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욱 ()

서울 경욱 부도 정면
서울 경욱 부도 정면
불교
인물
일제강점기 통도사(通度寺) 혜봉의 제자로 정혜사 만공의 법맥을 계승한 승려.
이칭
고봉(古峰)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0년(고종 27)
사망 연도
1961년
본관
순천(順天)
출생지
대구
정의
일제강점기 통도사(通度寺) 혜봉의 제자로 정혜사 만공의 법맥을 계승한 승려.
개설

본관은 순천(順天). 성은 박씨(朴氏), 호는 고봉(古峰). 경욱은 법명이다. 대구의 목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 부모에게 사서삼경을 배우고, 18세에 혼인하였으나 19세에 방랑길에 올랐다. 방랑 도중 일하(一河)의 인도를 받아 통도사로 가서 1911년혜봉(慧峰)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상주 남장사(南長寺)로 옮겨 은사에게서 사미계(沙彌戒)와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전라도 석금산으로 옮겨서 정진하였다.

1915년 팔공산 파계사(把溪寺)의 성전선원(聖殿禪院)에서 좌선하던 중 도를 깨달았다. 그 뒤 여러 선지식을 찾아 정진하다가 1922년 덕숭산 정혜사(定慧寺)의 만공(滿空)으로부터 법맥을 이어받고 고봉이라는 호를 받았다. 그 뒤 정혜사에서 여러 해를 지내다 40세가 되던 해에 거사(居士) 차림으로 방랑길에 올랐다가, 대구에서 청년회를 조직하여 청년들에게 독립운동의 정신을 심어 주었다. 또한, 상해(上海)에 있는 독립군을 돕다가 1년 동안 구속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 서봉사(棲鳳寺)·백운사(白雲寺) 등의 조실(祖室)이 되어 많은 수행자들에게 선법을 가르쳤고, 6·25 전쟁 때 공주 마곡사(麻谷寺) 은적암(隱寂庵)에서 선회(禪會)를 열고 선지(禪旨)를 강하였으며, 말년에는 아산 봉곡사(鳳谷寺), 대전 미타사(彌陀寺) 등지에 머물렀다. 특히, 그는 파격적인 기행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양산 내원사(內院寺)에 있을 때 주지 혜월(慧月)이 직접 밭갈이 등의 일을 하여 승려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없게 되자, 혜월이 출타한 틈을 타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소를 장에 내다 팔고 그 돈으로 양식과 옷감 등을 마련해 왔다. 혜월이 돌아와 소를 찾자 방 안에서 옷을 활짝 벗고 소 울음소리를 냈다고 한다.

항상 술과 벗하며 살았으나 언제나 청정한 마음을 잃지 않았고, 술좌석에서도 결코 화두(話頭)를 잃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법을 묻는 제자들에게는 언제나 남의 집 부처를 건드리지 말고 자성 속에서 법을 구하도록 깨우쳤다. 70세에 서울 화계사(華溪寺)로 옮겨 머무르다가 1961년에 입적하였으며, 다비(茶毘) 뒤 빨강·노랑·파랑 빛깔의 사리를 남겨 부도를 세웠다.

참고문헌

『무상(無常) 속에 영원(永遠)을 산 사람들』(김정휴, 홍법원,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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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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