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창은 전근대 왕조 국가의 수도에 설치되어, 중앙 정부에서 지출하는 미곡 등 현물 재원을 보관하고 지출하던 국영 창고의 총칭이다. 조운을 통해 거두어들인 조세를 모아서 보관하고 지출한 창고였다. 신라에 좌창과 우창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수도 개경에 좌창, 우창, 용문창, 운흥창, 신흥창이 있었다. 고려의 경창은 담장은 있으나 지붕은 없는 노적창(露積倉)이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경창은 호조 소속의 군자감과 광흥창, 풍저창이다. 이후 중앙 정부의 재정 규모가 확대되고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국영 창고가 증가하였다.
미곡과 같은 현물 재원을 위주로 중앙 정부의 지출이 이루어지던 전근대시기에, 수도에 위치하였던 국영 창고들을 총칭하여 경창(京倉)이라고 불렀다. 경창은 전국 각지로부터 조운(漕運)을 통하여 거두어들인 조세(租稅)를 모아서 보관하고 지출하였으므로, 중앙 집권적 왕조 국가의 재정 운용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경창은 글자 그대로 수도에 위치한 국영 창고를 의미한다. 삼국시대의 경우, 신라에서 663년(문무왕 3)에 좌창(左倉)과 우창(右倉)을 두었다는 사례가 확인된다. 좌창은 천은사(天恩寺) 북쪽에, 우창은 남산(南山) 신성(新城)에 두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수도인 개경에 여러 명칭의 창고가 확인된다. 고려시대 개경에 위치한 국영 창고로는 좌창과 우창, 대창(大倉), 용문창(龍門倉), 운흥창(雲興倉), 신흥창(新興倉) 등이 있다. 좌창은 광흥창(廣興倉), 우창은 풍저창(豊儲倉)이라고도 하며, 좌창의 별창(別倉)으로는 동강창(東江倉)이 있었다.
경창에는 전국 각 지역에서 수납되어 조운 등의 방식을 통해 운송된 곡식이 보관되었다. 좌창과 우창은 20만 석 내외, 대창은 14만 석 가량의 곡식을 보관할 수 있는 규모의 창고로 추정되고 있다.
용문창은 개경 나성의 선의문(宣義門) 밖에 위치하였다고 하나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운흥창과 신흥창에 대한 정보 역시 자세히 남아 있지 않다.
좌창의 곡식은 관료들의 녹봉을 지급하기 위한 용도로 지출되었다. 우창의 곡식은 국왕에게 공상(供上)을 하기 위한 용도, 국가 제사나 외국사신 접대, 궁궐 건축 등 국가적 필요에 따른 용도 위주로 사용되었다. 좌창과 우창의 보유 곡식이 부족할 때는 서로 부족분을 보충해 주기도 하였다.
대창은 좌창과 우창 곡식의 부족분을 보완하는 예비창(豫備倉)의 역할, 혹은 독립 창고를 갖지 못한 중앙 재정기관의 창고 역할을 하였으며, 군량의 공급을 맡은 용문창과 그 외 신흥창, 운흥창 등도 대창과 마찬가지로 예비창의 성격을 지녔다.
고려시대 경창은 담장을 둘렀으나 지붕이 있는 창고 건물을 갖추지 않은 노적창(露積倉)이었다. 곡물의 장기 보관이 필수적인 경창에서는 흙으로 쌓아올린 축대 위에 풀을 엮어 만든 이엉을 깔고 곡물을 쌓은 뒤 다시 풀을 덮는 보관법을 채택하여, 비나 바람의 피해를 막고 통풍이 원활히 유지되도록 하였다.
고려시대 경창을 보호하고 곡식의 출납을 감독하기 위하여 별감(別監)이나 사(使), 부사(副使), 승(丞) 등의 직책을 가진 관원이 임명되었다. 또한 창고의 실무를 맡는 이속(吏屬)이 배치되었으며, 화재나 절도로부터 곡식을 보호하는 간수군(看守軍)과 검점군(檢點軍)의 인원도 각 창고에 배정되었다. 대창서(大倉署)는 대창을 관할하기 위한 별도의 관청이었다.
조선시대 한성에도 여러 국영 창고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경창으로는 호조(戶曹) 소속의 군자감(軍資監)과 광흥창, 풍저창 등을 들 수 있다. 세 창고는 모두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국초부터 존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조운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거두어들인 세곡(稅穀)을 용산강(龍山江)과 서강(西江)에서 하역하여, 군자감과 광흥창, 풍저창 등의 창고로 옮겨 보관하였다.
용산강에는 한강 상류 방면에서 조운을 통해 운반되는 경상도와 강원도, 그리고 충청도 내륙과 경기도 내륙 지역의 세곡이 운반되었고, 서강에는 한강 하류 방면을 통해서 들어오는 황해도와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 해안과 경기도 해안 지역의 세곡이 운송되었다.
군자감은 군수 물자를 비축하기 위한 창고로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용산강에 군자강감(軍資江監)이 있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군자감이 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는데, 분감(分監)은 숭례문 안에, 강감(江監)은 용산강 북쪽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만기요람』에는 군자감이 용산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흥창은 관료들의 녹봉을 관장하던 창고로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서강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서강 북쪽에, 『만기요람』에는 와우산(臥牛山) 밑에 있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세 자료 모두 동일한 곳을 지칭한다.
풍저창은 쌀과 콩, 초둔(草芚), 종이 등의 물품을 관장하던 창고로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서강과 용산강에 풍저강창이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북부 의통방(義通坊)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군자감에는 도제조(都提調)와 제조(提調) 각 1인이 임명되었으며, 그 아래 정3품의 정(正)에서부터, 종3품의 부정(副正), 종4품의 첨정(僉正), 종5품의 판관(判官), 종6품의 주부(主簿), 종7품의 직장(直長), 종8품의 봉사(奉事), 정9품의 부봉사(副奉事), 종9품의 참봉(參奉) 등의 직제가 편성되었고,
광흥창에는 정4품의 수(守)에서부터 종6품의 주부, 종8품의 봉사, 정9품의 부봉사 등의 직제가 편성되었으며, 풍저창에는 정4품의 수, 종6품의 주부, 종7품의 직장, 종8품의 봉사, 정9품의 부봉사 등의 직제가 편성되었다.
그 외 호조 관할 하에서 창고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빈객에 대한 접대 등을 관장하는 예빈시(禮賓寺),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에 대한 공급을 담당하는 양현고 등이 국초부터 운영되었다.
군자감과 광흥창은 조선 후기에도 그대로 존속하였으나, 풍저창은 혁파되어 장흥고(長興庫)에 그 기능이 흡수되었다. 장흥고는 돗자리, 유둔(油芚), 종이 등의 물품을 관장하는 부서였다.
조선 후기에는 군자감과 광흥창의 직제에 변동이 있었다. 군자감에는 기존의 직제에서 종3품의 부정, 종4품의 첨정, 정9품의 부봉사, 종9품의 참봉 등의 직임이 폐지되었다. 광흥창에는 종5품의 영(令), 종7품의 직장이 신설되었고, 정9품의 부봉사는 폐지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중앙 정부의 재정 규모가 확대되면서 호조의 관할 하에 여러 창고가 신설되었다. 중국 사신에 대한 접대 물품을 지급하는 분호조고(分戶曹庫), 훈련도감 소속 군사들의 급료를 지급하는 별영(別營), 호조에서 관리하는 공가(貢價)와 원역료(員役料)를 관장하는 별고(別庫), 토목공사에 소요되는 목재 등을 관장하는 목물고(木物庫), 동전 주조에 필요한 동철(銅鐵)을 관장하는 주전소고(鑄錢所庫) 등이 설치되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대동법의 시행과 군비의 증강 등으로 인하여 창고 시설이 추가로 설립되었다. 대동법의 업무를 담당하는 선혜청(宣惠廳)이 신설되면서 선혜청 관할 하의 여러 창고가 만들어졌다.
옛 인경궁(仁慶宮) 터에 건립한 내청고(內廳庫)를 비롯하여 별창고(別倉庫), 강창고(江倉庫) 등이 이에 해당된다. 또한 훈련도감(訓鍊都監)과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 총융청(摠戎廳) 등 중앙의 군영에서 관리하는 창고 또한 조선 후기 한성부 각 지역에 건립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경창은 중앙 정부의 원활한 재정 운용을 위한 재원(각 지방에서 조운을 통해 운반한 세곡 등)을 저장하는 국영 창고이다. 따라서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관리하였으며, 지출 용도에 따라 몇 개의 창고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조선 후기 대동법이 시행되고 국가의 재정 규모가 확대되면서, 한성에는 국영 창고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현물 경제에 기초하여 국가 재정이 운용되던 전근대시기에, 중앙 정부에서 관리하는 경창은 미곡 등 현물 재원을 보관하고 지출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