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직관지에서는 주의 장관이 군주(軍主)에서 661년(문무왕 1)에 총관(摠管)으로,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도독(都督)으로 개칭되었다고 하였다. 신라본기에서 실제 용례를 살펴보면, 주의 장관 군주는 대체로 656년(태종무열왕 3)까지 나타나며, 총관이라는 관직은 당나라의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문무왕 대부터 사용되고 있다.
삼국통일 전쟁기에는 중앙의 대당(大幢)과 상주정, (북)한산정, 우수정, 하서정, 하주정 등 육정(六停) 군단이 행군(行軍) 조직의 중추를 이루었는데 이때 복수의 총관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신문왕 대부터는 주의 장관으로 단수의 총관이 임명되는 사례들이 다시 나타난다. 한편 도독 칭호는 642년(선덕여왕 11)부터 나타나 경향성을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원성왕 대 이후에는 주의 장관으로 도독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용례에 대한 해석은 논자에 따라 다르다. 총관은 주의 장관이 아니라 당(幢) · 정(停)의 사령관을 가리키는 칭호였고 태종무열왕 대에 주의 장관을 군주에서 도독으로 고쳤다는 견해가 있다. 또 태종무열왕 대에 주의 장관을 도독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문무왕 대부터 698년(효소왕 7)까지 도독과 더불어 총관이라고 부르다가 성덕왕 대 이후에는 도독이라고만 불렀다는 견해 등이 제시되었다.
2004년 6월에 혜공왕 대에 제작된 사천 선진리비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신술 시 주총관 소간(神述時州總官蘇⼲)”이라는 구절이 있어 중대(中代)까지 총관이 주 장관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663년(문무왕 3) 무렵부터 주의 장관을 도독이라고 불렀고, 685년(신문왕 5)부터 총관 또는 도독이라고 부르다가 785년(원성왕 1)부터 오로지 도독이라고만 불렀을 것이라는 견해가 새롭게 제시되었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도독은 관등이 급찬(級飡)에서 이찬(伊湌) 사이인 사람을 임명한다고 되어 있다. 도독의 보좌관으로는 주조(州助)와 장사(長史) 각 1인이 있었다. 주조는 주보(州輔)라고도 하였는데 관등이 나마(奈麻)에서 중아찬(重阿湌) 사이인 자를 임명하였다. 장사는 사마(司馬)라고도 하였으며 관등이 사지(舍知)에서 대나마(大奈麻) 사이인 자를 임명하였다.
주조는 대체로 민정, 장사는 군정을 보좌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도독은 군정과 민정을 총괄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도독은 군정관으로서 주에 배치된 여러 군단을 관할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822년(헌덕왕 14), 김헌창의 난 때 주의 장관인 도독이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에 참여하거나 그에 대응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