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가계는 잉피공(仍皮公)-담날(談捺)-원효(元曉)-설총(薛聰)-설중업(薛仲業)으로 이어진다.
『삼국사기』설총전에 “일본국 진인(眞人)이 「증신라사설판관시(贈新羅使薛判官詩)」를 지어 주었는데 그 서(序)에 ‘일찍이 원효거사(元曉居士)가 지은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보고 그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을 깊이 한(恨)하였는데, 신라국사(新羅國使) 설(薛)이 곧 거사의 포손(抱孫)임을 듣고 비록 그 조(祖)를 보지 못하였으나 그 손(孫)을 만난 것을 기뻐하여 이에 시를 지어준다.’고 하였다.
그 시가 지금도 남아 있으나, 다만 그 자손의 이름만은 알지 못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선사서당화상탑비(高仙寺誓幢和尙塔碑)」에는 “대력(大曆 : 唐代宗의 연호. 766∼779) 봄에 대사의 손자 한림(翰林) 자(字) 중업(仲業)이 바다를 건너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고 하였다.
또『속일본서기(續日本書紀)』에 의하면 780년(선덕왕 1) 정월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대판관(大判官) 한나마(韓奈麻 : 大奈麻)로서, 일본의 광인왕(光仁王)으로부터 종5품하(從五品下)의 일본관직을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