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서 군진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하대인데, 782년(선덕왕 3)에 패강진(浿江鎭)이, 828년(흥덕왕 3)에 청해진(淸海鎭)이, 829년(흥덕왕 4)에 당성진(唐城鎭)이, 844년(문성왕 6)에 혈구진(穴口鎭)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진은 우선 군사 기지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일정한 영역을 관할하여 행정구역을 이루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행정구역으로서의 당성진은 당항성(党項城)에서 기원하였다. 당항성에는 당나라로 가는 배가 출발하는 당은포(唐恩浦)가 있었는데, 그 인근에 성을 쌓아 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경덕왕 때 당성군(唐城郡)을 당은군(唐恩郡)으로 고쳤다고 되어 있는데, 신라본기에는 816년(헌덕왕 8)에 당은현으로 나타나 있다.
823년(헌덕왕 15)에 수성군(水城郡,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기안동)과 당은현을 합쳤으며, 829년(흥덕왕 4)에 당은군을 당성진으로 삼고 사찬 극정(極正)을 보내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것까지 고려하면 경덕왕 대에도 당은현이 수성군에 속한 현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당은현을 수성군에 병합하였다가 수성군에서 당은군을 분리해서 그것을 진으로 삼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당은군의 영현으로 차성현(車城縣)과 진위현(振威縣)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위치로 보아 수성군의 영현으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수성군에 당은현, 차성현, 진위현이 속해 있었다가 당은현만을 분리하여 군으로 승격시켜 당성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당성진의 폐지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858년(헌안왕 2)에는 당성군으로 나타나 있어 851년(문성왕 13)에 청해진의 혁파 이후 일반 군으로 환원된 것으로 보인다.
당성군은 고려 이후 몇 차례의 명칭 변경과 읍격(邑格) 승강을 거쳐 조선 초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가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양도호부 고적조에 고당성(古唐城)이 부 서쪽 20리(里, 1리=약 0.939㎞)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 있는 당성 유적으로, 1998년부터 한양대학교 박물관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과거에는 지금의 서신면과 북쪽 송산면의 경계를 따라서 바닷물이 들어와 있었다. 그 부근에 당나라로 가는 포구인 당은포가 있었을 것이고, 당성은 그 바로 남쪽에 있었다.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성은 삼국시대에 해발 159m의 구봉산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석축 산성(둘레 약 610m)으로 축조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구봉산 동북쪽 능선과 그 동남쪽 계곡부를 둘러싼, 포곡식의 토축 성벽이 부가되었다. 그 시점은 통일신라 후기로 추정되어 당성진의 설치와 관련될 가능성이 있으며, 고려 및 조선 시대 유물까지 출토되어 『동국여지승람』 단계에 ‘고적’으로 규정되기 전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성진의 기능과 관련해서는 먼저 그것이 828년(흥덕왕 3) 청해진을 설치한 이듬해인 829년(흥덕왕 4)에 두어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청해진이 실질적으로 장보고에 의해 운영된 해상 교통 및 군사 거점이었다고 한다면, 신라 조정에서는 전통적인 대당 교통 항구인 당은포와 그 일대를 군진으로 지정하여 강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15년 뒤인 844년(문성왕 6) 강화도에 혈구진을 설치한 것도 그 일대의 해상 및 해안 방위를 보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851년(문성왕 13)에 청해진을 폐지한 뒤에는 당성진, 혈구진 역시 폐지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능이 달라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다만 제도상 특수한 군진이 아닌 일반 군현의 형태로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