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 ()

건축
개념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산의 높고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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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산성(山城)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산지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성곽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산성이 발달하었다. 현존하는 성곽 중 왕성이나 도성, 조선시대의 읍성을 제외하면 대부분 산성이다. 산성은 대부분 적의 공격을 관측하기 좋은 교통의 요충지에 구축되었다. 산성은 방어에 유리하지만 적의 포위 공격에 대비하여 성내에 집수 시설과 군수 물자를 비축해 두어야 하였다. 산성을 쌓는 방법은 축성 시기나 축성 주체에 따라 달랐으며, 군사적인 기능 외에 행정을 관할하는 치소성의 역할도 하었다.

정의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산의 높고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성.
기원

역사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곽은 고조선왕검성이다. 왕검성은 기원전 109년 한나라의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가 이끄는 5만 대군의 포위 공격에도 몇달 동안 버텨낼 수 있었을 정도로 견고한 성이었다. 왕검성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거가 산세가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왕검성은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 시기 남한 지역의 주된 방어 시설은 환호와 목책(木柵)이었다. 부여 송국리, 진주 대평리, 경주 석장동, 창원 덕천리, 인천 문학동, 강릉 방동리 등 전국 각지에서 고조선시대에 개별적으로 구축된 목책이 발견되거나 목책과 환호가 함께 발견되었다. 그러나 목책이나 환호는 평지나 구릉지에 만들어진 것으로 산성이라 보기 어렵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대부분의 성곽은 산성이었다. 가장 이른 시기의 산성인 고구려성은 졸본성으로 추정되는 환인의 오녀산성(五女山城)이다.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 방어를 위한 성으로 구축한 환도산성을 비롯하여 도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고구려 성곽은 산성으로 구축되었다. 산성은 평지성에 비해 방어력이 높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 6년조에는 당나라 조정에서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쌓았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산성이 가진 효용성을 알 수 있다.

입지 및 분포 양상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산성들은 수상 교통이나 육상 교통의 요충지에 들어섰다. 사방을 관측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산성을 구축한 것이다. 산성은 대부분 표고 100~200m 높이에 위치한다.

산성의 분포 양상은 각국의 방어 체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모든 성곽은 일정한 영역을 관장하는 거점 방어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함께 국경 지역이나 도성으로 이어지는 간선도로상의 요충지를 방어하거나 도성 주변에 설치되어 도성을 방어하는 기능을 겸하고 있었다.

행정 치소(治所)를 겸하였던 삼국시대의 거점성과 달리 당이나 거란, 말갈, 몽골 등 대규모 이민족과의 전쟁시에는 해발 고도 500m 이상의 높고 험준한 산악 지대에 2~10km에 달하는 넓은 성을 쌓았다. 인근 군현의 주민들이 평지를 비우고 입보(入保)하여 농성하는 이른바 '청야입보'를 위한 새로운 유형의 성곽이 등장하게 되었다.

산성의 분류

산성은 산 정상부를 둘러서 쌓은 테뫼식과 능선과 계곡을 감싸 안은 포곡식(包谷式)으로 분류된다. 백제산성처럼 계곡부를 포함하지 않고 산의 정상부에서 산복부를 아우르며 쌓은 산성을 '산복식 산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산 정약용과 신관호는 산성의 형태를 입지에 따라 4가지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고로봉형이다. 남한산성처럼 사방이 높고 중앙부가 낮은 바구니 형태의 지형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다음은 산봉형이다. 정상부가 평평하고 넓으며 사방은 잘라낸 것 같이 급경사를 이루는 형태이다. 그 다음이 사모봉형이다. 뒤에 봉우리가 있고, 그 가운데에 장대(將臺)를 설치할 수 있으며 산의 허리 부분에 성을 쌓아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든 관모 형태의 성곽이다. 마지막으로 마안봉형이다. 성벽의 양쪽 끝단이 높고 가운데 부분이 약간 낮은 지형에 쌓은 성으로 말안장 모양의 성곽이다.

축성 재료

산성은 축성한 재료에 따라 목책성, 토성, 석성으로 구분된다. 그중 목책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구축된 것으로 가장 손쉽게 쌓을 수 있는 방어 시설이었다.

축성 방법

산성의 축성법은 축성 시기와 축성 주체에 따라 달랐으며, 해당 집단이 가진 토목 기술의 수준이 반영되었다.

중국과 접해 있어 가장 이른 시기부터 산성을 쌓았던 고구려의 산성은 토성을 쌓듯이 내부를 흙으로 쌓고 외벽만 석축을 한 '토심석축공법'을 특징으로 한다. 평양성대성산성, 남한의 고구려산성은 대부분 이러한 공법으로 축성된 산성이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의 토목 기술을 받아들여 토성 중심의 산성을 많이 쌓았으며, 도성을 중심으로 발달된 판축 기법을 사용한 것이 확인된다. 사비기에는 석축 산성도 등장하는데, 주로 부정형(不定形)의 성돌로 허튼층쌓기를 한 성벽과 개거식 성문을 가진 것을 특징으로 한다. 가야도 토성 위주의 산성을 쌓았으나 토성 내부에 석축을 보강하는 '석심토축공법'과 토루(土壘)를 쌓을 때 목주를 많이 사용한 특징을 보인다.

이에 비하여 신라는 2열의 목주를 세우고 성토하여 쌓은 토성 외에도 470년에 쌓은 삼년산성을 시작으로 발달된 석축 산성을 쌓았다. 신라 산성은 장방형(長方形) 가공 성돌로 정연하게 쌓은 성벽과 보축 성벽, 현문식 성문 등을 특징으로 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삼국의 축성법을 융합하여 산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지대석과 퇴물림쌓기, 화강암가공성돌, 편축쌓기를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축성법이 등장하였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기저부 양쪽에 두 줄의 기단석을 놓고 판축하여 쌓는 '기단식 판축 토성'이 등장하였다. 이처럼 각국의 축성법이 달랐다는 것은 원천 기술인 토목 기술의 유형이 축성 집단과 축성 시기에 따라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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