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탑리 고분 ( )

선사문화
유적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탑리리에 있는, 피장자가 조문국의 후예이자 최고 수장층 일원으로 추정되는 무덤.
이칭
이칭
의성탑리리고분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무덤
건립 시기
삼국시대
관련 국가
신라
소재지
경상북도 의성군
내용 요약

의성탑리고분(義城塔里古墳)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탑리리에 있는, 피장자가 조문국의 후예이자 최고 수장층 일원으로 추정되는 무덤이다. 대리리 · 학미리 고분군과 함께 2021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삼국시대 의성 지역의 정치 · 사회 · 문화적인 성격이 일부 파악되었다. 도질토기류는 신라토기양식 수용 후 의성양식토기로 변화하여 이후 안동, 예천, 상주, 소백산맥 이북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5세기 대 의성은 신라의 변방이면서도 요충으로 역할을 하였지만, 고구려와의 관계도 밀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탑리리에 있는, 피장자가 조문국의 후예이자 최고 수장층 일원으로 추정되는 무덤.
발굴경위 및 결과

1960년 12월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에 의하여 탑리역 앞에 있는 고분군 중 가장 큰 봉토분을 선정하여 발굴 조사하었다. 현재는 발굴 조사된 고분이 위치한 탑리리를 비롯하여 대리리 · 학미리 고분군과 함께 2021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고분이 자리한 주변은 동남쪽에 위치한 금성면의 진산(鎭山)인 금성산에 금성산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서쪽 기슭에 자리한 탑리리마을에는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오층모전석탑(五層模塼石塔)이 있다.

금성산 고분군이 조영된 탑리리 · 대리리 · 학미리 일대는 원삼국시대의 소국인 조문국(召文國)의 고지로 알려져 있다. 발굴된 고분은 금성산의 기슭에서부터 서북쪽으로 뻗은 낮은 산줄기가 탑리리 북동쪽 약 2㎞ 지점에서 동서로 길게 뻗은 해발 160m에 자리하고 북서쪽으로 이어진 능선상에도 다수 분포되어 있다.

형태와 특징

조사된 고분의 봉분은 남북 방향의 장타원형이며, 바닥 부분의 주1 크기로 보아 긴 축은 26m, 짧은 축은 20m, 높이 4.6m 정도이다. 고분은 하나의 봉토 안에 5기의 주2을 배치한 무덤이다.

고분은 먼저 으뜸덧널을 설치하고 추가장(追加葬)을 하면서 북쪽 둘레돌을 걷어내었다. 여기에 동서 긴 축의 목곽을 ‘T’자 모양으로 3기의 돌덧널을 추가로 축조하였다. 즉 매장 주체부의 형태는 타원형의 분구에 1기의 돌무지덧널무덤 · 돌돌림덧널무덤과 3기의 돌덧널무덤, 1기의 앞트기식돌방무덤이 조영된 오래된 복합무덤이다.

제Ⅰ곽인 앞트기식돌방무덤은 분구의 중앙 밑에 자리하고, 평면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으로 길이 약 3.5m, 너비 1.7m, 높이 약 1.8m이다. 당시 발굴 조사자는 천장 부분에 뚜껑돌이 없고 네 벽을 돌멩이로 쌓았으며 동서 긴 벽과 북쪽 짧은 벽이 수직이고 남쪽 짧은 벽은 바깥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주인공을 매장 후에 외부에서 막은 앞트기 부분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 묘제는 전형적인 돌돌림덧널무덤 형식이고 긴 벽 쪽에 딸린덧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매장 주체부는 금동관을 착용한 사람 뼈는 남자이고, 북벽의 두개골은 여성인 주3

석곽묘주4인 제Ⅱ · Ⅲ · Ⅳ곽 중 제Ⅱ곽은 동서가 긴 장방형으로 크기는 길이 3.9m, 너비 1.5m, 높이 1.5m이다.

제Ⅲ곽은 길이 3.5m, 너비 약 1.5m, 높이는 중앙에서 약 90㎝이고, 네 벽은 갈색 주5으로 불규칙하게 2∼3단 쌓아서 축조하였으며, 천정은 나무 뚜껑을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 피장자는 금동나비모양관식 · 청색유리목걸이 · 금귀걸이 · 금동허리띠 · 고리자루큰칼을 착용하였으나, 서쪽 피장자는 착장 유물이 소략하고 여성일 가능성이 있다.

제Ⅳ곽은 동북쪽으로 긴 장방형이고 길이 3.3m, 너비 1.3m, 높이 약 60㎝이다. 크고 작은 돌을 포개어 불규칙하게 쌓아서 네 벽을 축조하고 천장에는 나무 뚜껑을 덮은 것으로 추정된다.

제Ⅴ곽은 돌무지덧널무덤 · 돌돌림덧널무덤으로 덧널을 안치한 중앙 부분은 썩어 없어져 장방형으로 함몰되어 있고, 흘러내린 돌돌림 상태는 냇돌과 자갈로 둘러싸듯 놓여 있다.

출토된 유물은 Ⅰ곽과 Ⅲ곽의 주6가 우월하다. 우모형입식(羽毛形立飾)의 금동관 · 금동제관식 · 금귀걸이 · 금드리개 · 은허리띠 · 금동신발 등 화려한 장신구와 각종 철제 무기류, 마구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의의 및 평가

의성탑리고분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삼국시대 의성 지역의 정치 · 사회 · 문화적인 성격을 일부 확인할 수 있었다. 출토된 유물 중 제Ⅰ곽 출토 도질토기류는 신라토기양식 수용 후 의성양식토기로 변화하여 이후에 안동, 예천, 상주, 소백산맥 이북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제Ⅰ곽에서 출토된 우모형입식의 금동관은 띠 모양의 테두리 위에 가장자리를 가늘게 자른 후 이를 꼬아서 새의 깃털 모양으로 입식을 세 개 부착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관은 경주의 신라 황남대총(皇南大塚) 남분에서 출토된 은제관식과 비슷하고, 고구려 수도였던 집안(集安)에서 출토되었다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과 매우 흡사한 양식이다.

이러한 결과는 5세기 대 의성은 신라의 변방이면서도 요충으로 역할을 하였지만, 고구려와의 관계도 밀접하였음을 대리리에서 출토된 금동제관장식 유물과 함께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또한 이 고분의 피장자는 조문국의 후예로서 최고 수장층(首長層)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단행본

金載元, 尹武炳, 『義城塔里古墳』(國立博物館古蹟調査報告 第三冊, 乙西文化社, 1962)

논문

박광열, 「의성양식토기」(『한국고분 전문사전(유물편)』, 2019)
조효식, 「의성 탑리리 고분」(『한국고분 전문사전(고분편)』, 2014)
주석
주1

능이나 묘의 둘레에 돌려 쌓은 돌.    우리말샘

주2

널을 넣기 위해 따로 짜 맞춘 매장 시설. 일반적으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우리말샘

주3

한 집단의 지배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뒤를 따라 강제로 또는 자진하여 산 채로 함께 묻힌 사람.    우리말샘

주4

지면을 깊게 파고 자갈 따위의 석재(石材)로 덧널을 만든 무덤. 삼국 시대에 사용했으며 널길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말샘

주5

점토(粘土)가 굳어져 이루어진 수성암(水成巖). 회색이나 검은 갈색을 띠며, 흔히 얇은 층(層)으로 되어 잘 벗겨지는 성질이 있다.    우리말샘

주6

장사 지낼 때, 시체와 함께 묻는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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