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후기의 수도로서, 586년(평원왕 28)에 이곳으로 천도한 뒤 고구려가 멸망하기까지 수도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오늘날의 평양 일대로 장수왕대에 천도한 평양 전기의 도성은 평지성인 청암리토성과 산성인 대성산성, 그리고 평지궁성인 안학궁의 조합으로 운영되었고, 이와는 달리 평양 후기에 해당하는 장안성은 평지성과 산성의 조합에 주민의 주거지를 둘러싼 나성(羅城)을 축조했다는 점이 다르다. 내성은 왕궁으로, 중성은 행정성으로, 외성은 주민의 거주성으로 공간 구조를 구분한 것도 고구려의 전기 도성들의 운영과 다른 점이다.
성곽의 지리적 형세는 남쪽으로 대동강이 S형으로 흐르고 서쪽으로는 보통강이 흐르고 있어, 자연적인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
성벽과 왕궁의 축조시기와 구조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다만, 왕궁을 방어하는 내성이 먼저 축조되고, 후에 시가지를 에워싸는 외성을 쌓았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시가지는 중국의 조방구획(條坊區劃)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기전(箕田)이라는 바둑판 모양의 가구(街區)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평양 도시공간의 도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국내성기의 도성제에서 평양 전기의 도성제로 이행하면서, 중국 도성제의 영향으로 이방제(里坊制)가 도입되어 5부제라는 고구려화된 방리제가 나타난다. 평양 후기의 장안성은 이러한 기존의 도성제도를 포괄하는 보다 확대된 도시구조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