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일대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집단을 ‘동옥저(東沃沮)’라 하고, 두만강 유역의 집단을 ‘북옥저(北沃沮)’라 하였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3세기 전반 동옥저의 가구 수는 5천여 호(戶)였으며, 해안을 따라 동북방향으로 길게 뻗친 거주지역은 1천여 리에 달하였다고 했다. 주업은 농업으로 기름진 바닷가 평야에서 오곡을 생산했고 해산물도 풍부하였다. 언어는 고구려와 거의 같았으며, 음식과 의복 · 가옥 · 예절 등도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옥저는 강대국들 사이에 위치해 지속적으로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처음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기원전 2세기 말에 중국 한(漢)나라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군현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기원전 107년에 현도군(玄菟郡)의 일부가 되었다.
현도군은 요동(遼東)에서 개마고원을 넘어 동해안으로 이르는 동서를 잇는 공도상(孔道上)에 설치되었는데, 동쪽 끝이 바로 옥저였다.
이어 고구려의 저항에 의해 서기전 75년 현도군이 요동의 흥경 · 노성방면으로 쫓겨 감에 따라, 동옥저 지방은 현도군에서 분리되어 동예와 함께 낙랑군(樂浪郡) 동부도위(東部都尉)에 귀속되었다.
이어 30년 동부도위가 폐지됨에 따라 동옥저의 읍락들은 낙랑군 예하의 현(縣)이 되었다. 그 뒤 고구려의 세력이 개마고원을 넘어 진출해오자 그 지배하에 귀속되었다.
244년 관구검(毌丘儉)이 이끄는 위(魏)의 군대가 고구려 동천왕(東天王, 227∼248)을 쫓아 옥저까지 진격해 그곳의 읍락들을 유린하자 일시적인 격동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으로 위나라 군대가 격퇴되어 고구려의 옥저에 대한 지배는 지속되었다.
옥저의 여러 읍락들은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대군장(大君長)은 없고 각 읍락의 족장이 자치적으로 읍락 내의 일들을 운영해 나갔다.
고구려는 이 지역을 통할함에 있어, 각 읍락의 족장을 고구려 사자(使者)로 삼아 그를 통해 공납을 징수하는 등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인 대가(大加)로 하여금 공납징수문제 전체를 관장하게 하였다.
고구려로 보내진 공물에는 맥포(貊布) · 생선 · 소금 및 그 밖의 해산물이 주된 것이었다. 그리고 미녀도 보내져 고구려인의 첩이 되었는데, 그녀들은 노예처럼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의 국가구조에서 볼 때, 옥저의 각 읍락들은 지배조직의 말단에 위치해 일종의 집단예민(集團隷民)적인 성격을 지녔다.
과거 위만조선 · 한군현 · 고구려로 이어지는 외부세력에 의한 지배와 수탈이 옥저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억제하는 요인이 되었다.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의 읍락들의 사회상은 대체로 이웃한 동예의 그것과 비슷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족장층은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일반민과 함께 읍락 내에서 서로 섞여 사는 등 사회분화는 진전되지 못해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옥저의 읍락에는 소와 말이 적었기 때문에 옥저인들은 주로 보전(步戰)에 능하였다. 옥저의 풍속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민며느리제도이다. 즉, 소녀가 10여 세가 되면 양가에서 서로 혼인할 것을 약속한 뒤, 소녀는 남자집에 보내졌다.
소녀가 장성해 처녀가 되면 다시 본가로 돌려보낸다. 처녀집에서는 돈을 요구하고 그것이 지불된 뒤에야, 처녀는 신랑집으로 가게 되었다. 일종의 매매혼적인 성격을 띠는 혼속이다.
옥저의 장례풍속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풀이나 흙 등으로 덮어 임시로 가매장했다가 시체가 썩은 뒤, 뼈만 추려 목곽(木槨)에 넣었다. 목곽은 길이가 10여 장(丈)이 되며, 한쪽에 입구를 만들어 뼈를 넣을 수 있게 하였다.
일종의 복장(複葬) 또는 이차장(二次葬)의 풍속이다. 오늘날에도 남해안 일부지역에서 보이는 초분(草墳)의 풍속과 비슷한 일면을 지닌다.
또한 한집안 사람은 모두 동일한 목곽을 사용하였다. 죽은 사람의 모습을 새긴 나무인형을 만들어 목곽 옆에 두어 그 숫자로서, 목곽 내의 죽은 사람의 수를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릇에다 쌀을 넣어 목곽의 입구 쪽에 매달아놓았다. 이때 ‘한집안[家]’의 범위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야외에 두었을 때 쉽게 썩어버리는 목곽인 점을 고려할 때, ‘한집안’이란 부모자식으로 이루어진 소가족의 범위를 넘어, 친족집단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당시 고구려나 부여에서 널리 행해진 혼인풍속인 취수혼(娶嫂婚)이 옥저에서도 행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혼인과 장례풍속은 당시 옥저사회에서 친족집단 간에 공동체적 결속이 강했던 면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두만강 하류유역의 북옥저는 동옥저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습속은 동일하였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라 하였다. 북옥저는 읍루(挹婁)와 접경하고 있어 읍루족의 노략질에 시달렸다.
읍루족은 동부만주 삼림지대에 거주하면서 강을 따라 배를 타고 내려와 북옥저의 촌락을 기습적으로 공격해왔다. 그래서 강물이 많고 배의 운항이 가능한 여름철에는 읍루족의 침략을 피해 북옥저인들은 깊은 산중의 동굴로 가서 거주하고, 겨울철 강물이 얼어붙으면 촌락에 내려와 거주하곤 하였다.
북옥저는 고구려와 깊은 관계가 있었고, 244년 동천왕은 위나라 군대에 쫓겨 북옥저로 달아나기도 하였다. 그 뒤 북옥저는 부여국 왕실이 옮겨오는 큰 변화를 맞았다.
즉, 285년 부여국은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침공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자살하는 등 큰 타격을 입자, 왕실을 비롯한 중심세력이 옥저로 피난하였다. 이때의 옥저가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로 여겨진다. 곧이어 부여왕실은 진(晉)나라의 지원을 받아 고국을 회복해 돌아갔다. 이후 북옥저 지방의 사정을 전하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북옥저를 동부여(東扶餘)와 연결해 고찰한 견해가 있다. 즉, 부여왕실이 본국으로 귀환할 때 부여국의 일부세력이 그대로 남아 세력을 형성하게 된 것이 역사상에 보이는 동부여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 뒤 광개토왕대에 동부여를 복속시키고 이 지역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삼았다. 고구려는 이곳에 책성(柵城)을 설치하였다. 북옥저의 또 다른 이름인 치구루의 ‘구루’는 고구려어로 성(城)을 의미한다. 곧 책성은 그 어원으로 볼 때 치구루와 통하는 말이다.
책성은 고구려 동부지방의 중심이 되는 주요한 성이었다. 북옥저는 동옥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성을 단위로 하는 지방제도 아래에 편제되었고, 옥저인은 고구려의 지방민으로 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