북 경주시 황남동 89-2번지
내용 요약

경주미추왕릉(慶州味鄒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신라 제13대 미추왕의 능이다. 미추왕은 시조인 김알지의 7대손이며, 갈문왕 구도의 아들이다. 능은 신라시대 마립간 시기의 집단 묘역인 대릉원을 구성하는 노서동 · 노동동 · 황남동고분군 내에 있다. 이 능의 내부 구조는 주변에서 발굴 조사된 황남대총 · 천마총과 동일한 5세기 대의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판단된다. 김씨에서 가장 처음 왕위에 올랐던 미추왕의 능을 눌지왕 재위 시 덧널무덤에서 당시의 묘제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수즙하여 현재의 고총 형태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신라 제13대 미추왕의 능.
건립경위

1969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된 경주미추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89-2에 자리한다. 신라 제13대 미추왕(味鄒王, ?~284, 재위 262∼284)은 시조인 김알지(金閼智, 65~?)의 7대손이며, 주1 구도(仇道, 218~301)의 아들이다. 죽은 후 능의 이름을 대릉(大陵)이라 하였다.

형태와 특징

경주미추왕릉의 외형은 단순한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나 면적은 61,144㎡, 크기는 지름 59.1m, 높이는 13.5m이다. 경주분지에서 신라시대 주2 시기의 집단 묘역인 대릉원(大陵苑)을 구성하는 노서동 · 노동동 · 황남동고분군 내에 있으며, 왕성인 월성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800m 떨어져 있다.

능은 경주 대릉원 내에서 잘 정비, 보존되어 있으며, 능 앞에는 조선시대 왕릉 형식을 닮은 화강석으로 된 주3이 마련되어 있다. 남쪽에는 삼문(三門)이 있으며, 이 삼문을 따라 담장이 돌려져 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주4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794년(정조 18)에 김씨 문중에서 다시 세웠다. 무덤의 내부 구조는 주변에 있는 천마총, 황남대총 등의 발굴 조사에서 밝혀진 것과 같이 냇돌의 둘레돌 구조를 한 5세기의 주5 묘제로 추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미추왕은 대릉에 장사를 지냈으며, 왕릉은 죽장릉(竹長陵) 또는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 이 명칭은 제14대 유례왕 14년(297) 경상북도 청도에 있던 이서고국(伊西古國)이 주6에 침입하였을 때 미추왕릉에서 죽엽군(竹葉軍)이 나와서 위험으로부터 구해 주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기록된 미추왕의 재위 기간과 추정된 미추왕릉의 조영 시기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 「기이편」 미추왕 죽엽군조의 ‘능재흥륜사동(陵在興輪寺東)’이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이 고려시대 또는 그 이전 시기부터 미추왕릉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의의 및 평가

경주미추왕릉이 황남동고분군 내 자리하고 있다는 전제로 미추왕이 사망한 284년인 3세기 후반부터 경주분지에서 김씨 왕조의 탁월한 상징물로 간주되는 돌무지덧널무덤이라는 고총이 발생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3세기 후반의 신라시대 묘제는 여전히 주7 단계로 큰 무덤이 축조되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능은 현재까지 연구에 의하면 내부 구조는 주변에서 발굴 조사된 황남대총 · 천마총과 동일한 5세기 대의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판단된다.

이 능의 피장자는 월성북고분군의 입지와 축조 방향에 따른 분석에 의하면 미추왕이 아니라 제22대 지증왕(智證王)의 할아버지(『삼국유사』에 의하면 지증왕의 아버지 기보갈문왕(其寶葛文王))의 능으로 보거나, 황남대총 남분을 제18대 실성왕릉으로 전제하고 이 능을 김씨왕계에서 강력한 군주였던 제19대 눌지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능을 전승되어 온 것처럼 미추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삼국유사』 눌지왕 19년(435) 2월의 기사인 '수즙역대원릉(修葺歷代園陵)'에서 보듯이 눌지왕(訥祗王)이 왕위를 장자 계승 원칙을 세워 왕권을 공고히하고 김씨에서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던 미추왕의 능이 덧널무덤으로 조영되어 있던 것을 당시의 묘제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수즙하여 현재의 고총 형태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참고문헌

논문

박광열, 「신라 적석목곽분의 연구와 금관총」(『고고학지』 20, 국립중앙박물관, 2014)
최병현, 「경주 월성북고분군의 형성과정과 신라 마립간시기 왕릉의 배치」(『한국고고학보』 90, 한국고고학회, 2014)
주석
주1

신라 때에, 왕의 아버지, 장인, 외조부, 형제 또는 여왕의 남편 등에게 내리던 칭호. 왕과는 뚜렷하게 구별되었지만 왕에 버금가는 높은 지위였다.    우리말샘

주2

신라 때에, ‘임금’을 이르던 말. ≪삼국사기≫에는 눌지왕 때부터 지증왕 때까지, ≪삼국유사≫에는 내물왕 때부터 지증왕 때까지 이 칭호를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3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4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신라 미추왕, 문무왕, 경순왕을 모신 사당. 처음에는 경순왕만 모셨으나 고종 24년(1887)부터 김씨 왕가의 시조인 미추왕의 위패를 모셨고, 다음 해부터는 문무왕의 위패도 모시게 되었다.    우리말샘

주5

지하에 구덩이를 파거나 지상에 목곽을 짜 놓고 사람 머리 크기의 강자갈을 덮은 후 다시 그 위에 점토 따위의 흙을 입혀 다진 무덤. 신라 특유의 것이다.    우리말샘

주6

진한에 속한 나라. 경상북도 경주시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말샘

주7

관을 넣어 두는 널방을 나무로 만든 무덤. 평양 부근의 낙랑 고분, 경주 부근의 신라 고분이 이에 속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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