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오유 ()

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당에 부용된 말갈병을 공격하며 나당전쟁을 전개한 신라군 지휘관.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관련 사건
오골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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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설오유는 남북국시대 신라군의 지휘관으로 고연무가 이끄는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오골성 전투를 지휘하여 나당전쟁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의 가계는 전하지 않으나 성씨는 설씨이며, 관등은 사찬(제8관등)을 지냈다. 설총, 설중업 등의 사례를 볼 때 6두품 신분의 인물로 여겨진다.

정의
남북국시대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당에 부용된 말갈병을 공격하며 나당전쟁을 전개한 신라군 지휘관.
인적 사항

설오유(薛烏儒)의 가계는 전하지 않으나, 제8관등 사찬을 지냈다. 설총, 설중업 등의 사례를 참고할 때 6두품 신분의 인물로 여겨진다.

주요 활동

670년(문무왕 10) 3월 설오유는 신라군 1만 명을 이끌고 고연무가 이끄는 고구려군 1만 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오골성에 이르렀다. 그런데 당에 부용된 말갈병이 먼저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4월 4일 양측이 크게 전투를 벌였는데 신라 · 고구려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오골성(또는 개돈양) 전투라 한다. 그러나 당나라 장수 고간이 지휘하는 대규모의 당군이 투입되자, 설오유가 이끄는 신라-고구려 연합군은 백성(白城)으로 전략상 후퇴하여 전선을 형성하였다. 오골성 전투는 나당전쟁의 개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평가

나당전쟁의 개전과 관련하여, 당시 강성해진 토번이 당을 공격하자, 당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력을 재배치하면서 한반도 주둔 당군을 서쪽으로 이동시켰고, 이때 생긴 군사적 공백이 신라의 공격을 초래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토번은 나당전쟁의 개시와 구체적 관계가 다는 것이 사료틀 통해 확인되고 있다. 실제로 토번과 당의 무력 충돌은 670년 4월이어서, 오골성 전투 시점과 차이가 없다.

또한, 나당전쟁의 1차적 원인은 패강 이남의 영역을 신라에 양도하기로 한 동맹 간의 약속을 파기하고 한반도를 지배하려던 당의 팽창 정책에 있다. 신라는 이를 인식하고 스스로 항전을 결정하였다. 즉 신라의 의지에 따른 전쟁이었다.

오골성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하여 오골, 개돈양, 백성이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2만 명의 병력으로 요동지역까지 침입한다는 것은 상정하기 어렵다는 부정적 견해가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에 "압록강을 건너 옥골에 이르렀다(度鴨淥江至屋骨)."라고 기록되어 있어, 요동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오골(烏骨)과 옥골(屋骨)은 동일한 곳으로 추정되며, 요령성(遼寧省)의 봉황성(鳳凰城, 지금의 단둥시)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단행본

이상훈, 『신라의 통일전쟁』(민속원, 2021)
이상훈, 『나당전쟁연구』(주류성, 2012)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9)
서영교, 『나당전쟁사 연구』(아세아문화사, 2006)
임기환,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일조각, 2006)
池內宏, 『滿鮮史硏究-上世篇』 2(吉川弘文館, 1960)

논문

이상훈, 「나당전쟁의 개전과 설오유 부대」(『역사교육논집』 45, 2010)
이정빈, 「고연무의 고구려 부흥세력과 부흥운동의 전개」(『역사와현실』 72, 한국역사학회, 2009)
강종훈, 「7세기 삼국통일전쟁과 신라의 군사활동」(『신라문화』 24,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04)
서영교, 「나당전쟁과 토번」(『동양사학연구』 79, 동양사학회, 2002)
노태돈, 「나당전쟁기(669~676) 신라의 대외관계와 군사활동」(『군사』 34, 한국국방학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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