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6대 하천의 하나이다. 유역 면적이 9,885㎢, 유로 연장이 401㎞로 남한에서는 낙동강 · 한강 다음으로 큰 강이다.
본류는 장수읍의 수분리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섬진강과 갈라져 진안고원과 덕유산 지역에서 흘러오는 구리향천(九里香川, 34㎞) · 정자천(程子川, 30㎞) 등 여러 지류들이 북쪽으로 흐른다.
전북특별자치도의 북동부 경계 지역에 이르러 남대천(南大川, 44㎞) · 봉황천(鳳凰川, 30㎞)과 합류하고 옥천 · 영동 사이의 충청북도 남서부에서 송천(松川, 70㎞) 및 보청천(報靑川, 65㎞)과 합류한 뒤 북서쪽으로 물길을 바꾼다.
다시 갑천(甲川, 57㎞) 등 여러 지류가 합쳐 충청남도의 부강에 이르러 남서 방향으로 물길을 바꾸면서 미호천(美湖川)과 합류하고, 공주 · 부여 등 백제의 고도(古都)를 지나 강경에 이르러서는 충청남도와 전북특별자치도의 도계(道界)를 이루며 황해로 흘러들어 간다.
《당서 唐書》에서는 금강을 웅진강(熊津江)이라고 기록하였다. 금(錦)은 원어 ‘곰’의 사음(寫音)이다. 곰이라는 말은 아직도 공주의 곰나루[熊津]라는 명칭에 남아 있다. 일명 호강(湖江)이라고도 부른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강의 명칭은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다. 즉, 상류에서부터 적등진강(赤登津江) · 차탄강(車灘江) · 화인진강(化仁津江) · 말흘탄강(末訖灘江) · 형각진강(荊角津江) 등으로 되어 있으며, 공주에 이르러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하류에서는 고성진강(古城津江)으로 되어 있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하천이 그러하듯이 금강도 유황(流況)이 대단히 불안정하여 단기간의 홍수 유출량이 총 유출량의 약 70%를 차지했다.
금강 하류 지역에는 부여의 규암평야, 논산천 유역의 강경∼논산평야와 같은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있는데, 이들 평야는 큰 홍수가 발생할 때 수해를 심하게 입었다.
그런데 1980년에 대전의 신탄진 부근에 대규모 다목적댐인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금강물의 이용량은 늘어나게 되었다. 대청댐은 당초에 홍수 방지와 관개용수의 확보를 위해 건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뒤 대전 · 청주 · 천안 등의 도시가 크게 성장하고 각종 용수의 수효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이 댐은 이들 도시의 상수원으로서의 중요성이 막중해졌다.
대전과 천안은 대청호(大淸湖) 없이는 지금과 같은 크기의 도시를 유지할 수 없다. 나아가 1990년에는 금강하구둑이 건설되어 금강은 수자원으로서의 중요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그리고 현재 또 하나의 대규모 다목적댐인 용담댐이 금강 상류의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진안에 건설되고 있다.
이 댐은 유역변경에 의하여 금강 물을 만경강 유역으로 보내기 위한 것으로써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군산과 부안 앞 바다의 새만금 간척사업 역시 이 물 없이는 성립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청호는 지금도 수질오염이 심각하기 때문에 상당한 양의 물을 잃어버렸을 때의 상황에 대한 우려도 있다.
금강 유역은 대체로 백제의 심장부에 해당하며, 충청남도의 공주 · 부여와 전북특별자치도의 익산을 중심으로 백제 문화의 복원 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어 왔다.
대전과 청주 중심의 지역에는 정부의 각종 기관, 연구소, 공업단지 등이 들어서고, 대학교가 많아 우리 나라에서 가장 급격히 변모하고 발달하는 지역이 되고 있다.
(1) 지질 · 지형
금강의 상류는 전북특별자치도의 장수군 · 진안군 · 무주군과 충청북도의 영동군 일부 지역의 물이 모아져 시작된다. 지질은 옥천누층군(沃川累層群)의 변성퇴적암 내지 선캄브리아기의 화강편마암과 이들을 관입한 중생대 화강암 등 복잡한 구조를 이루기 때문에 지형도 매우 복잡하다.
소백산맥에서 노령산맥이 갈라지는 이곳은 높이 1,000m 이상의 험준한 산들이 많아서 이른바 진안고원을 형성하고, 그 동단부에는 덕유산(1,594m) · 백운산(1,279m) 등 험준한 산들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를 깎아 흐르는 수많은 하천들은 심한 감입곡류(嵌入曲流)를 하며, 무주구천동이나 영동의 양산팔경(陽山八景)같이 아름다운 계곡을 이루어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이 많다.
중 · 하류는 충청남북도의 지역으로 남동쪽에 소백산맥, 북서쪽에 차령산맥이 있다. 지질은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화강암(大寶花岡岩)이 북동에서 남동 방향으로 분포한다.
금강 본류의 금산분지, 대전천 · 갑천 유역의 대전분지, 보청천 유역의 보은분지, 미호천 유역의 미호평야 등은 대보화강암의 분포 지역에 발달되어 있다. 금강 하류 지역에는 편마상화강암이 주로 분포하며, 경상누층군의 퇴적암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하구 부근은 조차(潮差)가 약 6m인데, 하구둑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하구에서 약 60㎞ 떨어진 부여의 규암까지 조석의 영향이 미쳤다. 그리고 강경까지는 밀물 때 강물이 빠른 속도로 역류했다. 근대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에 금강은 수운이 대단히 활발했다.
바다에 올라오는 배는 밀물, 내려가는 물은 썰물을 이용했다. 강경은 하항(河港)으로 크게 번성했으며, 강경장은 우리 나라 3대 시장 중 하나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강경까지는 큰 배가 올라오고 부여까지는 1백 석의 곡식을 실은 배가 다닐 수 있었으며, 작은 배는 충청북도 청원군의 부강까지 오르내렸다. 금강의 수운은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급격히 쇠퇴하였다.
(2) 기후
한반도의 중서부에 위치하는 금강 유역은 연평균기온이 11.0∼12.5℃, 최한월인 1월 평균기온이 ·2.5∼ ·0.5℃, 최난월인 8월 평균기온이 25.0∼25.5℃로 쾨펜기후구분(Koppen氣候區分)으로 볼 때 온대의 북한계에 가깝다. 한반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도 한서의 차가 매우 커서 대륙성 기후를 이루나, 그 정도는 중 · 상류 쪽으로 갈수록 더 심하다.
또한 동위도의 반도 동쪽보다는 겨울 기온이 2℃ 정도 낮다. 연강수량은 1,100∼1,300㎜로 한반도 안에서 대략 중간에 해당한다. 대체로 하류 지역은 1,100㎜ 내외로 비가 적은 지역이고, 상류 쪽은 1,300㎜ 내외로 남해안 다우지역에 해당된다. 그러나 강수량은 탁월풍향과 지형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에 국지적인 변화가 크다.
금강의 중 · 하류는 하곡 방향이 남서 방향이기 때문에 여름철의 탁월풍인 남서기류의 주요 유입 지역이 된다. 이렇게 유입된 다습한 기류는 대전 중심의 중 · 상류 지역에서 지형적인 강제 상승을 일으켜 1,300㎜ 내외의 국지적인 다우지를 형성한다. 따라서, 이들 지역은 여름철 강수의 비율이 매우 높아 60% 이상에 이르며, 중 · 하류 평야 지역에 범람과 침수를 일으키는 주요 요인이 된다.
일조시수(日照時數)는 부여 지방이 3천 시간으로 가장 많고, 안개 일수가 많은 하구 연안과 여름 강수가 많은 대전 중심의 내륙 지방에서는 2,500시간 이하이다.
증발량은 금산이 1,046㎜로 최소값을 나타내고, 당진이 1,232㎜로 최대값을 나타낸다. 평균 상대습도는 다른 지역보다 높아서 평균 75% 이상을 나타내는데, 대전 · 논산 및 유성 등의 내륙 지역은 계절적 변화 폭이 비교적 크게 나타난다.
(3) 생태
금강 유역의 삼림대는 활엽수림군계에 속하고 있으나, 주로 소나무와 참나무가 주요 수종을 이루고 있다. 금강의 상류인 덕유산의 식물 군락은 고도에 따라 신갈나무 · 떡갈나무 · 단풍나무 · 신갈나무 순이고, 식물상은 한국온대아구계(韓國溫帶亞區系)로서 개서나무 · 서나무 · 굴참나무 · 졸참나무 · 참느릅나무 · 합다리나무 · 때죽나무의 표지식물이 혼합림을 이루고 있다.
중 · 하류 평야 지역의 식생은 소나무 · 곰솔 · 리기다소나무 · 일본잎갈나무 · 오리나무 · 아카시아나무 · 은사시나무 등의 조림지와 초지로 구분되며, 상록활엽수로는 후박나무 · 회양목 · 호랑가시나무 · 사철나무 · 동백나무 · 스레피나무 · 순비기나무 등이 있다. 논밭의 식생은 한련초 · 방동사니 · 소리쟁이 · 고마리 · 이삭여뀌 · 개여뀌 · 젓가락풀 · 미나리아재비 · 미꾸리낚시 · 황새냉이 · 논냉이 · 여뀌 등이 나타난다.
수생식물로는 생이가래 · 네가래 · 순채 · 개연꽃 · 연꽃 · 수련 · 말즘 · 가래 · 애기가래 · 말나자스말 · 물질경이 · 올챙이자리 · 올챙이솔 · 검정말 · 물옥잠 · 물달개비 등이 출현한다.
강의 최상류 지역인 무주구천동의 동물상을 보면, 곤충의 경우 114과 446종이 보고되었는데 그 가운데 파리목(目)의 꽃등애과가 가장 많고, 파리목 외에는 청색하늘소붙이 · 버들잎벌레와 노랑다리강도래가 우점종(優占種)을 차지하며, 거미류도 95종이 서식하고 있다.
이곳에 서식하는 어류는 10과 21속 41종이 보고되었는데, 버들치와 피라미가 우점종을 차지하고 그 가운데 감돌고기 · 어름치 · 금강모치 · 구구리 · 돌상어 등은 우리 나라 특산어종이다.
또한 금강은 이들 분포의 최남단을 이루므로 동물 지리학적으로도 매우 주목된다. 무주구천동에서 조사된 바에 의하면 조류는 모두 48종으로 흰배지빠귀 · 물까마귀 · 노랑할미새 · 곤줄박이 · 박새 · 큰유리새 · 노랑턱멧새 등이 이곳 환경을 대표하는 우점종이다. 중류 유역인 칠갑산과 계룡산 일대의 곤충상은 11목 124과 505종으로 제주태극나방 · 극남노랑나비 · 제주왕나비 등의 남방계가 다수 출현한다.
한편, 금강 하류에서는 대형무척추동물로 다모류(多毛類)가 9종, 빈모류(貧毛類)가 2종, 부족류(斧足類)가 도끼조개 · 콩조개 · 펄조개 · 말조개 · 칼조개 · 곳체두드럭조개 · 두드럭조개 · 재첩 · 민물담치류 등 10종, 갑각류(甲殼類)로는 펄콩게 · 갈게 · 참방게 등 13종이 보고되었다. 금강 하류에 서식하는 어류는 모두 57종으로 붕어 · 동자개 · 풀망둑 및 학공치가 우점종으로 나타난다.
금강 하구에 도래하는 조류는 총 26종인데 그 가운데에는 백로과 3종, 오리과 10종, 검은물떼새과 1종, 물떼새과 2종, 도요과 8종, 갈매기과 2종이 있다. 이들 중 청둥오리 · 쇠기러기 · 흰뺨검둥오리 등이 우점종이며, 이곳은 이들 겨울 철새들의 주요 월동지가 되므로 이 지역의 보호 관리가 더욱 요망된다.
금강 유역에 형성된 문화는 시대별로 구석기 문화 · 청동기 문화 · 백제 문화 · 고려 문화 · 조선 문화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의 성격이나 내용으로 본다면 청동기 문화에서부터 백제 문화까지는 중국과의 관련이 두드러진, 이른바 황해 문화(黃海文化)에 속하고, 고려 문화는 불교 문화, 조선 문화는 유교 문화라고 규정할 수 있다.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1964년부터 조사 발굴된 공주시 장기면 석장리의 구석기 유적을 들 수 있다. 이 유적은 금강의 하안단구(河岸段丘)에 발달한 문화로서, 아래층으로부터 원인(原人)들이 처음으로 연장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처음에는 돌이나 나무 · 뿔 · 뼈 등으로 도구를 만들었으며, 외날찍개 · 찌르개 · 긁개 · 자르개 · 깎기 · 주먹대패 등의 기능을 가진 여러 종류의 도구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만들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돌망치도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북중국의 주구점문화(周口店文化)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그 다음 중간층의 유물로는 격지석기나 몸돌석기 · 돌망치 · 떼개 · 주먹도끼 · 쌍날찍개 · 찌르개 등이 발굴되었다. 맨 위층의 유물로는 새기개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이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주거지에서는 기둥자리와 화덕자리, 그리고 담을 갖추었던 흔적이 있으며 주춧돌도 발굴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재와 목탄 등을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하여 본 결과 20,830±1,880B.P.라는 절대연대가 나왔으나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약 2만 5천년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후기 구석기시대 문화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석장리유적은 남한에서 발견된 최초의 구석기 유적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신석기시대에 속하는 문화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도 현재로서는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 금강 유역의 구릉지대에는 무문토기인(無文土器人)들이 널리 분포되기 시작한다. 1976년에 발굴된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유적은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유적은 구릉상의 양지 바른 사면에 위치하여 그 앞으로는 논산천(論山川)과 석성천(石城川)이 흐르고 논산의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 지리적으로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유적의 주거지는 원형과 방형으로 나누어지는데, 원형은 풍화암반을 약 1m 가량 뚫고 내려간 일종의 반움집터이며, 중심 부분에 2개의 대형 중심 기둥이 있고 둘레에 작은 기둥이 배치되었다.
가장 특이한 것은 노지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각 주거지 내에는 소형의 저장혈(貯藏穴)이 비스듬히 나 있어서 많은 수량의 토기와 더불어 본격적인 농경생활을 하였음을 보여주었다.
또, 주거지의 외곽에서 발견된 노천요(露天窯)로 보이는 요지(窯址)는 우리 나라의 무문토기요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이곳 출토의 토기와 연결하여 볼 때, 분업적인 토기 생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유적에서 농경이나 수렵의 도구는 다수 발견되었으나 어로에 관계되는 유물은 단 한점도 출토되지 않아 농경과 수렵에 큰 기반을 둔 경제생활을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민무늬토기는 송국리형(松菊里形)을 표지적인 형태로 하고 있으며, 홍도(紅陶) 역시 송국리형에 말각평저장경호(抹角平底長頸壺)와 발형(鉢形)이 가미되어 있다.
이것은 이 지역의 독특한 형식으로 인정되어 송국리형토기라고 명명되었다. 주거지에서는 청동제 유물이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으나 청동 유물의 존재를 알려주는 동부(銅斧)의 용범(鎔笵)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탄화된 쌀이 3.9㎏ 가량 발견되어 우리 나라 벼농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이 주거지는 서기 전 7세기에서 서기 전 5세기 초에 걸치는 유적이다.
1974년에 역시 송국리에서 석관묘(石棺墓)가 발굴되었다. 그 구조를 보면 석관의 방향이 정남에서 약 30° 가량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크기는 남북으로 1.95m, 너비는 북측이 0.84m, 남측이 0.78m로서 피장자(被葬者)의 머리를 둔 북쪽이 약간 넓다.
바닥은 커다란 3장의 판석(板石)을 깔아서 상자 모양을 이루게 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크고 작은 돌을 채워서 나머지 바닥을 이루고 있다.
개석은 한 장의 큰 돌로 하였다. 여기에서 출토된 요령식동검(遼寧式銅劍)은 가장 오래된 형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우리 나라의 청동기 문화의 상한을 설정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1964년에 부여군 초촌면 연화리에서 발견된 석곽묘유적은 그 구조가 두께 10∼30㎝의 석괴(石塊)로 사방에 벽을 쌓고 바닥은 얇은 돌판 조각을 깔았으며 개석은 5,6장의 돌판을 덮고 있었다.
석관의 방향은 북북서에서 남남동으로 바닥의 너비는 50∼55㎝, 길이는 104㎝, 북쪽 석곽의 벽 높이는 55㎝ 정도이다. 이 석곽묘에서는 동검 4점, 세뉴문경(細鈕文鏡) 조각 1점, 천하석제장식품(天河石製裝飾品) 1점이 각각 출토되었다.
일찍이 1915년에 조사된 부여읍 가증리에서는 모두 5기의 석관묘가 일렬로 분포되어 있는데, 모두 작은 돌판을 세워 조립한 것으로서 길이가 60∼150㎝, 너비와 깊이는 40∼60㎝ 정도의 비교적 작은 규모이다.
여기에서는 토기와 마제석검(磨製石劍)이 발견되었는데, 그 형식이 영 · 호남 지방의 변형지석묘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유병식(有柄式)의 말기형식이다.
논산시 양촌면 신기리에서 발견된 고인돌의 구조는, 석관이 장축을 남북으로 취하고 있었으며 생토(生土)를 길이 2.3m, 너비 1.8m, 깊이 1.15m 가량 토광(土壙)을 파고 그 중심에 석관을 만들었다. 석관의 크기는 길이가 1.6m, 너비가 남쪽 46∼56㎝, 북쪽 40∼50㎝로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양식이다.
여기에서는 마제석검과 돌화살촉이 출토되었는데 부여 지방의 것들과 같은 형식에 속하는 것이다. 또, 이 지석묘군에서 중요한 점은 남방식과 북방식이 혼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1967년에 발견된 대전광역시 괴정동유적은 지표면에 남북 3.3m, 동서 2.8m의 불규칙한 타원형으로 괴석(塊石)이 깔려 있었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좁아지다가 1.6m의 깊이에 장방형의 석곽이 있었다.
석곽의 윗부분은 전체가 괴석으로 채워져 있었다. 석곽의 길이는 2.5m, 너비는 0.5m였고 바닥에는 약 20㎝ 두께의 탄화된 나무가 깔려 있었다.
덮개 돌로 사용될 만한 돌판이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이 석곽묘는 바닥과 뚜껑을 나무로 만든 것 같다. 이 유적은 화강암 구릉의 풍화암반에 깊게 만든 석곽묘인데, 고식(古式)의 세형동검을 비롯하여 다뉴조문경(多鈕粗文鏡) · 동탁(銅鐸), 그리고 의기(儀器)로 생각되는 다수의 청동기와 토기 등이 출토되어 학계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부여읍 중정리의 당산 정상에서 발견된 석관묘는 1호에서 5호까지 대략 2기씩 3열을 이루었고, 6호도 그 연장선상에 위치하여 대체로 지형에 따라 열을 지어 조영하였다.
이 유적에는 마제석검 4점, 돌화살촉 3점, 그리고 약간의 민무늬토기조각이 출토되었다. 석관의 구조로 보아 가증리 · 송국리와 함께 모두 굴신장법(屈身葬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조면에서는 가증리나 송국리에 비하여 원시성을 띠고 있으며, 출토 유물의 형식으로도 선행 양식에 해당된다. 따라서 연대로 보면 중정리 · 가증리 · 송국리의 순서가 되며, 이들 석관묘 사회의 연대는 서기 전 7∼5세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남하하는 고구려의 세력에 밀려 웅진(熊津 : 지금의 공주)과 부여로 각각 천도한 백제는 금강 유역에 백제 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하였다. 웅진 시대의 백제 유적으로는 송산리고분군을 들 수 있다.
이 고분군은 백제가 공주를 수도로 하였던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의 약 60년간에 걸쳐 조영된 왕 및 근신(近臣)들의 무덤으로서 특히 벽화분과 무령왕릉이 있어 그 역사적 및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크다.
석실분(石室墳)은 방형궁륭천장(方形穹窿天障)의 석실 남벽에 동편하여 연도(羨道)가 열린 고구려식이며, 5호분 현실(玄室)의 크기는 3.26×3.45m, 높이 3.15m이다. 7호분에는 무문전축(無文塼築)의 관대(棺臺)가 2개 있다.
전축분인 6호분 역시 남북 3.6m, 동서 2.1m, 높이 3m의 터널형 현실 앞에 터널형 연도가 달린 것이며, 동쪽 벽에 붙어 관대가 하나 있고 벽에는 진흙을 그림 그릴 면적만큼 바르고, 그 위에 호분(胡粉)으로 사신도를 그렸다.
1971년에 발견된 무령왕릉은 백제사의 연구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고분은 도굴된 흔적 없이 매장 당시의 상태 그대로 발견되었으며, 백제 고분으로서는 유일하게 그 속에 부장된 매지권(買地券)에 의하여 피장자가 밝혀졌다.
이 왕릉은 6호분 바로 북쪽 경사면에 위치해 있는데, 현실은 남북 4.2m, 동서 2.72m, 높이 2.9m이며, 연도는 길이 2.9m, 너비 1.04m, 높이 1.45m이다.
현실과 함께 천장은 터널형으로 만들었다. 축조 방법은 전(塼 : 벽돌) 4장을 포개어 옆으로 쌓고 다시 그 위에 전을 세워서 쌓았으며 그 위에 다시 옆으로 쌓는 방법을 반복하였다. 여기에서 출토된 부장품들은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공산성(公山城)은 수도인 공주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석축산성의 길이는 약 1,900m, 토축산성의 길이는 약 550m로 도합 2,450m이다. 성은 광주리 모양의 둥근 산능선을 따라서 축조하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포곡형 산성(包谷形山城)을 이루고 있다. 원래 토축이었던 것을 후대에 석축으로 고쳤다.
성곽의 축조 방법은 성곽의 내측은 삭토하여 이를 석축의 내탁(內托 : 안받침)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깊은 호(壕)가 형성되어 있다.
또한 토성의 구축은 적심석(積心石)을 다수 혼합한 토석혼축(土石混築)의 형태이며, 현존하는 토성의 높이는 1m 내외이다. 성내에는 많은 건물과 건물지가 있으며, 현재 진남루(鎭南樓) 앞의 넓은 터가 당시의 궁궐터로 알려졌다.
웅진 시대의 사찰로는 527년(성왕 5)에 창건된 대통사(大通寺)가 있었다. 공주시 반죽동에 위치한 이 절터에서는 대통명(大通銘)의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고, 현재는 불적(佛蹟)만 남아 있다.
또 절 구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건축 구조물의 일부가 발견되었으며,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석조(石槽) 2점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석조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당간지주의 기단 각 면에는 연화문안상(蓮花文眼象)이 새겨져 있는데, 이 연화문은 백제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서혈사(西穴寺)는 공주시 망월산 중턱의 석굴을 갖춘 사찰로, 이 절터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2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다.
탑 자리에서 기단적심(基壇積心)의 석축 사이에 교란된 또 다른 층위(層位)가 존재하여 통일신라 이전의 유구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는데, 대체로 백제 시대에 창건되어 통일신라에 와서 본격적인 가람이 조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웅진을 근거로 하여 중흥을 꾀하던 백제는 538년에 이르러 다시 부여로 천도하니, 백제 문화의 중심은 공주에서 부여로 옮겨져 찬란한 백제 문화가 펼쳐지게 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고분으로는 능산리고분군을 들 수 있다. 이 고분군은 모두 7기로 구성되어 앞뒤 2열로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석실분이지만 형태로 보아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웅진 시대의 전축분을 계승한 터널형 형식이며, 다른 하나는 이 시기에 와서 성행한 것으로 보이는 평사천장식 또는 평천장식이다.
전자는 석실을 돌덩이로 쌓아올린 평면 장방형의 현실로서 연도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인 데 비해, 후자는 현실이나 연도를 큰 돌판으로 축조하고 연도는 석실의 전면 중앙에 설치한 것이다. 이 고분군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동하총(東下塚)이라 불리는 벽화분이다.
붉은 색으로 네 벽에 사신(四神)과 천장에 연화문 · 비운문(飛雲文)을 그린 것인데, 지금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원래는 봉분이 크지 않았으나 정화 공사시에 크게 성토해서 원래의 모습을 잃고 있다. 이 시대에 오면 백제는 종래의 도성과는 그 형태가 다른 중국식의 도성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즉, 부소산성(扶蘇山城)을 후진(後鎭)으로 삼고 부소산성의 남쪽 일대와 백마강의 서안 일대를 둘러싼 나성(羅城)을 축조하여 그 안에 구획을 만들어 민가 · 관아 · 사찰 등을 갖춘 것이다.
부소산성은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일차적으로 테뫼식의 산성을 축조하고 그 주위를 포곡식으로 약 1.5㎞를 축조한 산성이다. 성내 건물 터에는 주춧돌이 산재하여 있는데, 군창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탄화된 쌀이 나오고 있으며 토축 성벽도 완연히 남아 있다. 성흥산성(城興山城)은 수도인 부여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된 산성의 하나로서 일명 가림성(加林城)이라고도 한다.
500년(동성왕 22)에 축조하였다고 하는데, 둘레 약 600m, 성벽 높이 3∼4m로 우물터 세 곳과 건물 터가 남아 있다. 성의 형태는 테뫼식이며 석축이다.
나성은 부소산성의 동문터에서 시작하여 청산성 · 석목리 · 동문다리 · 필서봉을 거쳐서 염창리로 이르는 토축으로 된 성이나, 지금은 일부만이 그 형태를 남기고 있다. 이 성곽도 수도의 보호를 위한 성으로 성왕 때에 축조되었다.
청마산성(靑馬山城)은 월명산(月明山)에 위치한 둘레 약 3㎞의 토석혼축으로 된 포곡식 산성으로, 수도의 동방 수호를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청산성은 부소산성 동쪽에 축조된 둘레 약 300m의 테뫼식 산성으로 부소산성의 보조 산성이다.
궁남지는 부여읍 동남리에 위치하며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동편에 약간의 초석이 남아 있고 옛 기와가 산재하고 있다.
부근에는 대리석을 3단으로 짜 돌린 팔각형의 우물이 남아 있다. 이 궁남지는 속칭 ‘마래방죽’이라고도 하여 무왕의 출생설화와 관계가 있는 곳이다.
정림사지(定林寺址)는 부여읍 동남리에 위치한 절터로 오층석탑과 함께 고려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이 남아 있다. 일탑식(一塔式) 가람 배치로서 금당(金堂)의 기단은 이중 기단이다. 강당의 기단 최하층에서 창건 당시의 기단이 발견되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미륵사지오층석탑과 함께 우리 나라 탑파(塔婆)의 시원 양식에 속하는 매우 중요한 탑이다. 군수리사지는 부여읍 군수리에 위치한 백제 시대의 사지로서,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과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보물, 1963년 지정)이 탑지에서 출토되어 이름이 높다.
건물 유구로는 목탑지와 금당지 · 강당지가 있고, 종루와 경루(經樓)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건물지도 있다. 또한 주위에서는 회랑지(廻廊址)도 발견되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백제가 660년(의자왕 20)에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되자 찬란하였던 백제 문화는 일시에 파괴되고 역사의 중심은 경주로 옮겨갔다.
그 뒤 오늘날까지 금강 유역은 역사 속에서 중추적인 구실은 하지 못하였으나 문화적으로는 백제적인 요소를 간직한 채 그 맥을 이어왔다. 통일신라 시대의 유적으로는 먼저 계룡산에 위치한 갑사(甲寺)를 들 수 있다.
556년(진흥왕 17)에 혜명(惠明)이 창건한 뒤 의상(義湘)이 도량(道場)을 설치하고 법당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절 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가 있다. 여기에 있는 공주 갑사 승탑(보물, 1963년 지정)는 고려 시대의 작품인데 화강석재를 사용하여 팔각으로 만들었다. 이 밖에 범종과 〈월인천강지곡〉 목각판 등이 있다.
동학사(東鶴寺)는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 말기에 국사 도선(道詵)에 의하여 중건되었으며 고려태조의 원당(願堂)이 되었다고 한다.
대웅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마곡사(麻谷寺)는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에 위치한 거찰로 70여 개 사찰을 관장하던 곳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모두 조선 시대에 중건된 건물이다.
오층석탑은 라마형식의 특수한 양식을 지니고 있는 탑으로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무량사(無量寺)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어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되었는데, 세조 때 김시습(金時習)이 은둔하였다가 죽은 곳으로 유명하다.
김시습이 자화상을 그린 초상화는 지금도 봉안되어 보존되고 있다. 극락전 · 석등 · 오층석탑은 각각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성주사(聖住寺)는 신라 말기의 선종구산(禪宗九山)의 하나로 무염(無染)이 창건한 절이다. 이 절터에 남아 있는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국보, 1962년 지정)는 학계에 중요한 금석문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데, 신라 골품제도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기록되어 있다.
고려 시대로 들어오면서 모든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이 경주에서 개성으로 옮겨지게 되었으나 금강 유역은 여전히 문화의 중심에서 제외된 채로 남아 있었다.
득윤리고분군은 논산시 광석면 득윤리에 위치한 고려 시대의 고분으로 모두 3기로 구성되어 있다. 1호분은 가장 큰 규모로 석실벽은 모두 자연석을 사용하였고 개석은 대형 자연석 3장을 덮었다.
특기할 것은 부장품을 넣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측실이 있었다는 점이다. 2호분 역시 토층에 광(壙)을 파고 내부를 자연석으로 축조한 횡혈식(橫穴式) 석실이다.
3호분은 다른 것에 비하여 현실이 좁고 길게 축조되었다. 출토 유물은 청자병(靑磁甁) · 청자완(靑磁碗) · 은제차자(銀製釵子 : 비녀) 등이다. 관촉사(灌燭寺)는 논산시 은진면에 위치한 사찰로 고려 광종 때에 혜명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2018년 지정)은 화강석으로 높이 18.12m인데, 968년 (광종 19)에 제작된 것으로 전한다. 원래는 관음보살상으로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미륵이라 불리며,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이다.
은진미륵과 유사한 형태의 불상은 부여군 임천면 대조사(大鳥寺)에도 1구가 보존되어 있다. 고려 초기의 미륵신앙과 관련있는 작품으로 생각된다.
개태사(開泰寺)는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에 있던 사찰로 936년(태조 19) 창건되었다. 이 절터에 있는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1963년 지정)의 본존은 아미타여래입상으로 방형 대좌(臺座) 위에 있고 좌우에 협시보살이 있다. 우측 협시는 특히 고식(古式)을 지닌 보살상으로 통일신라기의 양식을 계승한 작품이다.
조선 시대로 접어들면서 문화의 중심이 개성에서 한성(漢城)으로 옮겨졌지만 금강 유역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또 문화의 성격이 불교 문화에서 유교 문화로 변화하게 되어 사원 등의 건축이 제한되고 상대적으로 서원 등의 건축이 늘어난다.
따라서 이 지역에 남은 조선 시대의 유적은 한정되었다. 또한 이 지역에는 많은 서원이 세워졌으나 대부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되었다.
노성 노강서원(魯岡書院)은 논산시 노성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윤황(尹煌) · 윤문거(尹文擧) · 윤선거(尹宣擧) · 윤증(尹拯) 등 4인을 향사하기 위하여 1675년(숙종 1)에 건립되어, 1682년에 사액(賜額)되었다.
돈암서원(遯巖書院)은 논산시 연산면에 위치하며, 김장생(金長生) · 김집(金集) · 송준길(宋浚吉) · 송시열(宋時烈) 등 4인을 향사하기 위하여 1634년(인조 12)에 건립되고, 1659년(현종 1)에 사액되었다.
이 서원은 서원철폐령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원래 임리에 있다가 1880년(고종 17)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으며, 오늘날까지 전하는 충청남도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구비문학에서 금강과 관련된 대표적인 설화로는 〈곰나루전설〉과 〈조룡대전설 釣龍臺傳說〉이 있다. 〈곰나루전설〉의 내용은 한 남자가 큰 암콤에게 붙들려 살다 달아나자 여기에 상심한 암콤이 새끼와 함께 강물에 몸을 던져 죽으므로, 그 뒤 자주 복선(覆船)이 되어서 사당을 짓고 고사를 지냈다는 이야기이다.
〈조룡대전설〉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여현에 실려 있는데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침략할 때의 전설이다. 금강과 관련된 민요로는 〈산유화가〉가 있다.
이 노래는 부여를 중심으로 유포, 전승되어 온 역사 깊은 농요이다. “산유화야/산유화야/사비강(泗沘江)/맑은 물에/고기잡는/어옹덜아/온갖고기/다 잡어두/경칠랑은/낚지마소/강산풍경/좋을시고오.”
이 민요에서 금강을 ‘고기’와 대비하여 그 아름다움의 정도를 비유하고 있다. 모든 고기는 다 낚아갈지언정 아름다운 금강의 경치는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깃들여 있다.
서거정(徐居正)이나 이덕무(李德懋)의 한시를 중심으로 한 고전문학 작품에서 금강은 고사와 전설 및 나룻배 등과 함께 흥취 있게 묘사된다.
이덕무의 한시 〈아정유고 雅亭遺稿〉를 보면, 금강은 〈조룡대전설〉 및 고사와 함께 묘사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공주십경에서 〈금강춘유 錦江春遊〉를 보면, 금강은 ‘깨끗한 물’과 ‘나룻배’, ‘잔잔한 바람’ 등의 소재로 시화(詩化)되고 있다.
〈조룡대전설〉과 고사는 시조 및 한시에서 빈번하게 인용되고 있는데, 취선(翠仙)의 〈백마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금강과 관련된 고전작품으로 부(賦)에는 조선의 문신인 민제인(閔齊仁)의 〈백마강부 白馬江賦〉가 있다. 또한 국문단가(國文短歌)인 황일호(黃一皜)의 〈백마강가〉가 새로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도 〈호남기행가〉와 〈사친사 思親詞〉 · 〈춘면곡 春眠曲〉 등의 가사작품이 있다.
해남 백포 출생 윤부인(尹夫人)의 작품인 〈사친사〉를 보면 “금강 의협선을 어이ᄒᆞ여 어더ᄂᆡ여/동남풍을 ᄒᆞᄅᆡ밤만 벌리시면/빅포압ᄋᆡ ᄇᆡᄅᆞᆯ ᄆᆡ고 우리집을 보련마난/……”이라고 하여 금강에 배가 다녔음을 말하여 준다. 또 〈춘면곡〉에서는 “태산이 평지되도록 금강이 다 마르나”라고 하여 금강을 물이 깊고 풍부한 강으로 인식하였음을 잘 나타내 준다.
근래에 이르러서 신동엽(申東曄)은 〈금강〉이라는 서사시에서 금강을 동학운동과 3·1운동 등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일깨우는 강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금강을 역사적으로 백제 정신을 재현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금강은 예로부터 뱃길로 이용되었고, 역사적 사건들이 많이 얽힌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건들과의 관계는 문학작품 속에서도 그대로 반영되는데, 금강은 백제의 멸망, 동학운동, 일제 하에 있어서의 쌀의 수탈 등의 사건과 연계되어 한(恨)의 강으로 그려지고 있다.
유현종(劉賢鍾)의 소설 〈들불〉에는 “금강을 이용해서 왜인들이 쌀을 가져가고 그로 인해 백성들은 피폐해져 아사 직전까지 이르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권력자들도 금강을 타고 오르며 뇌물을 거두어들이기에 정신이 없고 백성들은 점점 어려워만 진다.”라고 하여 금강이 백성을 수탈하는 길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원래 금강은 호남평야의 젖줄로서 백제 시대에는 수도를 끼고 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었으며,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는 수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의 군사들이 짓밟은 뒤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동안 금강은 줄곧 민족의 한을 머금은 비극의 강이 되었다. 동학운동 때에는 전봉준(全琫準)이 공산성나루에서 붙잡혀 금강을 건너 압송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금강의 역사적 사건들은 후대 문학작품에서 빈번히 서술되고 있다. 장효문(張孝文)의 서사시 〈전봉준〉에서는 “물에 몸을 던지는 사람은/호남이 제일 많아서 이만인이요/충청이 그 다음으로 일만이요/……/금강에 뛰어들어 수혼원귀”라고 하여 민족의 비극적 역사를 드러내고 있다.
금강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으로는 신동엽의 〈금강〉, 유현종의 〈들불〉, 장효문의 서사시 〈전봉준〉 외에도 1930년대 후반의 우리 민족이 처하여 있던 역사적 · 사회적 현실을 배경으로 한 채만식(蔡萬植)의 〈탁류 濁流〉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금강의 맑은 강물이 탁류로 변하는 과정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압제 속으로 전락하게 되는 역사적 과정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이렇게 에두르고 휘몰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 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 : 시가지) 하나가 올라앉았다.”라고 하였으며, 줄곧 일제의 압박과 지배를 받는 민족의 표상이며 시대적 고통이 개입된 강으로 표현하고 있다.
문학 속에 나타난 금강의 모습에서 간과될 수 없는 것은 생명의 모태로서의 존재이다. 즉, 고향과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평화스러움과 안온함을 제공하는 근원으로서의 금강을 말한다.
장정심(張貞心)의 시조 〈금강정 錦江亭〉을 보면, “금강정 푸른 물결 비단필 씨처낸듯/틔없이 고을세라 끝없이 맑을세라”라고 하여 금강을 비단처럼 곱고 맑은 강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최원규(崔元圭)의 〈금강을 바라보며〉에서는 유년시절 어린 동무와 미역을 감고 낚시를 하던 순수 자연의 강이며, 지금은 죽고 없는 친구를 회상하게 하는 시적 모티프로서의 강으로 표현하고 있다.
“네 평 가옷 땅속에 묻혀/갑갑해할지 몰라/더러 밤에 혼자 나와/금강에서 미역감고 낚시질할까”라고 하면서 금강을 살아 있는 인간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죽은자의 영혼을 쉬게 하는 윤회적인 공간으로 파악하고 있다.
정한모(鄭漢模)의 〈금강에서〉는 서정적인 모습과 아울러 서정을 바탕으로 한 정취를 노래하고 있으며, 나태주(羅泰柱)는 〈금강가에서〉라는 시에서 “비단강이 비단강임을/많은 강을 돌아보고 나서야/비로소 알겠습니다. /그대가 내게 소중한 사람임은/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야/비로소 알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고향을 떠나 본 뒤에야 느끼는 고향에 대한 소중함처럼 다른 강들을 돌아보고 나서야 느끼는 금강의 소중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박명용(朴明用)은 〈강물은 말하지 않아도〉에서 “갓 시집온 새댁처럼/세상이야기를 온몸에 받으면서/그저/물 속 깊이 흐를 뿐/계절을 몰라서가 아니다.”라고 하여 금강을 삶의 모습으로 상징화하고 있다. 금강은 또한 흐르는 세월로 표상되며 흘러간 시절들을 비추어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한상각(韓相珏)은 〈강변소묘 江邊素描〉에서 “물속에 비친/내 얼굴이 흔들리고/물살 위에 떠오르는 얼굴에/주름살이 굵어질 때마다/더욱 어머니를 닮아보이는/내 얼굴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금강에 비친 자기 얼굴(自我) 위에 겹치는 어머니의 모습은 삶의 핏줄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며, 강의 흐름과 핏줄의 이어짐을 연결하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근대화되고 산업화된 현대 사회 속에서 금강의 모습은 오염되고 물고기가 떼죽음 당하는 죽음의 강으로도 인식되고 있다.
신협(愼協)은 〈금강헌사〉에서 “금강은 맑았었네/청산은 어디에 있느뇨/금강 물 속에 잠겨 있네/…… · 금강이 병들면 물고기가 죽어가고 황새도 자취 감춰/강가의 사람인들 어찌 살리.”라고 하여, 풍경 좋고 물이 맑아 곡창을 형성했던 금강이 산업 쓰레기와 찌꺼기에 의하여 오염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이 금강은 문학작품 속에서 역사적 사건의 배경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서정적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어린 시절 고향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소중한 존재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산업화 속에서 오염되고 병든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1) 자원으로서의 금강
금강 유역의 연평균 강수량은 1,269㎜이고, 총 강수량은 129억 톤이다. 이 중 49%인 약62억 톤 정도가 금강을 따라 흐르고 있다. 강수는 여름철에 집중되는 관계로 하상계수는 1:299에 이른다. 금강의 수자원 중 약 54%는 농업용수로, 10%는 생활용수로, 5%는 공업용수로 이용되고 있으며, 나머지 31%는 하천 유지용수로 흘러보내고 있다.
하천의 중 · 상류부 곡간에는 크고 작은 분지가 발달되어 있으며, 하류 유역에는 논산평야 · 서천평야와 같은 충적 범람원이 발달되어 있어서 예로부터 유역인의 삶의 터전을 이루어 왔다.
오늘날과 같이 금강의 수자원을 다양하게 이용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역사를 통해 사회의 변천 과정을 거처야만 했다. 공주시 동쪽 석장리의 구석기시대의 유적을 비롯하여 마암리유적, 대청댐의 인접지인 청원의 두루봉 유적, 영동 · 옥천 일대의 신석기 유적, 부여의 송국리 청동기시대 유적 등은 금강이 오래 전부터 유역인의 삶과 관계가 깊었음을 말해준다.
이 무렵에는 주로 생활 용수나 어로 작업의 장으로서의 의미가 컸을 것이다. 역사시대로 들어 백제가 공주나 부여에 도읍을 했던 때에는 정치와 문화 교류 및 군사적인 이동로로서의 의미를 갖었었다.
물화의 수송을 위한 것으로 고려, 조선조에 실시했던 전세(田稅)나 대동미(大同米) 등 국가 세미 수송을 위한 조운을 들 수 있다. 금강 유역에서는 연안의 조창에다 세미를 수집 보관했다가 수운을 이용하여 경창으로 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상업적인 선운업이 발달되면서 금강은 수운 수로로서 큰 몫을 하게 되었다. 18세기 중엽 이중환(李重煥)은 금강 유역의 강경포(江景浦)를 상품 유통의 중심지로 적고 있다. 이렇게해서 1870년대에 중 하류 중계 하항인 강경이 평양, 대구와 함께 3대 시장의 하나로 번성한 바 있다.
1899년 군산 개항 전까지 강경포는 중국의 무역선까지 들어오던 황해안 최대의 무역 상업도시로 한때 군산항과의 역학 관계를 서울의인천, 평양의 진남포와의 관계로 비유하기도 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군산항으로 들어온 무역 물동량의 약 80%는 강경장을 통해 소비지로 팔려 나갔다고 한다.
충청과 전라의 행정 중심지이였던 공주와 전주의 상권까지도 강경의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수운 성기인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금강의 뱃길의 끝은 충청북도 부강까지 이었으며, 군산 · 강경 · 공주 · 부강사이는 20여 개의 하항이 발달하여 화물용 범선 외에 여객선을 운행하고 있었다. 부강 이상의 신탄진이나 미호천 유역에도 하선의 왕래는 있었으나 지역 내의 소형 시장선 만이 있었을 뿐이다.
강경이나 부강에서는 수운의 성기에 수산물 중 소금을 인력이나 축력으로 멀리 추풍령 · 충주 · 영월 등지까지도 실어 갔다. 근대로 들어서 경부선,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고, 충북선과 장항선이 차례로 개통되면서 금강의 수운 기능은 급격히 쇠퇴되였다. 이에다 하상에 토사가 쌓여서 수로 자체가 마비된 것도 요인 중 하나다.
그 뒤 철도 연변의 역들은 경제적 기능의 중심지로 성장해 가는 반면 한때 번창했던 공주, 부여와 같은 중류 유역의 하항들은 점차 경제적 기능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수운 이용 구간은 중류에서 점차 강경 이하 하류부로 줄어들었으며, 주변의 농경지의 수리 관개 시설의 추진과 함께 금강은 농업 용수를 공급하는 수원지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인구는 증가되고 산업화 사회로 발전되면서 생활용수나 공업용수의 수요도 크게 늘어나 있다.
1980년에 대청 다목적 댐을 건설하고, 1990넌에 금강 하구언이 건설됨으로서 유역 외의 광역에 이르기까지 용수와 전력을 공급해 오고 있다. 대청댐은 홍수를 조절하고 용수를 공급하는 등 다목적인 개발 사업이었다. 현재 3개의 취수장에서 물을 끌어 유역과 그 주변 지역에까지 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대청호 문의(청주) 취수장은 청주 · 조치원 · 천안 · 아산까지 공급하고 있으며, 대전 취수장은 대전 시내로, 부여 취수장은 논산, 강경을 거쳐서 전북특별자치도 익산 · 전주 · 군산까지 끌어가는 광역 상수도 체계를 갖추고 있다.
금강 하구언은 하류 유역의 용수 공급을 위한 것인데, 새만금 간척 지구까지도 미치게 될 것이다. 또 하구언 공사로 해서 하구에서 부여의 규암까지는 사실상 담수호화 되어 감조 구역의 농경지에 대한 염해 방지는 물론, 홍수시 하류부의 침수 피해 현상도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건설중인 상류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용담댐은 전주권과 군산에까지 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유역변경식 수자원 개발 공사다.
이렇게 다목적인 개발을 함으로써 금강은 수로 이용 당시의 낭만적인 범선이나 발동기선의 왕래를 1970년대 초로 끝을 맺었다. 강경 이하 장항, 군산까지의 사이에 있었던 입포(부여), 옥포(서천), 웅포(익산), 나포(군산)와 같은 계절적인 군소 어항들도 그 기능을 상실했으며, 하구언 공사 이후는 지난날의 경관을 구전에 의해 찾아볼 수 있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로 남아있다.
(2) 관광자원
금강 유역은 아름다운 산수의 자연환경과 역사적인 관광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우선 계룡산 · 속리산 · 덕유산 등의 국립공원과 대둔산 · 칠갑산 · 마이산 등 도립공원, 그리고 유성온천, 초정리약수터와 같은 자연 관광자원이 도처에 많다.
또한 선사시대 유적지를 비롯하여, 공주 · 부여 · 익산으로 이어지는 백제 문화 특정 지역, 관촉사의 은진미륵, 금산의 칠백의총 등 역사 관광자원에다, 독립기념관, 대청댐, 금강하구언 또한 빛을 보고 있다. 이에다 대전의 대덕연구단지, 신탄진공업단지와 함께 1990년대에는 국제적인 관광자원으로 EXPO과학공원이 건설되었다.
그 밖에 백제문화제, 금산의 인삼문화제와 같은 연례 문화제 행사가 이어지고 있어 내외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지역은 국토의 중간적인 위치에 있어 어느 지역에서도 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특히 수도권과는 접근도가 높아, 이런 다양하고 풍부한 관광자원을 연계하여 조화롭게 개발할 경우 무한한 자원으로서의 의미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3) 인력자원
유역의 총 인구는 약 294만 7000명으로 전국 인구의 6.6%의 구성비이며, 그 중 대전광역시와 청주시를 합한 독립 시부만으로 61.2%를 차지하고 있다. 평균 인구밀도는 282.1이며, 그 중 대전광역시는 2,359.4, 청주시는 3,462.6인데 대해 상류부인 진안군(8개 면) 43.9, 완주군 운주면은 27.9로 나타나 있다. 금강 유역을 이루고 있는 주요 시 · 도의 업종별 취업 비율은 다음 표와 같다.
그러나 우리 나라 첨단 과학 기술의 요람인 대덕연구단지가 있는 데다가 고등교육기관도 많아서 이 지역의 발전은 물론 세계화로 지향할 고급 인력 자원의 공급원이 되고 있다.
즉 이곳에는 대전에 있는 한국과학기술대학을 비롯하여 대학교 16개, 교육대학 2개, 개방대학 2개, 전문대학 9개, 서울 소재 대학의 분교 2개교가 입지하고 있다. 권외에 있는 천안 · 전주 · 군산 · 익산시까지를 더하면 고급 인력 공급 규모는 더욱 커진다.
(1) 농업경관
유역의 경지 비율은 18.2%이며, 하류부인 익산(8개 읍 · 면 45.1%), 서천(6개 면 38.2%), 논산(전역, 31.4%), 부여(30.2%) 등 시 · 군에서 높게 나타나 있다. 이 넓고 기름진 평야는 일찌기 전국 최대의 곡창으로 18세기 강경포시장 형성기에는 이들 유역 평야의 농산물이 큰 배경이 되어 왔다.
근대로 들어서면서 한때 일본은 만경강 유역과 함께 금강 유역을 한반도에서 그들의 토지 개발 및 식량의 주요 공급 기지로 삼아왔다. 군산항은 미곡을 비롯한 농산물의 수출과 생활 필수품을 수입하는 무역항으로 발전하였으며, 유역의 농작의 풍흉이 군산시 도시 경제적 기능을 좌우할 정도였다.
벼농사는 금강 유역의 전통적인 주요 작물이다. 그러나 경작 방법은 산업화 이전에 비해 크게 발전되고 있다. 중 · 하류부 공주(140), 논산(174), 부여(189), 서천(168)을 위시해서 기계화 전업 농가가 늘어가는 추세다. 보리 경작은 격감되어 콩과 상대적인 위치가 바뀌어 있다. 채소 농업도 상품화의 경향이 짙게 나타나 있다.
하상 부지가 넓은 부여는 방울토마토와 수박을 비롯한 과채류와 근채류 생산이 많으며, 논산은 딸기와 포도의 재배로 이름이 높다. 과채류는 대부분 경영 집약적인 시설 재배에 의해 이루고 있다. 조미 채소인 고추 경작은 널리 이루어지고 있으며, 음성과 보은, 화남면(상주시), 청양 같은 내륙 지방에 많다.
금산 · 장수 · 무주와 같은 상류부 고지대 산군은 여름철 고랭지채소 외에 기온의 일교차가 큰 조건을 이용하여 당도가 높은 고품질 사과를 생산하고 있다. 그 밖에도 대전, 청주 등 도시 근교의 집약적인 각종 원예농업과 충청권과 영남권의 점이지대에 단지를 조성하고 있는 영동을 중심으로 한 포도 재배도 유역의 농업 경관에서 특기할 수 있다.
인삼은 특용작물로 금산에서 무주 · 진안 · 장수로 확대되어 있으며, 금산은 인삼 외에도 각종 약초의 물류 단지로 성장하고 있다. 최근 들어 영동을 위시하여 괴산 등 충청북도 내륙 지방에서는 전통적인 황색담배 이외에 인삼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그 밖에도 각 지역의 특산물로는 한산의 모시, 부여의 홍삼, 청양의 구기자, 연산의 오골계(烏骨鷄), 옥천, 보은, 연산의 대추 등이 예로부터 알려져 있다.
유실 임산물로는 공주의 밤, 영동의 감과 호도 등을 들 수 있다. 축산업 중 소는 예로부터 농가의 부업으로 이루어져 강경장의 주요 출시 상품 중의 하나였으며, 군산 개항 이후 소가죽은 쌀과 함께 일본으로 나간 수출품으로 이름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주로 보은 · 금산 · 공주 · 진안 · 무주 · 장수와 같은 산지의 시 · 군에서 기업적인 집단 사육으로 그 경관이 바뀌어 있다.
(2) 광공업과 수질오염
지하자원의 개발은 빈약한 편이다. 금은 음성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석회석은 청원 · 익산 · 진안에서, 규석은 서천 · 괴산 · 장수에서, 장석은 논산에서 각각 생산되고 있을 정도다. 황등을 중심으로 익산은 양질의 화강암 석재와 가공품의 생산지다.
제조업은 대전광역시에서 대청댐 수자원을 이용하여 4개의 공단에서 섬유나 의류, 음식료, 화학 및 화학 제품, 고무 및 프라스틱 등과 금속 공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대덕연구단지의 기술적 인접 지원으로 첨단 공업 입지로 발전하고 있다. 청주 · 청원은 일반 의류 식료 등 소비재 공업 이외에도 전자 · 음향 등 공업이 성하다.
중부고속도로 연변인 진천 · 음성과 같은 내륙 지방에도 소비재와 금속 · 기계공업체가 들어서 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유역권 외에 있는 천안 · 장항 · 군산 · 익산 등의 도시는 기능면에서 직접 간접적으로 유역의 주민 생활과 관계되는 공업 도시들이다.
산업의 발달과 인구 증가로 인한 폐기물의 급증은 금강수를 크게 오염시키고 있다. 특히, 상류부의 무주리조트나 영동군 물한계곡의 레저타운과 같은 휴식 공간이 늘면서 금강의 수질 오염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앞으로 상류부에 유역변경식 용담댐이 완공 가동되면 금강의 수량은 감소되고, 수질 오염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용담댐 · 대청댐 · 하구언 등 인공호의 물은 강의 흐름을 막아서 이용하는 것이어서 이러한 물의 정체는 수질오염을 악화시키고 있다. 한 지역에서의 수질 오염은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는 전체적으로 물 자원의 질을 저하시킬 것이다.
1994년과 1995년에 걸친 수질 조사 결과 상류부인 대청댐까지는 1급수를 유지하고 있으나, 대전광역시에서 흘러나오는 갑천이나 청주시에서 흘러나오는 무심천은 각각 4급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 물이 흘러가는 공주 · 부여나 논산천의 물이 흘러 들어가는 금강하구언도 2급수로 나타나 있다. 장거리 공급용 부여 취수장의 물도 2급수이나 상수원수 기준으로 볼 때 3급수로 나타나 있어 정수 처리를 요하는 수준이다.
(3) 전망
2000년대로 들어설 시점에서 금강 유역은 근대 초기 철도 교통의 개통에 이어 공간 구조상 또 한 차례의 개편기를 맞고 있다. 수도권과는 시간적 인지적인 거리가 가까워진데다 대전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국토 공간의 중앙부에 있어서 국토 정책상 전국에서 가장 유리한 입지에 놓여 있다.
이에다 환황해안시대를 맞아 유역을 포함한 충청권과 북부 전북권은 그 배후지로 부상되고 있으며, 이 지역은 관광업을 포함한 각종 산업과 교역을 담당하게 될 기능 지역으로 바뀌고 있다 .
이런 국내외의 여러 여견 변화와 함께 유역 내부의 구조도 달라지고 있다. 교통망 구성만 보더라도 기존의 경부선 · 호남선의 철도와 함께 이에 연하여 고속도로가 달리고 있으며, 건설 중인 당진 · 보령 · 장항을 연결하는 황해안고속도로(서해안고속도로), 대전 · 진주 · 통영 사이, 천안 · 공주 · 논산 사이의 고속도로 등 남북계와 당진 · 공주 · 대전 사이, 서천 · 공주 · 대전 사이, 보령 · 공주 · 청주국제공항 사이의 고속도로가 내륙을 관통하여 얽기게 된다.
또 하나 대청호 · 공주 · 금강하구언까지의 강변도로가 완공되면 근대 이전의 금강의 수운 수로를 육로로 대치하게 됐으며, 유역 주민들의 숙원 사업인 수운 수로의 복원도 불원의 과제가 된다.
철도가 개통되면서 한동안 경제적으로 공동화되다시피 했던 공주 · 부여를 중심으로 한 중류부 내륙 지방은 기존의 국도 · 지방도로와 이런 고속도로망의 재구성으로 해서 잃었던 수운 성기의 전국적 상업 중심 기능을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공간 구조의 변화 속에서 유역권의 핵을 이루고 있는 대전광역시는 제2의 행정 수도로서 기능체들이 옮겨오고 있으며, 인접지의 계룡대를 포함해서 국가의 중추적인 기능을 분담하게 된다. 또한 대전은 대덕연구단지가 위치하고 있는데다, 세계박람회(EXPO)의 성공적인 개최로 국제도시로서 급부상하고 있는 장점을 바탕으로 ‘세계과학도시 연합’구성의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접변을 통해 얻어지는 첨단 과학기술 정보는 유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 면의 쇄신을 가져올 매체가 될 것이며, 나아가 당면한 국가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로 뻗어갈 국력의 원천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