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부여읍(扶餘邑) 정동리 범바위[虎岩]에서부터 현북리 파진산(186m) 모퉁이까지 약 16㎞ 구간의 금강 변을 백마강이라 한다. 특히 범바위는 주1가 큰 서해 바다의 밀물이 최대로 영향을 끼치는 감조 주2에 해당했으며, 2011년에 백제보가 설치되었다.
금강은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장수읍 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흐르다가 공주에 이르러 웅진(熊津) 또는 금강(곰강)이 되고 유구천(維鳩川)을 합하여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부여군에 이르러 고성진(古省津) 또는 백마강이 된다. 금강은 백마강을 지나 논산천(論山川)을 합하고 주3을 거쳐 충청남도와 전북특별자치도의 경계를 이루며 바다로 흘러간다.
우리나라 하천은 대부분 주4. 그러나 금강의 백마강 구간은 대체로 곧게 흐르는 것이 특징이다. 백마강의 범위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공주를 지나 청양군 청남면, 부여군 부여읍과 규암면에 속한 구간을 말한다. 이 범위에서 백마강은 서남류하는데 북동으로부터 금강이 흘러들어 부여읍 서쪽에서 각각 지천(枝川), 은산천(恩山川), 구룡천(九龍川), 금천(金川)을 차례대로 받아들인다. 백마강으로 이들 하천이 흘러드는 합류부는 모두 주5으로 이루어졌고 그 가운데서도 금천 유역은 금강의 자연 주6 또는 배후 주7에 해당하는 충적평야이다. 이에 반하여 백마강 동쪽에 해당하는 부여읍과 석성면 구간은 주장산(123m) · 부소산(96m) · 금성산(124m) · 필서봉(118m) · 용머리산(171m) 등 해발 1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 사이에 소하천이 흐를 뿐이다.
백마강의 지질은 주8의 주9인 주10을 기반암으로 한다. 이를 토대로 해서 주11 주12의 퇴적층인 남포층, 이들을 모두 주13 화강암류, 주14의 퇴적층인 공주층군, 주15 제4기 충적층으로 이루어졌다.
백마강 일대는 차령산맥의 주16이 침식으로 해체되는 과정에 놓여 있어 대체로 주17 산지를 이루고 있다. 백마강은 북동 방향에서 흘러들어와 부소산(扶蘇山)을 크게 감돌아 남동 방향으로 흘러 나가는 형국이다. 이때 부소산을 침식하여 이른바 '낙화암'이라 불리는 공격 사면(攻擊斜面)의 주18를 발달시키고 그 반대편에 퇴적 사면(堆積斜面)을 만들어놓았다.
백마강 주19에 인구 약 1만 9천 7백여 명이 사는 부여읍이 위치한다. 부여읍은 백마강 주20인 주21의 공격 사면에 대한 퇴적사면이어서 범람원이 발달하였고 주22나 배후 습지(背後濕地)도 남아 있다. 금강에 의하여 형성된 범람원은 하상비고가 10m 이하로서 자연 제방과 배후 습지로 뚜렷이 구분된다. 자연 제방은 고도가 높고 배수가 양호하므로 일찍부터 취락이 들어서는 한편 농경지로도 이용되었다. 자연 제방의 토양은 주23 · 주24 · 점토가 비슷한 비율로 섞인 주25이다. 반면에 집중 호우 때 상습적으로 침수되는 배후 습지는 농경지로 개발되기 이전에는 배수가 불량하여 수초(水草)가 서식하는 ‘자연 습지’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습지는 경지 정리 이후 대부분 사라졌다. 배후 습지의 토양은 대개 점토로 이루어진 식토이고, 그 밑에 주26이 매장되어 있기도 하다.
범람원의 충적층을 시추하여 상부층, 중부층, 하부층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상부층은 주로 사층, 사질 실트층, 사질 점토층 등의 무기질층으로서 금강 및 그 지류인 왕포천의 하천 종단면이 평형 상태에 도달한 이후에 퇴적된 현생 퇴적층이다. 중부층은 주로 실트 또는 점토 계통의 무기질층으로서 주27 해면 상승과 더불어 퇴적된 주28 퇴적물층이다. 이 층에는 배후 습지 기원의 유기물층(또는 토탄층)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하부층은 주29 내지 주30으로서 금강의 지곡에서 최종빙기 주31의 수량이 부족한 환경하에 자갈의 이동에 의해 곡저에 공급된 기저역층(基底礫層)의 성격이 강한 고 선상지성 퇴적물층이다.
백마강의 기온 분포는 평균 11.8℃이며, 최저 2.5℃(1월), 최고 25.3℃(8월) 정도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311㎜이며 강수량의 60% 가량이 여름철인 6∼9월 사이에 집중되며 그 중 7월 강수량이 약 30%를 차지한다.
백마강 양안은 토사가 퇴적된 평야가 비교적 넓게 분포하여 주요한 곡창으로서 백제 중흥의 웅지를 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백마강 일대는 538년(성왕 16)에 국도를 웅진에서 사비성(泗沘城)으로 옮겨 660년(의자왕 20) 멸망할 때까지 백제의 심장부였다.
백마강 남안의 부소산에는 부소산성(扶蘇山城) · 군창지(軍倉址) · 고란사(皐蘭寺)등의 사적이 있으며 동쪽 끝 약 100m 높이의 단애가 백제가 멸망할 때 삼천궁녀가 강물로 몸을 던졌다는 전설의 낙화암(落花巖)이다. 이 지점이 바로 백마강의 공격 사면 가운데 하나이다. 663년(문무왕 3)에 부흥을 꾀하는 백제군과 일본 수군(水軍)이 나당연합군과 격전을 치른 백촌강(白村江)의 싸움터도 여기이다.
규암나루는 백마강의 주요 나루터였으나 백제대교의 건설로 그 기능이 상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