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율희는 나말여초 형 소충자(蘇忠子)와 함께 김해 지역에서 군림하던 김인광을 몰아내고 김해부지군부사가 되어 새로운 지방 세력가로 등장하였다. 그들 형제가 처음부터 김해 지역을 근거지로 한 것은 아니었다. 김인광이나 소율희 모두 진례성(進禮城)을 관직명에서 칭하고 있는데, 진례성은 김해부의 서쪽 35리에 자리한 지금의 김해시와 창원시의 경계 지역에 해당하였다. 이는 그들이 처음에는 진례성을 근거지로 하였다가 점차 세력을 확대하면서 김해 지역까지 장악하며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에 두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강주 지역의 호족이었던 왕봉규처럼 해상 활동을 통해 대외 교류를 전개하며 세력을 확장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소율희 · 소충자 형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선종과 관련한 활동이다. 그들은 선승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면서 김해 지역이 선종의 요람지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진경대사 심희, 낭공대사 행적, 진철대사 이엄, 진공대사 충담 등이 소율희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소율희 · 소충자 형제가 나말여초 불교계의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특히, 진경대사 심희는 봉림산파를 개창하면서 직접적으로 김인광이나 소율희 형제의 후원을 받았다. 이는 선승들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을 개창할 때 호족의 도움을 받은 상징적 사례이다.
소율희 · 소충자 형제는 구 가야계 세력에 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율희가 자신의 이름을 김율희로 이름을 바꾼 사실에 더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가락국기에 수로왕의 제사와 관련하여 소율희가 등장한 것도 그러한 추측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들이 신라 왕실과 유기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던 배경에는 이러한 사실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이는 신라 중대의 개창에 김유신계〔가야계〕의 활약이 컸다는 사실에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소율희 · 소충자 형제는 친신라적 입장을 견지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삼국 쟁패 과정에서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고 고려가 성장함에 따라 신라가 급속히 쇠퇴하게 되고, 결국 이들도 역사의 무대에서 함께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