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

삼국유사(권1) / 고조선조의 웅녀
삼국유사(권1) / 고조선조의 웅녀
고대사
지명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
개설

처음 사서에 등장할 때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고조선이란 명칭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이때 고조선(왕검조선(王儉朝鮮))이라 한 것은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단군조선을 ‘전조선(前朝鮮)’, 기자조선을 ‘후조선(後朝鮮)’이라 하였다.

고조선이란 명칭이 널리 쓰여진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씨조선과 구분되는 고대의 조선이란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고조선이 포괄하는 범위에 대해서는, 서기전 2세기 초에 일종의 정변을 통해 등장한 위만조선 이전 시기에 존재한 조선만을 칭하는 경우와, 위만조선까지를 포괄해 고조선이라 하는 경우로 나누어진다.

정치사적인 측면에서는 전자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위만조선의 사회와 문화가 그 앞 시기 조선과 이어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사회문화적인 면에서 고조선이라 할 경우 위만조선 시기까지를 포괄해 사용하고 있다.

명칭 유래

조선이란 명칭이 ‘땅이 동쪽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다(地在東表 朝日鮮明)’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는 조선이란 한자의 뜻을 새긴 풀이에 불과하다.

또 만주어에서 관할구역을 나타내는 ‘주신(珠申)’에서 비롯되었으며, 조선 · 숙신 · 여진 등이 모두 같은 어원을 지녔다는 설이 있고 단군신화에서 나오는 ‘아사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제기된 설로, 위나라 사람 장안(張晏)은 습수(濕水) · 열수(列水) · 산수(汕水)라는 강 이름에 조선이란 명칭의 연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현재까지로선 조선이란 국호의 어원은 명확치 않다.

고조선에 관한 연구 및 학설

고조선이 역사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언제인가에 대해, 『삼국유사』에서는 건국 기년을 서기전 2300년대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기년은 우리 선인(先人)들이 고조선을 어떻게 인식했는가 하는 각 시기의 역사의식을 반영한다는 면에서 사학사적인 의의는 크지만, 고조선사 자체에는 실제적인 의미가 없다.

고조선이라고 할 때, 그것은 ‘조선’의 고대역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 말할 때 이에서 논급될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는 한 사회가 국가 형성단계로 접어들기 위한 기본적인 역사적 조건이 마련되기 시작했을 때부터이다. 그것은 농경과 금속기의 사용이 어느 정도 진전된 이후부터이다.

한반도와 만주 일원에서 농경과 금속기가 보급된 시기를 볼 때 가장 빠른 지역인 요서(遼西) · 요동(遼東) 지역에서도 그것은 서기전 천수백 년을 넘지 못한다. 그보다 이전 시기인 신석기 단계의 사회에 있었던 어떤 집단을 고조선과 연관시켜 논급할 수는 없다.

농경과 청동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 어느 시기에 고조선이 역사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을 것이고, 고조선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으로 흔히 『산해경(山海經)』과 『관자(管子)』를 들고 있다.

『산해경』의 해내북경(海內北經)에서 조선의 위치에 관해 “조선은 열양 동에 있고 바다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라 기록하였다. 이 기사에 의거해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의 위치를 비정하는 고찰들이 있어 왔다.

그런데 『산해경』은 고대 중국의 지리서로서, 춘추시대에서 전한대에, 즉 서기전 8세기에서 서기전 1세기에 걸쳐 여러 지역에서 쓰여진 것들을 모은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조선이 어느 때의 상황인지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관자』의 경우, 경중갑편(輕重甲篇)과 규도편(揆度篇)에서 춘추시대의 제(齊)와 조선간의 교역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관자』는 서기전 7세기 제의 재상인 관중(管仲)의 저술이라지만, 실제 주된 내용은 전국시대(서기전 402∼서기전 221)의 제나라인들의 저술로서, 이를 관중의 이름에 가탁한 것이다.

따라서 『관중』에서 언급한 제와 조선과의 교역에 관한 언급은 기원전 5세기 이전부터의 어떤 전승에 의거했을 수도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에 의거해 조선이 언제부터 제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졌는지를, 바꾸어 말하자면 조선이란 실체가 언제 역사상에 등장했는지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조선에 관해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 기록은 『사기(史記)』와 『전국책(戰國策)』 등 한(漢) 초의 사서이다. 『사기』 소진전(蘇秦傳)에 의하면, 소진이 연(燕)의 문후(文侯: 서기전 361∼서기전 333)에게 당시 연의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연의 동방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 · 누번이 있으며.”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이 연의 변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연의 국세와 대외관계를 논할 때에 주의할 만한 세력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늦어도 서기전 4세기 중반에는 조선의 실체가 북중국 지역 사람들에게 뚜렷하게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책에서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런데 고조선에 관한 사실을 그 중 많이 기술한 『사기』 조선전의 기사도 주로 위만조선에 관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앞 시기의 고조선의 역사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문헌자료의 한계로 인해 고조선의 역사상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고조선 중심지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 자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 우선 고조선 중심지의 위치 자체가 분명해야 하는데,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그 동안 고조선사에 대한 연구는, 단군신화에 대한 고찰을 제외하고는, 주로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중심을 이루어왔다.

고조선의 중심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논고에서 재요령성설(在遼寧省說), 이동설(移動說), 재평양설(在平壤說)이 제기된 이래, 논란이 거듭되어 오고 있다.

현재 남한학계에서는 이 세 가지 설이 모두 제기되고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그 동안 고조선 중심지가 남만주 지역에 있었다는 재요령성설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돌연 1993년 가을 평양에서 ‘단군릉’이 발굴되었다면서,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평양에서 발굴된 ‘단군릉’에서 나온 인골의 연대측정을 통해, 그 기년이 서기전 3011년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평양의 ‘단군릉’은 모줄임고임 천장의 석실무덤이고, 그 곳에서 출토된 금동관도 삼국시대의 것임을 볼 때, 이 무덤의 주인공 역시 고구려 때 사람으로 보인다. 아무튼 갑자기 기존의 설을 바꾸었으므로, 앞으로 고조선사와 단군에 대한 이해체계를 어떻게 새로이 내세울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렇듯 논란이 계속되는 것은, 이에 관한 문헌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그나마 남겨진 단편적인 기록이 매우 추상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대의 지명 중에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통명사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 많다.

가령 고조선 중심지의 위치를 규명하는 논고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지명 중의 하나가 패수(浿水)이다. 그런데 역대의 사서에 등장했던 패수는 일찍이 정약용이 지적했듯이 여러 개였다.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백제 초기의 북쪽 경계인 패하(浿河)는 예성강이었으며, 고려시대에도 예성강의 일부가 패강(浿江)으로 불렸다.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에 자리잡았던 시기의 패수는 대동강이었다. 또한 요동의 개현(蓋縣) 지역에 흐르는 어니하(於泥河)를 패수라 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패수라고 비정될 수 있는 강은 여러 개 상정된다.

이런 현상은 패수가 원래 고유명사였다기보다, 강을 만주어에서 ‘畢拉’, 솔론(索倫)어에서는 ‘必拉(벨라)’, 오로촌어에서는 ‘必牙拉(삐얄라)’라고 했던 예에서 알 수 있듯, 강을 뜻하는 고대 조선어의 보통명사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밖에 고대사회에서는 주민 이동에 따라 같은 지명이 여러 군데에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문헌상에 보이는 지명의 위치 비정에 다양한 설들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실증상의 문제에 덧붙여 각 시대마다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커 상반된 견해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이 논란이 분분한 고조선 중심지 위치를 비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적으로 보다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는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 또한 요하 유역으로 보는 설과 평양으로 보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선 실물 유적으로 남아 있는, 진 · 한대의 만리장성의 위치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요동의 양평(襄平)이라고 하였다.

이 때의 요동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도 이견이 분분해, 오늘날의 북경(北京) 북쪽에 흐르는 난하(灤河)가 당시의 요하이고 난하 동편이 바로 『사기』에서 전하는 요하(遼河)라는 주장이 재요령성설을 주장한 논자들에 의해 견지되어 오고 있다. 그래서 이 입장에서는 진 · 한대 장성의 동쪽 끝은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 부근의 갈석(碣石)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만리장성은 후대의 것으로, 진 · 한대의 장성은 지금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다. 실제로 오늘날 요령성 서북부 지역 일대에서 진 · 한대 장성의 유적 일부가 뚜렷이 남아 있다.

구체적으로 요령성 지역의 장성의 유지는 두 개의 줄기를 이루며 동서로 길게 뻗쳐 있다. 북쪽 성벽의 유지는 화덕현(化德縣) 동쪽에서 영금하(英金河) 북안을 거쳐 부신현(阜新縣) 동쪽에 이르며, 남쪽 성벽은 객라심기(喀喇心旗)와 적봉(赤峰) 남부를 거쳐 북현(北縣)에 이른다.

능선을 따라 전개되는 긴 장성의 자취는 사진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장성의 자취가 이어지는 군데군데에 요새가 존재했고, 그곳에서 연 · 진 · 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장성의 유지가 요하에 이른다면, 『사기』에서 전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요동은 현재의 요동이며, 자연 요동군의 동쪽에 있었던 낙랑군은 서북한 지역에 자리잡았을 것이다. 이러한 면은 『수경주(水經注)』에 반영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에 관한 고구려인의 증언과 그대로 부합된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북위 사람 역도원(酈道元)은 『수경(水經)』이라는 지리서에서 전하는 패수의 흐름에 관한 기사에 의문을 품고, 마침 그 무렵에 북위의 수도를 방문했던 고구려 외교사절에게 패수의 흐름에 대해 질문하였다. 이를 통해 얻은 지식에 의거해 그는 패수에 관한 기술을 『수경주』에 남겼다.

이에 의하면 고구려 수도는 패수의 북쪽에 있었으며, 그 곳에서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 자리를 지나 서쪽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당시의 패수는 대동강을 지칭하며, 그 무렵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 평양시 동쪽의 대성산성 아래에 있는 안학궁터 일대였다.

이곳에서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오늘의 평양시를 지나게 되는데, 강의 남쪽 남평양 지역에 한대(漢代)의 중국계 유적과 유물이 집중적으로 존재한다.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는 이 곳이 분명하다.

낙랑군 조선현은 서기전 108년 한이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중심부에 설치하였다. 낙랑군은 서기전 108년 이후 고구려에 의해 소멸되기까지 위치에 변동이 없었다. 조선현의 위치도 평양지역이었으므로, 자연 위만조선의 왕검성과 앞 시기의 고조선의 수도도 이곳 평양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고조선의 중심지는 시종 평양 일대였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문헌을 통한 고조선의 역사

여기에서 우선 문헌상으로 보이는 조선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조선에 대해 언급한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기록은 『전국책』 연책(燕策)과 『사기』 소진전이다.

즉 연나라 문후(서기전 361∼서기전 333)에게 소진이 당시 연의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연의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으며.”라고 했다. 이를 통해 서기전 4세기 중반에는 조선이 연의 변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요 세력으로 당시 북중국 지역의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위략(魏略)』의 조선에 대한 기사와 통한다. 또한 『위략』에서는 조선이 연과 각축을 벌이다가, 연의 소왕(昭王: 서기전 331∼279) 때에 진개(秦開)의 침공으로 서쪽 영토 ‘2,000리’를 상실했다고 하였다.

이에서 ‘2000리’는 논란을 안고 있는 문제이지만 『사기』 조선전에서도 고조선이 연에 영토를 상실당했다고 전하므로, 고조선은 이 무렵 서쪽 영토를 상실하고 연과 청천강을 경계로 마주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청천강 서쪽의 요동 지역은, 적어도 일부는 고조선의 영역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과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의 왕검성이었다는 점을 결부시키면, 서기전 4세기 이전의 고조선은 세력을 서쪽으로 뻗쳐 요동 지역을 세력하에 포괄하고 있었으며, 연과 각축을 벌였던 상당히 강한 세력이었다는 추론이 일단 가능해진다.

그런데 서북한 지역의 대표적인 청동기 유물은 에임부분(決入部)을 지닌 세형동검이다. 이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상한은 서기전 3세기로 여기거나, 근래 이를 서기전 4세기 후반까지 올려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발생과정 및 초기 발생지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할 문제이지만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분포상의 북한계가 서기전 3세기 초 이후 고조선과 연의 요동군과의 경계였던 청천강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서북한 지역에서의 세형동검 이전 단계의 주요 금속기 유물로는 비파형동검을 들 수 있는데, 출토된 수가 매우 적고 함께 출토된 유물 또한 빈약하다.

출토된 유물에서 보이는 이 두 가지 사실은 앞에서 가정해 본 추론과 부합되지 않는다. 서북한 지역에서 출토된 빈약한 비파형동검 문화단계의 금속기 유물로는, 서기전 4세기 이전 시기에 요동 지역에 세력을 뻗쳐 연과 각축을 벌였던 정치세력의 존재를 이 지역에서 상정하기 어렵다.

비단 유물의 양적인 면 뿐만 아니라, 만약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이라면 요동 지역은 그 변방이므로, 적어도 몇몇 유물의 양식상,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인 서북한 지역의 것이 구식이고 그 영향을 받아 상대적으로 신식인 유물이 요동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런데 비파형동검 등 금속기 유물양식은 반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분포상의 북한계가 청천강이라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 동검을 특징적인 유물로 하는 금속기 문명을 영위했던 서북한 지역의 정치세력은 서기전 3세기 초 이후에 성립된 것이 된다. 평양에 중심지를 둔 고조선이 그것이다.

따라서 서기전 4세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요동 지역을 포괄했던 고조선은 중심지가 평양이 아니었던 것이 된다. 이에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일단 세형동검의 원류인 비파형동검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남만주 요령성 지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요령성 일대의 비파형동검 문화의 상한은 서기전 10세기 전후 무렵으로 여겨지는데, 이 문화는 다시 요령성 내에서 지역별로 일정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비파형동검은 양식에 따라 공병식(銎柄式), 비수식(匕首式), 단경식(短莖式)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이 가운데 공병식과 비수식은 요동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았다.

토기 양식에서도 대체로 요하선을 경계로 미송리식 토기와 변형 미송리식 토기는 요하 이동지역에서 출토되고 있고, 삼족기(三足器)는 요서지역에서는 풍부하게 출토되나 요동지역에서는 소수만 확인된다.

무덤양식에서도 고인돌[支石墓]이 요동지역에서만 보고되고 있어 참고가 된다. 문헌상으로 볼 때도 앞에서 말했듯이 요동 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다. 한편 비파형동검 문화기 때에 요서 지역에서 활약했던 족속은 산융(山戎)과 동호(東胡)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요하 이동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추정을 좀더 진전시켜 보면, 서기전 3세기 초 고조선과 연과의 첫 충돌 당시 연군의 진출선이었던 만번한(滿潘汗), 즉 오늘날의 해성현(海成縣) 서남쪽과 개현(蓋縣)을 잇는 일대 지역으로 비정해볼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요하 하류 동편에 중심지를 두었던 서기전 4세기 이전 시기의 고조선 사회의 성격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해 고조선 사회를 노예제사회로 규정하는 견해가 일각에서 견지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주요 논거의 하나로 삼고 있는 요동반도 남단 여대시(旅大市) 구역에 있는 강상묘(崗上墓)와 누상묘(樓上墓)의 성격에 대한 기본적인 해석에서조차 이견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어, 수긍하기 어렵다.

단지 심양시의 정가와자 구역에서 서기전 6∼5세기 무렵의 무덤떼가 발굴되어, 그 중 제6512호와 같이 비파형동검과 동경 등을 위시한 청동기와 가죽제품 및 구슬 등 부장품이 풍부하게 출토된 큰 무덤이 있는가 하면 같은 구역 내의 무덤 중 부장품이 거의 없는 작은 것들도 있어서, 당시 사회상의 일면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즉 사회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고, 정치적으로 우세한 집단이 성장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조선 사회의 구체적인 면모와, 정치체로서의 고조선의 성격과 구조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의 진전을 기다려보아야 한다.

한편 서기전 4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고조선은 서쪽의 연과 대립하게 되었다. 연후(燕侯)가 ‘왕’이라고 칭하며 동으로 팽창할 기세를 보이자, 고조선의 군장(君長)도 왕이라고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양국간의 대립은 고조선측이 사절을 보내 외교적 절충을 벌여 일단 해소되었다. 그러나 이어 서기전 3세기 초 연의 국세가 강성해져, 남으로 제(齊)를 공략하고, 북으로 동호(東湖)를 정벌하고, 이어 고조선에 대한 침공을 해왔다. 양국간의 전쟁에서 고조선이 패배해 영토를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 이 때 고조선은 중심부를 요동에서 평양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에 중심지를 둔 뒤, 고조선은 성능이 개선된 세형동검과 청동창 등을 만들고 철제공구와 무기도 사용해 금속기문명을 진전시켰다. 그리고 이 시기 무덤과 출토 유물은 이전 시기 이래 한반도 서북부 지역의 팽이형토기 유적에서 보이던 매장 풍속의 전통이 강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중심지 이동 후 한반도 서북부 지역의 토착주민과 공고히 결합해 나갔음을 뜻한다.

이어 진(秦)이 서기전 221년 중국을 통일하고, 이어 만리장성을 쌓으며 요동에 세력을 뻗쳐 오자,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외교적으로 복속의 뜻을 표하면서 한편으로 자체의 방어에 주력하였다. 그에 따라 고조선은 진의 요동군과 청천강을 경계로 현상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 후 서기전 3세기 말 진이 망하자 내란상태에 빠진 중국을 한이 재통일하였다. 곧이어 한 조정과 지방 제후들 간에 분쟁이 벌어졌다. 그런 와중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북중국 방면에서 동으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주로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의 이른바 ‘진고공지(秦故空地)’에 정착했고, 이 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으로 귀속되었다. 1천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해 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고조선의 준왕(準王)은 위만에게 박사의 지위를 주면서 규(圭)를 내리고 ‘진고공지’ 지역에서 거주하면서 중국으로부터의 유이민을 통괄해 국경 방면을 진수하는 직임을 부여하였다.

그런데 위만은 차츰 유이민집단을 휘하에 결속시켜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다가 서기전 194년경 한이 조선으로 침공해 오니 수도를 방어해야겠다며, 군사를 끌고 올라와 정권을 탈취하였다. 일종의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 때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탈주해 그 곳에서 자리잡아 ‘한왕(韓王)’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새로운 위씨왕조는 유이민 집단과 토착 고조선인 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대외적으로는 한(漢)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유이민 집단과 함께 전래된 일부 중국문물을 수용해 군사력을 강화해 나갔다.

한편 한반도 남부 여러 소국 및 부족들과 한의 교역을 통제하면서 중계무역의 이득을 취하였다. 이렇게 해 강화된 힘을 바탕으로 인근의 임둔 · 진번 등의 집단을 복속시켰고, 압록강 이북에까지 세력을 뻗치는 등 신흥국가로서의 활기찬 모습을 나타냈다.

위씨왕조의 성격에 대해, 한인(漢人)의 정복왕조 또는 식민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왔다. 한편 위만을 사정이 있어 연나라에서 살게 되었던 고조선계 사람으로 봄으로써, 위의 견해를 부정하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 문제에서 더욱 본질적인 면은 위씨왕조의 정치적 구조에 있다. 위씨왕조는 유이민과 토착민의 연합정권적인 모습을 보였다. 토착민 출신의 유력자들도 위씨왕조를 이끌어나가는 지배세력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는 낙랑군에서 ‘호한초별(胡漢稍別)’, 즉 고조선인과 한인들을 차별하는 족속별 이중구조를 보인 것과 뚜렷이 차이가 난다.

그리고 위만이 패수(이 경우 압록강임)를 건너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고 왔다는 사실은, 조선인의 입장에서 미래를 추구하겠다는 의지와 자세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집권 후 국호를 계속 조선이라 했던 것도 그러한 면을 나타낸다. 곧 위씨왕조의 성격은 이전 왕조의 계승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서기전 3세기 이래의 평양 지역의 토광묘문화의 성격이 위만조선 시기에도 이어진 것은 이와 부합하는 바이다.

한편 위씨왕조가 한창 성장해 나갈 무렵 서쪽으로부터 한 세력이 동진해 왔다. 한은 위만조선과 흉노와의 연결을 차단하고, 동북아 지역을 석권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양국간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양국간의 외교적 절충이 실패하자, 서기전 109년 한은 5만의 육군과 7,000의 수군을 동원해 수륙 양면에 걸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해 왔다.

한의 침공에 맞서 고조선인은 1년여에 걸쳐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마침내 서기전 108년 왕검성이 함락되었다. 이후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이 때 많은 수의 고조선인들이 남으로 내려갔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정치

고조선 후기와 위만조선 때에 박사(博士) · 경(卿) · 대부(大夫) · 상(相) · 대신 · 장군 등의 관직명이 보이고 있어, 구체적인 성격은 확실하지 않지만 당시 중앙통치 조직의 형성이 어느 정도 진전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관직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 중에는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닌 이들이 있었다. 한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위만조선의 우거왕(右渠王)과 의견이 맞지 않자 휘하의 2,000여 호를 이끌고 남한지역으로 내려간 조선상 역계경(歷谿卿)과 같은 이들이 그러한 예이다.

한과의 전쟁중에 전선을 이탈해 왕검성이 함락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던 조선상 노인(路人), 니계상(尼谿相) 참(參), 상(相) 한도(韓陶[陰]) 등도 그러한 인물로 여겨진다. 상(相)은 일정한 세력집단의 대표로서 중앙정부에 참여했던 이들의 관명으로 여겨진다.

위에 열거한 인물들은 토착 고조선인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들 집단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일정 범위에서 작용했겠지만, 각 집단은 내부적으로 자치적이었을 것이다. 역계경 등의 집단적인 이탈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그러한 면을 말해준다.

중앙정부의 왕실도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집단들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의 장이었다. 이러한 집단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토대는 당시 각 집단이 지니고 있던 공동체적 관계였다.

이런 측면은 삼국 초기의 부체제(部體制)하의 정치구조와 연결된다. 고구려의 경우, 왕실인 계루부는 5부 중의 하나였으며, 각 부는 대외적인 외교와 무역 및 군사 면에서는 왕실의 통제를 받았으나 내부적 일에서는 자치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소로부가 ‘영성사직(靈星社稷)’과 ‘종묘(宗廟)’, 즉 농업신과 지역수호신 및 조상신에 대한 제사를 독자적으로 행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각 부는 제사 · 의례 공동체로서의 면모를 일정 정도 지니고 있었다. 그에 따라 제사와 의례의 주관자로서 각 부의 장은 제사장적 성격도 일면 지녔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가령 송양(松壤), 즉 소로부의 장인 ‘선인(仙人)’의 후예라고 칭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신인(神人)의 후예임을 내세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중 가장 우세한 집단의 장인 왕은 권력의 정통성을 근저로 자신이 천신 또는 태양의 자손임을 내세웠다.

나아가 왕실의 조상신인 천신에 대한 제사에 휘하 각 집단의 장들을 참례시키고 자신이 주제자가 되어 의례를 거행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휘하 제 집단에 대한 통제와 통합력을 강화하였다. 고구려의 동맹제가 대표적인 예이며, 동맹제의 제의(祭儀)의 내용은 주몽신화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이었다.

고조선에서도 유사한 면모를 상정할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의 요체는 하늘신의 아들과 웅녀의 결합에 의해 단군이 태어났고 조선이 세워져 왕위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고조선 왕실의 내력을 밝힌 일종의 ‘본풀이’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왕의 정통성과 존엄성의 근저를 천손이라는 신성한 핏줄에서 찾아 강조함으로써, 당시 사회에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였다. 단군신화는 왕의 즉위식이나 일 년 중 일정한 날에 거행하는 제의에서 그 시기 나름의 연희로 재연되었을 것이며, 그 제의에 고조선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자치체의 장들이 참여했을 것이다.

천손(天孫)임을 자부하는 왕이 집전하는 제의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왕의 권위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집단적인 제의를 통해 고조선인들간에 정서적인 일치감이 함양되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단군신화는 정치적 사회문화적 통합기능을 발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사회

한편 당시 고조선 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의 계급분화가 진전되고 있었다. 8조금법 가운데 현재까지 전해지는 3개 조에서, 노비제도의 존재와 사유재산에 대한 법적 보호조처 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은 계급분화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시기의 사회구성은 일단 노비, 촌락의 일반민, 귀족으로 크게 대별해 볼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일반 촌락 구성원이나 친족집단들 간에는 공동체적 유제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귀족은 노예와 토지, 재화 등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따로 지니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촌락 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으로서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 노비는 상당수 존재했으나, 많은 수의 노비를 사역하는 대규모 노비경영은 발달하지 않았다. 노예제 경영이 발달된 사회에서 보이는, 상품화폐 경제의 진전, 도시의 발달 등의 면모는 확인되지 않는다.

순장은 많이 행해졌을 것으로 여겨지나, 일반적인 순장의 예로 미루어보아 순장된 이들은 죽은 이의 가내노예, 신하, 처첩 등이었다. 그러므로 고조선 사회에서 순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곧바로 노예제 사회의 징표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당시 고조선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산활동을 담당했던 이들은 촌락 공동체의 일반민이었다. 이들 각 촌락 공동체 구성원의 존재양태는 지역간의 불균등에 따른 차이가 상당했고, 고조선 국가구조 내에서의 정치적 위치에 따른 차이도 있었다. 그에 따라 현실적인 촌락 공동체 구성원의 경제적 상태와 피수탈 정도에서도 차이가 나타났다. 그러한 면모는 삼국 초기 사회로 이어졌다.

고조선사에 대한 연구는 아직 원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 걸음 진전된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앞으로 남만주 요령성 지역의 고대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요구된다. 낙랑을 포함한 서북한 지역의 문화유적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 및 동북아 지역 각 집단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제 방면에서의 광범한 비교연구가 절실히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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