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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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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 · 고려 · 조선시대에 둔전병(屯田兵)이 주둔하던 군사적 지방행정구역(특별행정구역).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진(鎭)은 신라 말·고려·조선시대에 둔전병(屯田兵)이 주둔하던 군사적 지방행정구역이다. 신라 말에 말갈을 방어하기 위해 최초로 북진을 설치하였다. 이후 평산에 패강진, 완도에 청해진, 화성에 당성진, 강화도에 혈구진이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무장성곽도시 또는 지방행정구역으로 양계에 집중적으로 설치하여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원 간섭기에 소멸되었다가 공민왕 때에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많은 진을 설치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군사와 행정을 분리하는 과정에서 도절제사가 각 진을 통제하였으며 군익도(軍翼道) 체제를 거쳐 진관체제로 정비되었다.

목차
정의
신라 말 · 고려 · 조선시대에 둔전병(屯田兵)이 주둔하던 군사적 지방행정구역(특별행정구역).
내용
  1. 신라시대

신라 말기 최초의 진(鎭)북진(北鎭)말갈의 방어를 위한 동해안의 요새지로서 실직(悉直)에 설치되었다. 또한 패강진(浿江鎭)은 서해안 지대 방어와 황해도 지역 개발을 목적으로 782년(선덕왕 3) 평산(平山)에 설치되었다.

828년(흥덕왕 3) 장보고(張保皐) 주도로 해상군진(海上軍鎭)의 성격을 띤 청해진(淸海鎭)완도(莞島)에, 829년 당성진(唐城鎭)이 경기도 화성군 남양에, 846년(문성왕 6) 혈구진(穴口鎭)강화도에 설치되었다.

이들 진에는 그 지방에 토착하면서 둔전병이라 할 수 있는 항구적 지방군을 배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중에서 북진과 패강진은 궁예(弓裔)의 기간세력을 이루다가 왕건(王建)고려를 건국하자 당성진 · 혈구진과 함께 왕건의 휘하세력이 되었다.

고려 태조는 후백제를 견제하고 인근 지역 호족을 진정시키기 위해 충청남도에 예산진(禮山鎭)을, 신라를 감시하기 위해 경상북도에 일어진(昵於鎭 :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을 설치했는데, 이들 진에도 토착하는 주둔병을 파견하였다. 후삼국 통일 후 이들 진은 그 필요성이 없어져 자연히 소멸되었다.

2)고려시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남쪽의 진은 모두 없애고 북쪽의 거란 및 여진과의 경계지역에 설치하였다. 동북방면에 골암진(鶻巖鎭 :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 서북방면 청천강(淸川江) 일대에 통덕진(通德鎭:지금의 평안남도 숙천) 등 많은 진을 설치해 여진족 · 거란족을 위시한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이다. 이때 개정군(開定軍)이 배치되거나 중앙군(中央軍)이 교대로 변경을 지켰다. 동시에 사민(徙民)에 의해 진성(鎭城)을 충실히 하는 정책도 실시하였다.

993년(성종 12) 거란 소손녕(肅遜寧)의 제1차 침입 때 서희(徐熙)의 외교적 성과에 힘입어 흥화진(興化鎭)강동6주(江東六州)에 진을 설치해 압록강 하류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또한 1017년(예종 2) 윤관(尹瓘)의 여진 정벌에 의해 통태진(通泰鎭) 등 9성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고려의 진은 북진정책의 추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서해도(西海道)의 백령진(白翎鎭)을 제외하고는 모두 양계 지방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던 것이다. 진은 고려 역대의 북진정책에 따른 영토확장의 완결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진의 임무는 전략적으로 성을 굳게 지키면서 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진성단위로 견고하게 구축된 성을 그들 스스로 지키기만 하면 침입군은 후방에 깊이 들어갈 수 없으며, 설혹 진성을 방치한 채 들어갈 경우라도 오히려 후위의 차단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진장(鎭長)을 고려 태조 때에는 진두(鎭頭)라 불렀다. 이는 순전히 군사적 수장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서, 이때의 진이 군사적 거점임을 단적으로 나타내준다. 그러나 후대의 진이 행정구역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면서 일반적인 진에는 7품(品) 이상의 관원이 진장(鎭將)으로, 방어진(防禦鎭)에는 5품 이상의 관원이 방어진사(防禦鎭使)로 파견되었다. 이 방어진은 곧 양계의 주(州)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원나라의 간섭기간 동안 원나라에 의해 양계지역이 강제 합병되었다. 이로써 진의 존재가 우리 역사상에서 소멸한 적도 있었다. 1290년(충렬왕 16) 원나라가 서경(西京)에 설치했던 동녕부(東寧府)를 스스로 고려에 반환했는데, 이곳에 평양부(平壤府) 이외 주진(州鎭)의 명칭을 원래대로 환원하는 조치가 행해졌다.

동계(東界)의 경우 원나라에 의해 강제로 설치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1356년(공민왕 5)에 수복하면서 이 지역에 많은 진을 설치하였다. 이와 함께 공민왕 초에 왜구의 출현이 잦은 전라도에 18개를 비롯해 전국에 대략 50여 개의 수소(戍所)를 설치하였다. 진변별초(鎭邊別抄)라는 부류의 군인들에게 각 지역을 지키게 하였다.

  1. 조선시대

1390년(공양왕 2) 도절제사(都節制使)를 장(長)으로 했던 군사단위로서의 도(道)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397년(태조 6) 5월에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그 대신 각 도에 2∼4개의 진을 설치해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고 부근에 있는 군(郡)의 병마를 통괄하면서 도관찰사(都觀察使)의 감독을 받도록 하였다.

1398년 10월 다시 도가 설치되면서 도절제사가 고정된 영(營)을 이루고, 각 진의 통제는 도절제사에게 이양되었다. 이러한 영 · 진의 군사력을 모은 것이 바로 영진군(營鎭軍)으로, 이들은 주로 마병(馬兵)이었다. 이 밖에도 연안지대의 요새에 설치된 진에는 군관(軍官) · 정군(正軍) · 유방군(留防軍) · 진속군(鎭屬軍) · 패속군(牌屬軍) 등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후 영 · 진은 1415년(태종 15)경에 이르러 일단 정비가 마무리되었다가 약간의 변화를 겪은 채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재된 것이다. 1419년(세종 1)에는 군익도(軍翼道)체제가 전국적으로 확장되었으니, 즉 중요한 지역을 중심으로 중익(中翼) · 좌익(左翼) · 우익(右翼)의 편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2년 후 군익도체제는 진관체제(鎭管體制)로 바뀌었다. 이는 군사단위로서의 도가 행정구역상의 도와 혼동되는 복잡성을 없애주며, 요새지 혹은 군사기지로서의 거점적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즉 주진(主鎭) · 거진(巨鎭) · 제진(諸鎭)으로 편성해 상하관계를 명백히 밝히면서 진이라는 명칭은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의의와 평가

신라 말기 상업상의 필요에 의해 처음 설치되었던 진은 고려시대에는 무장성곽도시 또는 지방행정구역으로 존재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순수한 군사적 거점의 성격으로 축소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시대상의 발전에 순응해 군사 · 행정의 점진적인 분리를 시도한 것으로, 제도상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한국군제사(韓國軍制史)-근세조선전기편(近世朝鮮前期篇)-』(육군본부, 1968)
「신라하대(新羅下代)의 패강진(浿江鎭)」(이기동, 『신라골품제사회(新羅骨品制社會)와 화랑도(花郎徒)』, 일조각, 1984)
「고려양계(高麗兩界)의 지배조직(支配組織)」(변태섭, 『고려정치제도사연구(高麗政治制度史硏究)』, 일조각, 1971)
「고려태조시(高麗太祖時)의 진(鎭)」(이기백, 『고려병제사연구(高麗兵制史硏究)』, 일조각, 1968)
「고려양계(高麗兩界)의 주진군(州鎭軍)」(이기백, 『고려병제사연구(高麗兵制史硏究)』, 일조각,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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