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소성전투 ()

고대사
사건
675년(문무왕 15) 나당전쟁(羅唐戰爭) 중에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맞아 매소성(買肖城)에서 싸워 승리를 거둔 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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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매소성전투는 675년(문무왕 15) 나당전쟁 중에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맞아 매소성에서 싸워 승리를 거둔 큰 전투이다. 매소성의 위치는 알 수 없다. 675년 당나라 대규모 원정군이 신라 칠중성을 함락하고 매소성에 이근행(李謹行)의 20만 대군을 주둔시켰다. 신라가 식량과 군수물자를 보급하려고 온 당의 설인귀 함대를 격파하고 매소성을 공격했다. 보급이 끊긴 당군은 신라의 공격에 말과 많은 병기를 버리고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 이후 당은 원정군의 보급문제·국내여론 악화와 더불어 토번의 중국 침입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정의
675년(문무왕 15) 나당전쟁(羅唐戰爭) 중에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맞아 매소성(買肖城)에서 싸워 승리를 거둔 큰 전투.
역사적 배경

매소성의 위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 나오는 고구려 매성현(買省縣)으로 비정하나, 현지에서 실증된 위치는 알 수 없다.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편성해 660년에 백제를 패망시키고,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가 백제 · 고구려 양국을 직접 지배했으므로 신라는 장기간에 걸쳐 전쟁한 대가가 없었다. 더욱이 당나라는 663년부터 신라를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로, 신라왕을 계림주도독(鷄林州都督)으로 격하시켜 신라의 자주권마저 빼앗으려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를 패망시킨 뒤, 곧 대당전쟁(對唐戰爭)을 전개해 전쟁의 정당한 이권과 자주성을 찾고자 하였다.

경과 / 결과

고구려가 패망한 뒤, 곧바로 고구려의 각지에서 고구려 부흥군이 크게 일어났는데, 그 중의 일파가 검모잠(劍牟岑) · 안승(安勝) · 고연무(高延武)가 거느린 항당(抗唐)세력이었다. 이들은 669년경 한때 평양을 탈환한 일도 있었으나, 차츰 당나라 군대에게 밀려 신라 역내로 들어왔다.

670년 3월 신라의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유민인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각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 당나라 군사와 싸운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나당전쟁이 전개되었다. 다시 당나라는 한병(漢兵)을 거느린 고간(高侃)과 말갈병을 거느린 이근행(李謹行)을 보내어 평양 · 황해도 방면에서 북상하는 신라군을 저지하게 하였다.

670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나당전쟁은 673년 무렵 임진강을 경계로 고착상태에 빠진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당은 675년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대총관(鷄林大摠管)으로 삼아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신라는 당군의 침입을 대비하여 9군(九軍)을 동원하였지만, 675년 2월 유인궤에 의해 칠중성(七重城)이 함락되었다. 신라는 칠중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문무왕(文武王)이 당에 사죄사(謝罪使)를 보낼 정도였다. 칠중성 전투 후 이근행이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가 되어 기병 7만을 포함한 최정예 20만 대군이 매소성 부근에 주둔하였다. 당시 이근행이 이끌던 병력은 당 · 말갈 · 거란의 혼성군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근행의 병력은 『삼국사기』에는 20만명이라 했지만 중국측 사서를 참작하면 4만명으로 추정된다. 20만이라는 당군의 규모가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당나라가 병력을 증가시켜 한반도에서 신라와 고구려부흥군에 대한 우세를 보장하려 했던 것은 분명하다.

675년 9월 설인귀의 함대가 숙위학생(宿衛學生)김풍훈(金風訓)을 길잡이로 삼아 한강 하류의 천성(泉城)으로 침입하였다. 김풍훈의 아버지 김진주(金眞珠)는 하슬라주(何瑟羅州) 장관과 병부령(兵部令) 등을 역임하여 신라의 군사업무에 능통했다. 그 아들 풍훈을 길잡이로 삼은 것은 서해안의 복잡한 지형과 해류를 감안해 한강 하구 일대로 진입한 후 신라 내륙으로 진입하는데 도움을 받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설인귀는 한강 하류 일대를 장악하여 임진강을 경계로 형성된 전선을 한강선으로 재조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신라 장군 문훈(文訓) 등이 이끄는 약 1∼3만의 신라군이 당군을 공격하여 말 1천필을 노획할 정도로 크게 이겼다.

당시 설인귀의 함대가 매소성에 주둔하던 당군의 식량과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보급함대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당군은 임진강의 수로를 통해 본국으로부터 보급을 받고 있었는데, 병력의 규모가 거대할수록 식량 보급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설인귀의 보급선단이 격침되고 겨울에 접어든 시점에 재보급의 가능성이 희박해지면서 매소성에 주둔하던 이근행의 군대 역시 불안해질 수 밖에 없었다. 신라군이 매소성을 공격하자 이근행의 20만 군대는 말 30,380필과 많은 병기를 버리고 북쪽으로 퇴각했다.

의의와 평가

매소성전투에서 신라의 승리는 나당전쟁에서 분수령을 이루었고, 이로써 신라는 나당전쟁의 승기를 잡을 결정적 기회를 얻었다. 이후 기벌포해전(伎伐浦海戰)에서 설인귀가 이끄는 당군은 다시 크게 패하였다. 매소성전투 패배 이후 당은 원정군의 보급문제 · 국내여론 악화와 더불어 토번(吐蕃)의 중국 내지(內地) 침입으로 말미암아 토번 전선에 주력하게 되면서 마침내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매소성전투는 당나라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통일신라가 명실상부하게 한반도 중남부를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자치통감(資治通鑑)』
「당의 군사전략을 통해 본 나당전쟁기의 매소성 전투」(이상훈, 『신라문화』29, 2007)
「高句麗滅亡後の遺民の叛亂及び唐と新羅との關係」(池內宏,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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