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김씨(金氏). 어려서부터 불사(佛事)를 좋아하였으며 9세에 출가하여 혜목산(惠目山)현욱(玄昱)의 제자가 되었다.
868년(경문왕 8)에 현욱은 간략히 그에게까지 이어진 선법(禪法)의 맥을 설명하고 심희에게 심등(心燈:부처와 조사로부터 이어진 깨달음의 맥)을 전하였으며, 이 법을 믿고 부지런히 정진할 것을 당부한 뒤 입적하였다.
873년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명산을 순방하다가 888년(진성여왕 2)부터 송계산(松溪山)에 머물면서 좌선에 몰두하였는데, 도를 구하고자 하는 학인(學人)들이 모여들었다.
그 뒤 설악산으로 옮겨 선객(禪客)을 접하였고, 진성여왕이 궁궐로 청하자 강원도 강릉에 있는 탁산사(託山寺)로 은거하였다.
얼마 뒤 김해의 서쪽에 선림(禪林)이 있음을 듣고 경상남도 창원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熙)가 성안에 정진할 수 있는 처소를 지어 머물러 있게 하였다.
이 때 효공왕은 특사를 파견하여 경배의 뜻을 표하였다. 그곳은 수선(修禪)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으므로 선우(禪宇)를 창건하고 봉림사(鳳林寺)라 하였다.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명의장군(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은 이때 귀의하여 보방(寶坊:사찰의 당우)을 건립하였다.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하나인 봉림산문은 이 때부터 그 선풍이 크게 선양되었다. 경명왕은 그의 덕을 사모하여 청하고자 하였으나 쉽게 움직이지 않자 흥륜사(興輪寺) 승려 언림(彦琳)으로 하여금 후한 예로써 그를 모셔 올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응하여 918년(경명왕 2)에 경주로 가자 경명왕은 왕궁으로 맞아들여서 사자(師資:스승의 덕)의 예를 표하고 설법을 청하였다. 설법이 끝난 뒤 왕은 법응대사(法膺大師)라는 존호를 주었다.
그 뒤 봉림사로 다시 돌아와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나이 68세, 법랍 50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진경대사(眞鏡大師), 탑호(塔號)는 보월능공(寶月凌空)이다.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이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어 경복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