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개국 초 궁궐 건축에 사용하기 위해 일부 다듬어 놓은 주초석이다.
이 초석들이 있는 신도안이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동왕 2년(1393)에 계룡산 남쪽인 이곳에 도읍을 옮기려고 태조2(1393)년 2월 권중화와 김사행이 계룡산 신도를 실측하고 도면을 그려 올렸으며, 기초공사까지 하다가 물길이 멀어서 중지하고 말았는데, 그 뒤 이곳을 신도(新都) 또는 대궐평(大闕坪)이라 부르고 있다 한다. 조선중기의 문신 윤증의 시 “新都”를 통해, 18세기 초반까지도 궁궐의 기초와 궁안의 어구시설들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궁궐의 규모를 알려주는 유적으로 산털이봉이 있다. 산털이봉은 인부들의 짚신에 묻은 흙을 한 곳에 털어 봉우리가 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이곳 신도안 주변에는 그 당시 궁궐 건축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부 다듬다만 1.5∼2.0m 정도 크기의 주초석들이 흩어져 남아 있었으나 이곳으로 삼군(三軍)본부가 들어오는 바람에 지금은 여군 숙소인 근화원(槿花園) 주변에 주초석을 모아 세 곳에 나누어 보존 관리하고 있다. 현재 주초석 115개 중 20여개는 당시 돌을 다듬은 흔적을 알 수 있는 참나무 쐐기를 박았던 구멍이 일렬로 남아 있다.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 신도안을 신도읍 후보지로 결정한 후 이곳에 궁궐 공사를 하기 위해 다듬어 놓은 초석으로 이 초석들은 한 때 이곳이 신도읍지로 결정되었던 근거로 그 의의가 있다.
현재는 군사보호구역내에 있어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