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는 고려 전기에 있었던 도병마사(都兵馬使)의 후신(後身)으로 일명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 도병마사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중추원(中樞院)의 양부(兩府)에서 임명된 판사(判事)와 사(使), 부사(副使), 판관(判官)으로 구성되어 양계(兩界)의 국방 · 군사 문제만을 논의하던, 임시 회의 기관이었다.
그런데 고려 중기에는 변경뿐만 아니라 전국 인민(人民)의 가난을 구휼(救恤)하는 방법까지 의논하기도 하면서 그 기능이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고종(高宗) 말년에는 도당이라 칭하고, 기존의 재신(宰臣), 추밀(樞密) 외에 삼사(三司), 재추(宰樞)의 상의(商議)까지 포함하여 군사 문제 외에 국가의 중대사까지 의논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아마도 몽골과 전쟁을 오래 하면서 도병마사의 운영 방식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이해된다.
1279년(충렬왕 5)에 도병마사는 도평의사사로 개편되어 구성과 기능이 더욱 확대 · 강화되었다. 즉, 그 구성에는 재추 이외의 삼사 요원뿐만 아니라 정식 직사자(職事者)는 아니지만 재상(宰相)으로 국정에 참여하는 상의까지도 포함되어 있으며, 고려 말에는 그 수가 70∼80인에 이르렀다. 1279년의 조치는 고종 대 말부터 나타난 운영상의 변화를 공식화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병권(兵權)의 장악과 관련한 도병마사의 존재를 몽골이 꺼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감안하여 차제(此際)에 국가의 정무를 평의(評議)한다는 의미로 도평의사사라는 명칭으로 개편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후 도평의사사는 임시 기구가 아니라 상설 기관이 된 셈이다.
고려의 도평의사사는 조선 건국 후에도 영향을 주어 1392년(태조 1) 7월에 개정된 도평의사사의 직제(職制)는 고려 말의 것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1400년(정종 2) 도평의사사가 의정부(議政府)로 개칭되고, 이듬 해 1401년(태종 1) 문하부(門下府)를 통합해 백규 서무(百揆庶務)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의 도평의사사는 소멸되었다.
기능 면에서는 종전과 같은 임시 회의 기관이 아니라, 상설화되어 국정을 합좌(合坐)해서 회의를 할 뿐만 아니라 국가 서무를 직접 시행하는 행정기관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고려 후기에 도평의사사는 중앙의 여러 관청을 총령(總領)하고, 지방의 제도안렴사(諸道按廉使)에게 공문을 보내며, 또 왕지(王旨)까지도 이를 경유해 시행하게 되어 명실공히 중앙의 최고 기구가 되었다.
이와 같이 도평의사사의 기능이 확대되자 자연히 행정 사무를 담당하는 실무원이 필요해져 여러 차례에 걸쳐 행정기관의 신설과 확충이 뒤따랐다. 그 결과 고려 말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상부(上部)의 회의 기구로서 문하부 · 삼사 · 밀직(密直)의 정원으로만 구성된 판사 · 동판사(同判事) · 사가 있었다.
하부(下部)의 실무 기구로는 경력사(經歷司)가 설치되어 3, 4품의 경력(經歷) 1인과 5, 6품의 도사(都事) 1인이 그 아래의 6방녹사(六房錄事)와 전리(典吏)를 통솔하게 되었다. 이로써 도평의사사는 완전한 행정 기구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