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이라는 용어는 내성과 외성을 갖추고 있는 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내성을 성이라 하였으며, 외성을 곽이라 하였다. 『통감』에 의하면 외성 중 규모가 큰 것을 나성이라 하고 작은 것을 자성이라 하였다. 나성은 다른 말로 나곽이라고도 한다.
도성의 특징이 왕궁과 관청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왕성 둘레에 귀족이나 백성들의 주거지가 포함되도록 크게 쌓은 성이 있는 것을 기본으로 하므로, 나성은 도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방어 시설이다. 외성을 대신하여 나성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평지에 정연하게 구축되는 중국과 달리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의 여건상 자연 지형을 따라 외성이 굴곡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글자의 의미처럼 나성이라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성곽은 대부분 한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성을 갖추고 있는 성곽은 각 시기별 도성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평지에 위치하는 왕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외성을 쌓기보다는 왕성에서 가까운 곳에 산성을 쌓아 적의 침입 시 산성에서 방어하는 것이 삼국시대의 일반적인 왕성 방어 시스템이었다. 고구려의 국내성과 환도산성, 백제의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 신라의 월성과 남산성 등은 평지성과 산성의 세트 관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나성이 출현하는 것은 도성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백제의 사비 나성은 왕성인 부소산성을 아우르며 백성들의 주거 지역을 포함하도록 쌓은 대표적인 나성이다. 사비 나성은 백마강에 접한 서쪽 부분에서는 성벽이 확인되지 않지만, 북나성과 동나성의 전체 길이는 6.3km에 달하고 있다. 사비 나성의 축조 기법은 고구려 성곽처럼 안쪽은 판축하여 토성으로 구축하고, 외벽만 돌로 쌓은 '토심 석축 공법'으로 축조되었다. 나성의 축조 시점은 백제의 사비 천도가 이루어지는 538년 전후라는 견해와 7세기 초라는 견해가 있다. 능사의 창건 시점과 연계하여 늦어도 557년 무렵에는 나성이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586년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지금의 평양성인 장안성의 축조 기간은 성벽에서 확인되는 각자 성석을 통하여 수십 년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안성은 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벽의 총 둘레는 25km에 달하고 있다. 그중 가장 넓은 외성 지역에는 방리를 나누어 계획 도로를 설치하고 주거 지역으로 구획하여 백성들이 거주하도록 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 장안성은 가공된 성돌로 정연하게 구축된 석축성으로 보이지만, 성벽 내부는 흙으로 판축하여 쌓은 '토심 석축 공법'이 적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신라에는 나성이 축조되지 않았다. 왕성인 월성을 중심으로 경주 평야 일원을 정교하게 방리로 구획하였으나 나성은 쌓지 않고, 인접한 산상에 구축한 산성들이 방어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말에는 화성 당성이나 김포 수안산성, 고양 행주산성처럼 삼국시대의 석축 산성 바깥에 토성을 덧붙여 쌓아 내성과 외성을 갖추게 되는 성들이 집중적으로 등장하지만 나성이라는 용어는 도성을 중심으로 하는 용어이므로 이러한 복곽성을 나성이라 하지는 않는다.
고구려와 백제의 왕성과 나성은 고려시대로 이어진다. 고려의 개경은 처음에는 왕성만 있었으나 거란족이 침입하는 11세기 초에 나성을 쌓았다. 나성을 쌓는 데는 30만 4,400명과 공장(工匠) 8,450명이 동원되어 20여 년간의 공사 끝에 1029년(현종 20)에 준공되었다. 나성은 왕성 바깥의 민가와 논밭을 포함하도록 하였으며, 전체 둘레는 23km에 달했다. 나성에는 방어 시설인 나각이 1만 3천 칸 설치되었고, 대문 4개, 중문 8개, 소문이 13개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나성 제도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졌으나 한양 도성은 내부에 왕성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한 벽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도성이라고는 하지만 나성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조선시대 숙종 대 이후에는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처럼 산성 내부를 구획하여 중성을 쌓거나 한봉성, 봉암성 등의 외성을 덧붙여 쌓는 경우가 있지만, 역시 이것들을 나성이라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나성은 엄밀한 의미에서 각국의 중심지에서 왕성을 둘러싸고 있으며 일반 주거지를 포함하고 있는 외성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