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은 7세기 중엽 신라가 백제·고구려를 멸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한 일이다. 고구려·백제·신라 3국은 국가 체제를 정비한 후 세력 확장을 꾀하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백제의 북진정책이 대립했고, 후발국 신라는 그 틈새에서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려 했다. 당과 고구려가 충돌하면서 야기된 대치 국면은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고 신라가 고립되는 국면을 초래했다. 이에 신라는 대당외교에 치중하여 나당연합군으로 백제·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국을 통일했다. 이후 발해와 신라의 남북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1) 삼국의 항쟁
삼국의 분립은 성읍국가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고대국가로 발전한 고구려 · 백제 · 신라에게는 국력을 다져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각기 숙원사업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고대국가에 있어 공통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제국들은 대제국을 건설하기 이전에 먼저 민족을 통일하고, 그 통일된 힘으로 주위를 위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지배 범위를 넓혀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경쟁적으로 영토를 넓히려고 싸운 것이나 서로 동맹을 맺고 한쪽을 공격한 것, 주위 다른 민족국가와 동맹을 맺은 것들도 모두 우선은 자신을 보존하고, 나아가 민족을 통일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에서였다.
고구려는 부여를 통합하고 낙랑을 점령한 뒤부터 서쪽으로는 요동(遼東)지방으로 진출하여 중국왕조들과 충돌하게 되었고, 남쪽으로 진출하면서부터는 백제와 충돌하게 되었다. 서쪽으로 요하(遼河) 유역에 이르기까지는 쉽게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이 지역이 고조선 이래 우리민족의 거주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고조선의 멸망 후 중국 군현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이족통치(異族統治)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던데다 새로운 민족의 통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진출이 용이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쪽지방으로 진출하면서 한강 유역에서 이미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백제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부터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를 경계로 방어 위주의 국방정책을 강구하였고, 남쪽으로는 백제 · 신라와 싸우면서 영토를 확장하려는 적극적인 남진책(南進策)을 실시하였다.
대체로 고조선이 멸망하고부터 중국민족은 요서(遼西)지방까지 진출하여 생활하게 되었고, 우리민족은 요하 이동으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한(漢)의 요동군과 낙랑군을 몰아내고 요동지방을 회복한 뒤 더 이상 서쪽으로 진출하지 않은 것은 우선 우리민족의 거주 영역부터 통일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서 진출은 민족을 통일한 뒤로 미루었던 것이다.
고구려 말엽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요하 유역에 천리장성을 쌓고 요동지방에 많은 성을 쌓은 것도 중국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 정책이었다. 그러나 중국왕조 못지 않게 위협적이던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막기 위해서는 방어선이나 요새를 쌓지 않았다. 이것은 남쪽으로는 두 나라를 통합하여 민족통일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근본 목표이므로 방어선을 구축하는 정도로 안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 역시 근초고왕 때부터 고구려와 치열한 전쟁을 벌이면서 북진정책을 추구했는데 이 역시 통일국가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369년(근초고왕 24) 마한을 병합하여 한반도의 중서부 평야지대를 통합한 백제는 신라나 가야를 통합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먼저 고구려를 통합하는 것이 민족통일의 순서라고 판단하였다.
대개 5세기까지는 고구려와 백제가 쌍벽을 이루며 민족통일의 주인이 되려는 경쟁을 계속해 왔다. 6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가 절대적 우위에서 남진정책을 추진하자, 백제와 신라는 동맹하여 자존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신라도 6세기 들어 가야를 통합하고 군사력을 키워,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는 고구려와 싸워 한강 유역 중부지방을 차지하면서 통일의 주인이 되려는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삼국간에는 쉴 새 없이 전쟁이 계속되었다.
한편, 중국대륙에는 새로운 통일제국인 당나라가 들어서 고구려를 위협해 왔다. 삼국간에 경쟁이 치열했던 민족통일은 노대국이었던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치고 결국 신라가 성취한다. 그러나 당나라의 출현은 우리의 민족통일에 많은 손상을 입혀, 결국 고구려의 중요지역이었던 요동지방을 그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동북부에는 말갈족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고구려 유민에 의해 발해왕조가 등장하여 고구려 영토와 국민의 일부는 통일신라왕조의 통치에서 제외되었다. 그 뒤 발해가 멸망하면서 발해의 유민이 고려로 이동하고 말갈족만 그 지역에 남아 반유목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만주지방은 우리민족의 생활영역에서 제외되고 영토상으로도 신라가 통합한 한반도만이 이후 계속되는 통일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2) 고구려의 대당항쟁과 신라의 외교
당왕조는 건국 초기 고구려와의 국교회복을 위하여 도교사(道敎師)를 보내 『노자』를 강론하는 등 환심을 보이면서 수왕조(隋王朝) 때 고구려에 붙잡힌 포로들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고구려도 평화를 희망하여 포로 1만여 명을 송환하고 이어 고구려의 지도를 보내는 등 적의가 없음을 표시하였다.
그 뒤 20여 년간 평화리에 교류가 활발하였으나 641년(영류왕 24) 고구려에 사신으로 온 진대덕(陳大德)이 산천 구경을 구실로 높은 산에 올라다니며 고구려의 지리와 군사 시설을 정탐하였다.
오래전부터 당나라의 태도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고구려는 이미 631년 요하 유역에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당나라에 대한 경계심이 한층 더하여 대당 강경론자인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장성축조를 감독하게 하며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연개소문은 642년 영류왕과 많은 귀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정변은 당나라의 위협에 강경대처하려는 연개소문파와 온건파 중앙귀족 간의 싸움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하자 당나라는 고구려 공격 준비를 서둘렀다.
마침 신라가 동맹을 청해 오자 당태종은 강남지방의 군량미를 운반하게 하는 한편, 영주(營州) · 유주(幽州) 도독 휘하의 군사들로 하여금 요동방면을 소규모로 공격하게 하여 고구려의 항전 태세를 엿보았다. 644년(보장왕 3) 11월 당나라는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수 · 륙 양면으로 침공해 왔다.
당태종은 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승리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고 포고하였다. 그것은 첫째 대국으로서 소국을 치는 것이요, 둘째 순리(順理)로써 역리(逆理)를 토벌함이며, 셋째 안정된 힘으로 소란한 틈을 타고, 넷째 안일로써 피로에 대적하고, 다섯째 희열로써 원망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순리로써 역리를 토벌한다는 것은 연개소문의 정변이 부당함을 지칭하는 것으로, 고구려 지도층의 분열을 조장하고자 한 것이다.
당군은 요하를 건너 신성(新城) · 개모성(蓋牟城)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서부지방 최대 요새인 요동성(遼東城)을 포위, 공격하여 1개월 만에 함락시켰다. 이어 당군은 남쪽의 백암성(白巖城)을 점령하고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다. 요하 하류에 있는 안시성은 성주 양만춘(楊萬春)을 우두머리로 하여 군민(軍民) 10여만 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항전함으로써 2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물리쳤다.
신라는 고구려와 당나라가 충돌하기 이전부터 고구려 · 백제 군사로부터 남북 양면으로 공격을 받고 있었다. 특히 의자왕의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 침공은 신라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이 때 선덕여왕을 도와 신라를 이끌고 있던 김춘추(金春秋)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려 하였다. 신라가 백제에게 멸망하면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동맹국이던 백제가 강적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므로, 고구려로서도 신라의 요청에 응하리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륙에 당나라라는 강적을 대하고 있는 고구려는 신라보다 백제와 동맹하는 것이 유리할 뿐만 아니라, 현재 국경을 접하지 않고 있는 백제를 물리칠 이유가 없었다.
신라는 결국 고립을 면치 못하였고 양면으로 협공을 받고 있어 다시 대당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에 고구려 · 백제 군사로부터 협공을 받아 존망의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호소하였다.
당나라는 신라의 응원 요청을 받아들였고 양국이 동시에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 보장왕 3년의 전쟁이었다. 신라로서는 외교적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 때부터 신라는 보다 적극적인 대당외교를 벌여 드디어 나당연합군을 일으켜 백제 원정에 나섰고, 이어 고구려 원정도 실현하여 두 왕조를 무너뜨리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3) 백제의 멸망
6세기 후반에 수도를 웅진(熊津 : 지금의 公州)에서 사비(泗沘 : 지금의 扶餘)로 옮기고 남부 평야지대를 배경으로 국가를 중흥시킨 백제는 무왕대에 이르러서는 상실한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하여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성읍들을 점령해 갔다. 특히, 한강 하류지방을 공격한 것은 실지 회복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신라의 대당교통로를 차단하려는 정책이기도 하였다.
다음 왕인 의자왕이 즉위하고부터는 더욱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자왕 2년 신라 서부지역의 40여 성을 빼앗고, 신라 남부의 요충인 대야성을 점령함으로써 신라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이렇듯 중흥 백제는 고구려의 후원을 받으며 신라의 영토를 잠식했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에 대해서도 계속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여 문물을 수입하며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백제는 의자왕대 후반에 이르러 내외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했다. 내부적으로는 의자왕의 지나친 독단과 귀족층의 분열로 정치가 어지러워졌다. 7세기 전후의 형세를 보면 백제는 삼국 중 가장 좁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인구나 경제력은 고구려에 못지 않았으며 신라보다는 우세하였다. 그것은 백제가 한반도 서남부지방의 비옥한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로를 통한 중국대륙 각 지방과의 교류가 활발했고, 일찍이 일본으로 진출하여 후견자격인 위치를 확보하고 활발한 교류를 펼쳐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왕대 이후 신라 영토를 상당부분 잠식하고 수도와 주위 지역에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위를 높이는 등, 자못 통일의 주인이 될 기미가 엿보이기도 하였다. 무왕대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의 미륵사(彌勒寺)는 미륵불국토(彌勒佛國土)의 건설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규모나 화려함이 바로 백제의 통일의 웅지(雄志)를 나타내고 있다. 그간 새롭게 결집된 힘이 의자왕 초년의 신라 서남부지방의 점령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수도를 두 번이나 옮기면서 국가의 중심부가 남쪽으로 옮겨져 이에 따른 새로운 지방세력의 진출로 중앙귀족층의 구성이 변화되고 수적으로 팽창되었다. 여기에서 일찍부터 내부적 모순이 싹트게 되었다.
성왕의 전사 후 위덕왕대를 거쳐 혜왕과 법왕은 재위기간이 2년을 넘기지 못했고, 지방에 쫓겨나 있던 무왕이 귀족들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권은 귀족들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수적으로 팽창된 귀족들은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분열을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내부 모순을 안고 있던 상황에서 무왕에 이어 즉위한 의자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귀족층의 개편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642년(의자왕 2) 내좌평 기미(岐味) 등 40여 명을 몰아내고 귀족층을 개편하였는데, 이는 무왕대부터 싹튼 귀족층의 분열을 정리한 것이다.
즉, 귀족층의 수적 팽창과 분열은 노대국의 자연현상이고 왕권은 많은 귀족들에게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의자왕의 왕권강화책과 일부 귀족의 이해가 결합되어 40여 명의 귀족들을 축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의자왕의 왕권강화책은 일시 성공하였으며, 그 결과 신라의 영토 일부를 점령하는 등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끝내 귀족들의 분열과 정쟁(政爭)은 종식되지 않았다.
귀족층의 정쟁에 휘말린 의자왕은 결국 그 후반기에 들어오면서 사치한 생활로 위엄을 갖추고 위안을 받으려 하였으며, 657년에는 왕서자 41명에게 좌평 관작을 주어 왕실의 안전을 도모하려 하였다. 조야는 갈수록 어지러워져 성충(成忠)과 흥수(興首) 같은 당대 명성이 높던 충신들이 귀양을 가고, 세간에는 백제는 스스로 망할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성충은 의자왕의 탈선에 대해 충고하다가 투옥되면서도 충언(忠言)을 아끼지 않았으며, 당나라 군사가 쳐들어오자 왕이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 대책을 물으니 백강구(白江口)와 탄현(炭峴)을 막으라는 계책을 주었다 한다. 그러나 왕이 이를 따르려 하자 대신들이 반대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의자왕이 충신들을 투옥시키거나 귀양보낸 것이 꼭 그의 의사만은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성충이 의자왕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막고자 충고하다가 투옥된 것은 의자왕 16년 3월의 일이다. 그런데 그 반년 전인 의자왕 15년 8월에 백제군과 고구려군이 연합하여 신라의 30여 성을 점령하였다. 이것을 보면 의자왕의 사치한 생활로 갑자기 조정이 혼란해진 것이 아니라 귀족간의 정치적 분쟁이 조정을 혼란하게 하였고, 명성이 높던 성충 · 흥수 같은 충신들까지도 희생을 당한 듯하다.
백제의 내분을 눈치챈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하여 660년(의자왕 20) 드디어 백제를 공격하였다. 신라의 출정군은 대장군 김유신(金庾信)과 장군 품일(品日) · 흠춘(欽春)이 거느린 5만 대군이었고, 당군은 소정방(蘇定方)이 거느린 13만 대군이었다.
신라군은 태자의 지휘하에 탄현을 넘어 백제로 진격하였고, 당군은 산둥반도(山東半島)를 출발, 덕물도(德勿島 : 지금의 德積島)를 거쳐 백강(白江 : 지금의 錦江)으로 들어왔다. 나당연합군은 7월 10일을 수도 사비성 공격의 날로 정하고 사비성 남방에서 합세하기로 하였다.
다급해진 의자왕은 군신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귀양간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대책을 물었다. 흥수는 백강 어귀와 탄현을 지키라 하였다. 그러는 동안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黃山 : 지금의 충청남도 연산)에 이르렀고, 당군은 백강으로 들어와 상륙하였다.
백제는 이미 백강과 탄현을 막을 기회도 놓쳤으므로 장군 계백(階伯)으로 하여금 우선 신라군을 저지하게 하였다. 당시 사비성에 있던 군대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계백은 5,000명으로 결사대를 조직해 황산평야에서 신라군을 맞아 싸우기로 작전을 세웠다. 계백은 출진에 앞서 집으로 돌아가 “살아서 노예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면서 그 가족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신라군 5만을 상대로 한 백제군 5,000명의 출진은 결국 죽음으로써 백제의 마지막을 장식할 뿐이었다. 이미 백제왕조는 그 누구의 힘으로도 존속이 불가능한 시점에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계백의 결사대는 신라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결국 싸움은 패배로 끝나고 신라군은 당군과 함께 수도로 진격하였다.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하고 왕자 태(泰)가 왕이 되어 항전하였으나, 곧 성은 함락되고 의자왕은 돌아와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건국한 지 31대 678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4) 백제의 부흥운동
한 왕조가 오래 지속되면 결국 지배층이 비대해지고, 그렇게 되면 지배층 내부에서는 이해를 둘러싸고 자주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백제 말기의 지배층 내분도 결국 숙명적인 현상이었던 셈인데,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외교상의 실수마저 거듭함으로써 왕조의 멸망을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지도층의 분열이 가장 큰 원인이 되어 멸망한 백제는 사실상 각 지방에 많은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세력들이 건재해 있었다. 이 세력들은 왕조를 부흥시키자는 명분으로 다시 연합할 수 있었다.
백제의 부흥운동은 4년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신라와 함께 백제를 점령한 당나라는 백제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고 전국에 5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여 각각 그 지방 세력가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며, 유인원(劉仁願)과 왕문도(王文度)의 군대를 사비성과 웅진성에 남겨 두어 이를 감독하게 했다. 소정방과 김유신은 각각 철군하였다.
그러나 곧 부흥군이 일어나 당의 5도독부제는 실시되지도 못하고 신라군과 당군은 백제부흥군과 전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최초의 백제부흥군은 왕족 복신(福信)과 중 도침(道琛)이 주류성(周留城 : 지금의 충청남도 한산)을 근거로 일으켰으며, 이어 흑치상지(黑齒常之)도 임존성(任存城 : 지금의 충청남도 대흥)을 근거로 부흥군을 일으켰다.
이어 전국에 걸쳐 200여 성이 호응을 해오자 복신과 도침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풍(豊)을 맞이하여 왕위에 추대하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군을 공격하였다. 당군은 몇 차례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으나 그 때마다 신라가 구원군을 보내어 위기를 면하였다.
부흥군이 계속 강화되자 당나라 본국에서도 지원군을 파견하였고, 부흥군은 고구려와 왜군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양군의 공방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백제왕조는 멸망했지만 백제부흥군은 전국을 수복하고 나당군은 사비성과 웅진성만 점령한 상태로 4년간 양군의 전투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은 내분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먼저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전권을 장악하더니, 복신은 다시 풍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이 때 당나라가 다시 응원군을 보내어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포위, 공격하자 풍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성은 함락되었다. 이어 임존성의 흑치상지도 항복하여 4년 만에 부흥운동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5) 고구려의 멸망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점령한 뒤 곧 고구려 원정길에 올랐다. 661년(보장왕 20) 8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소정방 등의 당군은 남북으로 고구려를 협공하였다. 이 때 신라군은 백제부흥군의 공격을 받아 그들과 싸우는 사이에 당군만이 평양성으로 진격하였다.
당군은 단독으로 평양성을 포위하여 7개월 동안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고구려는 당군의 공격을 물리쳤으나, 거듭되는 나당과의 싸움으로 국력이 소모되었고, 요동지방의 많은 요새들이 파괴되었다.
그런데 이 때 지도층의 내분이 일어났다. 666년 정권을 잡고 있던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이 죽고 그 장남 남생(男生)이 대막리지가 되었다. 남생은 대막리지가 되자 남건(男建) · 남산(男産) 두 아우에게 잠시 국정을 맡기고 지방 시찰길에 올랐다. 이 때 이간하는 자가 있어 남건 · 남산에게 형이 동생들을 의심한다고 모함하고, 남생에게는 아우들이 형을 시기한다고 모함하였다.
결국 남생은 평양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남건은 대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내어 형을 공격하였다. 남생은 싸움에 패하여 옛 수도 국내성으로 들어가 무리를 모으는 한편, 아들을 당나라에 보내어 응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남생은 동생과의 전투에서 결국 패하여 당나라로 망명하였고, 이어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淵淨土)도 12성 763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나당연합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다시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켰다. 668년 6월 김인문(金仁問)이 거느린 신라군과 이세적(李世勣)이 거느린 당군이 고구려를 남북으로 공격하였다. 문무왕은 한성주(漢城州)까지 나와 신라군을 독려하였다. 결국 포위된 지 1개월 만인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되고 보장왕이 항복하니, 고구려는 건국한 지 28대 705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멸망시의 고구려는 총 69만 7,000호였다.
(6) 고구려의 부흥운동
평양성이 함락되고 왕이 잡혀갔으나 고구려 역시 지방의 각 성읍들은 다시 일어나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은 궁모성(窮牟城)을 근거로 세력을 규합하여 왕자 안승(安勝)을 추대하고 당군과 싸우며 신라에 응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안승의 부흥군은 당군의 세력을 꺾지 못하고 1년 만에 4,000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신라는 안승을 금마저(金馬渚)에 정착하게 하고 고구려왕에 책봉하여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안승이 남하한 뒤에도 고구려 유민들은 사방에서 일어나 당군을 공격하였다. 안시성이 671년 7월까지 당군에 항전하였으며, 백빙산(白氷山)을 근거로 한 유민들은 신라의 지원을 받으며 672년 12월까지 당군에 항전하였다. 또한, 673년 4월 칠중성(七重城)에서도 이근행(李謹行)의 당군과 싸웠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부흥군은 끝내 왕조의 부활을 성취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그렇지만 부흥군은 평양에 설치했던 당나라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 : 撫順方面)으로 옮겨가게 했고, 신라가 한반도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7) 신라의 민족통일
백제와 고구려는 모두 700여 년을 이어온 노대국으로서 자연히 그 지배층은 비대해졌고 이에 따라서 내분이 자주 일어났다. 또한, 오랫동안 서로 통일의 주인이 되려는 경쟁을 벌이면서 피로해 있었다. 이 때 중국대륙의 새로운 통일왕조와 결탁한 신흥 신라에 의하여 차례로 멸망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이 곧 신라의 삼국통일은 아니었다. 양국을 점령한 뒤 당나라는 일방적으로 두 나라를 모두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이를 통치하려 하였다. 이에 신라에게는 당군을 몰아내고 실질적으로 삼국을 통일해야 할 국가적 민족적 과업이 남게 된 것이다.
당나라는 당초 백제를 점령한 다음 곧 신라도 병합하려 하였다. 소정방이 회군하자 당고종이 “어찌하여 신라는 정벌하지 않고 돌아왔는가?”라고 물은 것으로 보아, 당군은 출정시 이미 신라점령 계획도 함께 세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이 계획을 알고 대비책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당나라는 이를 단념하고 고구려로 화살을 돌리게 된 것이다.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당군과 함께 백제부흥군을 진압하는 한편, 당군을 부추겨 고구려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백제 영토 안에 당나라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당나라는 신라의 속셈을 알고 백제부흥군을 토벌한 후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백제를 통치하게 하며 신라를 견제하려 하였다.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하기까지는 백제 내에서 소극적으로 군사활동을 벌이면서 당군과 충돌을 피하다가, 고구려가 멸망하던 해부터 적극적인 당군 축출 작전을 전개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여 고구려지역에서 당군을 몰아내는 한편, 백제지역의 각 성읍도 차례로 점령해 나갔다.
660년 백제왕조가 멸망하였으나 당군과 신라군은 웅진과 사비를 점령하고 있었을 뿐 백제 전역이 각 성주들에 의하여 독립한 상태였다. 670년(문무왕 10) 3월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유민인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가 당군을 토벌하였고, 671년 4월에는 석성(石城 : 林川)에서 당군을 공격, 5,300인을 참살하였다.
671년 7월에는 동맹군을 일으킬 당시 대동강 이남의 땅은 신라에게 주겠다고 한 당태종의 말을 상기시키면서, 한반도 지역은 신라가 점령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전달하였다. 이로써 두 나라는 공식적으로 목표를 밝히면서 전투를 계속하게 되었다.
672년 1월 신라군은 가림성(加林城 : 林川)의 당군을 격파하였고, 7월에는 고간(高侃) 이근행의 1만 3,000군을 평양 근교에서 격파하였다. 675년 9월 바다를 건너오는 설인귀의 군사를 천성(泉城)에서 격파하는 한편,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한 이근행의 2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이 매초성전투에서 신라는 당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676년 11월 설인귀가 다시 본국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나, 기벌포(伎伐浦 : 長項)에서 그 상륙을 저지하고 격파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5년에 걸친 당군과의 전선 없는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한반도를 통일하였다.
(8) 삼국통일의 의의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후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삼국의 백성을 통합한 것은 한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비록 고구려 동북지역에서 발해가 건국되고 요동지방은 당군에게 점령되었지만, 삼국의 문화는 통일신라에 의하여 융합, 발전되었다.
삼국민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고대국가를 형성한 뒤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분리,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나 언어상으로 서로 다른 특색을 가지게 되었다. 이 특징들이 통일 후 모두 신라에 계승되고 융합되어 통일된 민족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통일의 주인인 신라의 문화가 가장 후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 · 백제의 문화는 더욱 잘 계승될 수 있었다.
또한, 신라는 과거 가야를 통합했을 때에도 그 문화를 수용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우륵(于勒)의 가야금을 전수한 것이 그 예이다. “가야금은 망국의 음악이므로 배워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신하도 있었지만, 진흥왕은 “가야왕이 방탕하여 스스로 망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면서 이를 장려하였다.
통일 후 고구려 왕산악(王山岳)이 만든 거문고[絃樂]가 신라에 전해지고, 백제의 불상양식이나 석탑양식이 신라에 계승, 발전된 것도 모두 신라의 적극적인 문화수용 정책 때문이었다. 통일신라의 불교계 고승(高僧)들이 모두 고구려계인 것은 사상계 · 학계에서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활약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삼국문화는 통일신라에 의해 융합, 발전하여 이후 우리 민족문화의 근간이 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발해 왕조는 고구려 유민에 의해 고구려의 옛 영토에서 형성되었으나, 발해는 백제나 신라의 문화를 충분히 수용하고 융합하지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신라의 통일이 비록 고구려의 일부 영토를 상실한 불완전한 통일이라 하더라도, 우리 민족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