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1년(성종 10)에 설치된 중추원(中樞院)은 1095년(헌종 1) 추밀원으로 바뀌었다가, 몽골(원)의 간섭으로 1275년(충렬왕 1) 밀직사로 바뀌게 되었다.
이때에 몽골(원)은 고려의 관제(官制)와 용어 등이 참람하다는 지적을 하여 관제와 왕실 용어의 격하가 이루어졌는데, 태자(太子)가 세자(世子)로,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이 첨의부(僉議府)로, 6부(六部)가 4사(四司) 등으로 격하된 것이 바로 그 사례이다. 중추원이 밀직사로 변하게 된 것도 그 결과의 하나이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忠宣王)이 밀직사를 광정원(光政院)으로 바꾸었다가, 곧 다시 밀직사로 고쳤다.
기본적인 직제(職制)는 추밀원의 직제를 유지하였으며, 사(使, 종2품) 1인, 지사사(知司事, 종2품) 2인, 동지사사(同知司事, 종2품) 3인, 부사(副使, 종2품) 4인, 지신사(知申事, 정3품) 1인, 좌 · 우승지(左右承旨, 정3품) 각 1인, 좌 · 우부승지(左右副承旨, 정3품) 각 1인, 당후관(堂後官, 정7품) 등을 두었다.
1356년(공민왕 5) 반원개혁정책(反元改革政策)에 따라 추밀원으로 바꾸었다가 1362년(공민왕 11) 다시 밀직사라고 하였다. 이때 판사사(判司事, 종2품), 사사(司使, 종2품), 지사사(종2품), 첨서사사(簽書司事, 종2품), 동지사사(종2품), 부사(정3품), 제학(提學, 정3품), 지신사(정3품), 좌 · 우대언(左右代言, 정3품), 좌 · 우부대언(左右副代言, 정3품), 당후관 등을 두었다.
중추원(추밀원)에서 밀직사로 바뀐 것은 단순히 명칭상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직능 및 인원에 커다란 차이를 수반하였다. 즉, 고려 전기에 중추원은 상층부인 추밀(樞密)이 의례(儀禮)와 궁중 서무 등을 주관하고 하층부의 승선(承宣)이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충렬왕대 이후 추밀은 군기지정(軍機之政)까지도 관장하게 되었다. 이로써 밀직사는 첨의부(僉議府)와 함께 실질적으로 양부(兩府)라 불릴 정도의 역할과 위상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재신(宰臣)과 함께 밀직이 양부의 구성원이 되며 재상(宰相)이 수적(數的)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변칙적인 내재추제(內宰樞制)가 생겨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