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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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요령성 봉성진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 산성.
이칭
이칭
오골성, 烏骨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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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봉황성은 중국 요령성 봉성진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이다.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큰 산성의 하나로 오골성이라고 불렸다. 요동반도 동남부의 요충지에 위치한다. 성벽의 길이는 15.955㎞인데 돌로 쌓은 길이는 7.525㎞ 정도이다. 나머지 구간은 천연 절벽을 성벽으로 삼았는데 높이가 50m를 넘는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는 이 성을 압록강 이북을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조선 인조 때에는 이경석·김상헌 등이 청나라에 의해 1년 동안 봉황성에 구금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봉황성이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정의
중국 요령성 봉성진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 산성.
개설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큰 산성의 하나로, 오골성(烏骨城)이라고 불렸다.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중국 요녕성 단동시의 동북쪽 20여 km쯤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산성은 요동반도 동남부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서쪽으로는 낭낭산성(娘娘山城)을 비롯하여 수암(岫巖)의 여러 성을 거쳐 안시성(安市城)에 이르고, 서북쪽으로는 백암성(白巖城)을 지나 요동성(遼東城)에 도달하며, 동쪽은 압록강 물길을 따라 박작성(泊汋城)을 지나 중상류에 자리한 고구려의 중심부로 이어진다.

역사적 변천

오골성은 고구려 때 불렸던 이름이지만, 명나라 때부터는 봉황성이라고 불렸다. 명나라 때에는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을 다룬 민간 전승의 문학작품이 유행하였는데, 이 책들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들어왔다. 책에는 설인귀(薛仁貴)의 영웅담을 실은 무대로 봉황산이 묘사되었고, 역사연의(歷史演義)의 무대인 안시성과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의 활약도 담겼다.

17세기 이후에 조선 사신인 연행사(燕行使)가 중국을 오가면서 봉황성을 접하였다. 봉황성과 안시성을 다룬 민간 전승의 문학작품을 읽었던 연행사는 자연스럽게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이해하였고, 이러한 이해는 병자호란 이후에 민족의식이 확대되면서 점차 굳어져 『이계집(耳溪集)』이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등에 실리게 되었다.

17세기 중반에 남구만(南九萬), 김창업(金昌業) 등은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등에 나타나는 지리적 문제점을 근거로 삼아 봉황성설을 부인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 박지원(朴趾源), 안정복(安鼎福) 등이 『한서(漢書)』 「지리지」와 『구당서(舊唐書)』의 기록을 인용하여 봉황성설의 오류를 지적하고서 안시성은 개주(蓋州) 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내용

봉황산의 최고봉은 해발 836m의 찬운봉이다. 이 봉우리를 정점으로 우뚝 솟은 여러 봉우리와 가파른 바위 절벽들이 험준한 산세를 이루는데, 가파른 바위 절벽을 성벽으로 삼았고, 봉우리 사이의 낮은 지대에도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길이는 15.955㎞인데, 돌로 쌓은 길이는 7.525㎞ 정도이고, 나머지 구간은 천연 절벽을 성벽으로 삼았는데, 성벽의 높이는 50m가 넘는다. 현재 동북쪽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다.

성벽의 일부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 치성(雉城)을 두었고, 성벽 모서리에는 주변 동향을 살피기 위한 시설로 고대(高臺)를 쌓았다. 현재 남쪽과 북쪽 문터가 확인되었는데, 모두 옹성을 둘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계곡에 설치된 남문은 군사와 무기를 산성 안으로 옮겼던 정문으로 추정된다. 성 안에는 상당한 규모의 평지가 분포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는 보장왕 4년(645)에 당나라 이세적(李世勣)이 이끈 군대가 백암성을 공격하자 오골성에서 군사를 지원하였고, 648년에 당나라 설만철(薛萬徹)이 박작성을 포위하자 오골성과 안시성 등에서 군사 3만 명을 보냈다고 하였다. 고구려 당시에 오골성이 주위의 크고 작은 성을 지원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오골성을 압록강 이북의 땅을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거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였을 때 안시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당나라에 항복한 고구려 장군 고연수(高延壽)고혜진은 오골성이 압록강 이북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였으므로, 오골성을 먼저 공격하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건안성(建安城)신성(新城)에 10만명의 군사가 있고 안시성의 군사가 퇴로를 막을까 두려워 봉황성을 치지 않고 안시성을 공격하였다가 패하였다. 이보다 이전인 영양왕 23년(612)에는 수나라 군대가 이곳을 지나 평양을 공격하려다가 살수(薩水)에서 크게 패배하기도 하였다.

조선 인조 20년(1642)에 청나라와의 척화를 주장하였던 이경석(李景奭), 김상헌(金尙憲) 등은 청나라 군사에 의해 심양(瀋陽)에 끌려갔다가 1년 동안 봉황성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당시 봉황성의 책문(柵門)은 조선 관리들이 청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신고하던 오늘날의 세관과 같은 곳이었다. 조선 관리는 봉황성 책문을 지난 뒤 진동보(鎭東堡, 松站), 진이보(鎭夷堡, 通遠堡), 연산관(連山關), 첨수참(甛水站), 요동(遼東), 십리보(十里堡)을 거쳐 심양으로 들어갔다. 그 뒤 봉황성은 러일전쟁 때 러시아가 봉황성과 안동성 일대에 점령하면서 일본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전장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한인들이 봉성농우회(鳳城農友會)를 조직하며 활동하였던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독립운동사자료집』14권(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영위원회, 1978)
「연행로상의 공간 탐색, 봉황산성」(이승수,『정신문화연구』103, 2006)
『중국내의 고구려유적』(이전복 저, 차용걸 등 번역, 학연문화사, 1994)
「아버지 추정 이갑」(이정희, 『유랑수만리』, 1981)
북한토지연구소 http://www.nkland.org
집필자
이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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