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宰相)들이 모여 변경의 군사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병마사제(兵馬使制)를 활용하여 도병마사(都兵馬使)라는 회의 기관을 설치하였다.
고려 후기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전신이다. 기원은 989년(성종 8)에 설치된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의 판사제(判事制)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서북면(西北面)과 동북면(東北面)에 파견된 병마사(兵馬使)를 중앙에서 지휘하기 위해 문하시중(門下侍中) · 중서령(中書令) · 상서령(尙書令)을 판사(判事)로 삼았다는 기록을 토대로 이 병마판사제(兵馬判事制)가 뒤의 도병마사의 연원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기록에 등장하는 중서령, 상서령은 989년 시점에서 설치되지 않은 관직이어서 기록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1010년(현종 1)과 1011년(현종 2)에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의 임명 사실이 보이고 1015년(현종 6) ‘도병마사주(都兵馬使奏)’라는 기사도 찾을 수 있어서 989년 인지는 불분명하나 성종(成宗)대에 도병마사제가 마련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구성은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 도평의사사조에 문종(文宗) 때의 관제로 명기되어 있다. 도병마사의 최고직인 판사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5재[五宰: 시중(侍中) · 평장사(平章事) · 참지정사(參知政事) · 정당문학(政堂文學) ·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구성되어 989년에 설치된 양계(兩界)의 병마판사였던 문하시중 · 중서령 · 상서령과 차이가 난다.
다음 사(使)는 6추밀(樞密) 및 직사 3품 이상이 임명되었는데, 이는 중추원(中樞院)의 추밀로 구성되었음을 표시한 것이다. 따라서 도병마사의 중요 임원인 판사와 사는 중서문하성의 재신(宰臣)과 중추원의 추밀, 즉 재추양부(宰樞兩府)로 충당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정 4품 이상 경(卿) · 감(監) · 시랑(侍郞)이 임명된 부사(副使)와 소경(少卿) 이하가 임명된 판관(判官)이 있었다. 이들 판관 이상이 도병마사에서 변경의 군사문제에 대한 회의에 참석하였다.
기능은 변경의 군사 문제를 의논해 결정하는 것이다. 양계에 있어서의 축성(築城) · 둔전(屯田) · 국경, 그리고 장졸(將卒)에 대한 상벌, 주(州) · 진민(鎭民)에 대한 진휼(賑恤) 등 변경 · 군사 · 대외 문제의 회의 기관의 구실을 하였다.
병부(兵部)나 양계의 병마사가 군공(軍功)에 대한 포상을 발의하면 도병마사가 이를 총괄 검토하여 국왕에게 상주(上奏) 하였다. 그래서 군공 포상도 도병마사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한편으로 주목되는 것은 민생문제에 관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처음 도병마사는 양계민(兩界民)의 생활문제를 의논하였다. 그러나 점차 준변경지방으로 확대되었고, 고려 중기에는 전국 인민(人民)의 기근과 빈곤을 구휼하는 방법까지 의논하는 등, 기능이 군사적인 문제에서 민사적인 문제로 차차 확대되어갔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武臣政變) 이후 한동안 도병마사의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무신들의 집권으로 정치 · 군사권이 집정부(執政府)와 중방(重房)에 귀속되어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종(高宗) 말년의 기록에 나타나는 도병마사는 이미 기능이 변질되고 있었다.
즉, 고종 말년에는 도병마사를 도당(都堂)이라 칭하고, 양부재추(兩府宰樞)들이 합좌해 국가의 대사를 회의, 결정하고 있었다. 종래에는 재추가 판사 · 사에 임명되고, 부사 · 판관도 회의원을 구성했는데, 이제는 부사 · 판관은 없어지고 양부재추의 전원만 합좌 회의하게 되었다. 기능도 전기에는 국방 및 군사 관계에 한정되었는데, 고종 이후 국사(國事) 전반에 걸쳐 확대되었다. 이러한 변질은 도병마사를 도평의사사로 개칭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1279년(충렬왕 5) 도병마사를 도평의사사로 바꾸었다. 도병마사가 국방에 관한 것뿐 아니라 국사 전반에 걸친 문제를 회의하고, 재추 전원에 의한 도당으로 변질된 이상, 종래의 명칭은 그에 알맞은 도평의사사의 명칭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원래 고려는 1275년(충렬왕 1) 원(元) 나라의 간섭으로 모든 관제를 개편하고 관직명을 바꾸었다. 그러나 도병마사만은 그대로 존속하다가 4년 뒤인 1279년에 가서야 도평의사사로 개칭되었다. 이는 도병마사가 고려의 독특한 기구이므로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 개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도병마사의 개칭은 그것이 원나라에 대해 참월(僭越)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려 자신의 필요에서 실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도병마사를 도평의사사로 개칭한 것은 구성과 기능의 확대에 따른 결과였다.
이리하여 도병마사의 후신인 도평의사사는 재신으로 임명된 판사와 추신(樞臣)으로 임명된 사가 국가의 대사를 회의하는 재추양부의 합좌 기관이 되었다. 그리고 종래에는 때에 따라 열리는 수시적인 회의 기관이었으나, 이제는 언제나 회의하는 상설기관으로 바뀌었다. 또한, 지금까지는 국방 · 군사 문제만 관계했으나, 이제는 국가의 모든 중대사를 회의해 결정하는 기관으로 변질되었다.
도평의사사는 고려 후기로 갈수록 구성과 기능이 더욱 확대되었다. 구성은 재추뿐 아니라 전곡(錢穀)의 출납을 회계하는 삼사(三司)의 요원도 포함되게 되었다. 또 정식 직사자(職事者)는 아니지만 재상으로 국정에 참의하는 상의(商議)까지도 합하게 되었다. 고려 후기는 양부의 재추 수도 증가해 회의원의 수는 50∼60인에서 70∼80인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기능도 확충되어 지금까지는 중요한 국사를 회의하는 의정 기관에 지나지 않았으나, 고려 후기에는 결정된 사항을 시행하는 행정기관의 기능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중앙 여러 관청을 총령(總領)하고, 지방의 제도안렴사(諸道按廉使)에게 직첩하는 명실공히 일원적인 중앙 최고기관이 되었다. 이것은 고려 국정의 중심이 전기의 중서문하성에서 후기의 도평의사사로 옮겨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려사』 백관지는 도병마사(도평의사사)를 중앙관서 끝에 주기(註記)로 쓴 제사도감각색조(諸司都監各色條)에 편입해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사』 편찬자가 도병마사를 낮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백관지 서문(序文)에는 “도감각색(都監各色)은 국사에 따라 설치해 일이 끝나면 파하기도 하고 그대로 두기도 했는데, 그 명호는 거의 무신들이 마음대로 정해 천하고 속되지만, 여기서는 모두 부록한다.”라고 한 것이 이를 나타낸다.
도병마사의 후신인 도평의사사가 고려 후기의 최고정무기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록형식의 제사도감각색조에 편입, 서술했다는 것은 『고려사』 편찬자들의 고려시대 이해 부족에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 → 도평의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