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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의 관직.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관직.
개설

중앙과 지방에 고루 설치되어 있었으며, 판사(判事) 아래에 있기도 했으나, 하급관청일수록 최고관직에 해당하는 예가 많았다. 품계와 정원은 관청에 따라 다르다.

내용 및 변천

목종 때 처음으로 합문(閤門)에 두어졌다. 1009년(현종 즉위년)과 1014년에는 중대성(中臺省)과 금오대(金吾臺)에 설치되었다가 곧 혁파되었다. 문종 때의 관제에서, 중추원(中樞院)에는 종2품 정원 2인, 삼사(三司)에는 정3품 정원 2인, 합문·내고(內庫)에는 각각 정5품·종6품의 정원 1인이 있었다.

합좌기관인 도병마사(都兵馬使)·식목도감(式目都監) 등에도 겸관(兼官)으로 설치되었다. 도병마사에는 시중(侍中) 이하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재신(宰臣)들이 예겸(例兼)하였고, 식목도감에는 재신 가운데 2인이, 그리고 전목사(典牧司)에서는 추밀(樞密)과 6상서(尙書) 가운데 2인이 겸하였다.

또한, 3품 이상으로서 사면도감(四面都監)에 1인, 내장택(內庄宅)에 1인, 창고도감(倉庫都監)·행랑도감(行廊都監)·대상부(大常府)에 3품 겸관으로 각 1인, 제기도감(祭器都監)·노부도감(鹵簿都監)에 3품 겸관으로 각 2인, 5부(部)·팔관보(八關寶)·도재고(都齋庫)에 4품 이상 각 1인이 있었다.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에 각 1인, 연경궁(延慶宮)에 1인이 있었다. 제궁원관(諸宮院官)에는 권무(權務)로서 설치되었다.

이 밖에 외직으로 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대도독부(大都督府)에 3품 이상, 중도호부에 4품 이상, 방어진(防禦鎭)·주(州)·군(郡)에 5품 이상으로 각각 1인씩이 파견되었다. 뒤에 주·군에는 지사(知事)와 판관(判官)만을 두게 됨으로써 폐지되었다.

이후 1093년(선종 10)에 봉선고(奉先庫)를 설치하면서 정원 1인을 두었다. 1258년(고종 45)과 1264년(원종 5)에는 각각 구급도감(救急都監)과 행종도감(行從都監)에도 새로이 설치하였다. 5부의 것은 고종 때 판관으로 대치되면서 폐지되었다.

한편, 1269년 이후 여러 차례 설치되었던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에도 그 책임자로서 두어지곤 하였다. 1275년(충렬왕 1) 원의 간섭으로 관제가 격하될 때, 추밀원(樞密院 : 中樞院)이 밀직사(密直司)로, 합문이 통례문(通禮門)으로 개편되었으나, 그대로 유지되었다. 같은 해에 삼사에서는 좌사(左使)와 우사(右使)로 나뉘었다.

1298년 충선왕의 관제개혁으로 밀직사가 광정원(光政院)으로 바뀌고 자정원(資政院)이 신설되었다. 이 때 광정원과 자정원의 종1품, 최고관직으로 되었다가 왕의 퇴위와 함께 모두 폐지되고, 밀직사의 종2품 정원 1인으로 환원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대상부가 봉상시(奉常寺)로 바뀌면서 경(卿)으로 대치되었다. 1304년에는 경사교수도감(經史敎授都監)에 정원 2인을 신설하고, 명유(名儒)로써 간택해 임명하도록 하였다.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해 대대적인 관제개혁을 단행하였다. 풍저창(豊儲倉)·광흥창(廣興倉)·상적창(常積倉)·자운방(紫雲坊)에는 정5품 정원 1인, 제용사(齊用司)에는 정5품 정원 4인, 선공사(繕工司)에는 종5품 정원 2인, 의영고(義盈庫)·장흥고(長興庫)·상만고(常滿庫)에는 종5품 정원 1인으로 두어졌다.

영조국(營造局)·잡작국(雜作局)에도 역시 5품직으로 설치되었다. 이 때 주로 창(倉)·고(庫) 등의 관청에 새로 두어지면서 5품직으로 고정되었다. 다만 합문의 후신인 중문(中門)에서는 정3품 정원 2인, 인신사(印信司)·응방(鷹坊)에서는 정원 2인의 종3품직으로 되어 있었다.

1309년에는 응방의 것이 폐지된 반면, 의성창(義成倉)·덕천창(德泉倉)에 종5품직으로 설치되었다. 1310년(충선왕 2) 식목도감의 경우,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하가 겸하도록 정해지고, 요물고(料物庫)에도 종5품직으로 두어지면서 영조국·잡작국의 것은 폐지되었다.

또한, 제용사가 자섬사(資贍司)로 바뀌면서 종4품직으로 승격되었지만 곧 폐지되었다. 이후 중문이 통례문으로 환원되면서 판사로 대치, 폐지되었다. 의성창·덕천창의 것도 1325년(충숙왕 12)에 폐지되었다.

1347년(충목왕 3)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면서 정원 9인의 관직으로 두어져 정치관으로서 개혁을 주도하다가 1349년(충정왕 1) 도감의 혁파와 함께 폐지되었다. 1356년(공민왕 5) 추밀원이 다시 설치되면서 종2품 정원 2인의 관직으로 부활되었다.

동시에 풍저창·광흥창 및 장흥고·상만고에서는 각각 종5품·종6품으로 강등되었다. 또한, 1362년 삼사가 복치되면서 정2품직으로 두어지고, 1369년보원해전고(寶源解典庫)에 종5품직으로 신설되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 제궁전관과 봉선고의 것이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관제가 이어져 창·고 등 관청의 장관을 일컫다가 1466년 관제가 정비될 때 수(守) 또는 영(令)으로 개칭되었다. 다만 외관직으로서 대도호부·도호부·목의 정3품·종3품의 관직을 가리키게 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집필자
이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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