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두품 계층이 대상이었으며 중아찬에서 4중아찬까지 존재했다.
신라의 국가와 사회체제는 골품제라는 신분질서하에서 편성되었고, 관등제는 진골귀족의 정치적 특권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운영되었다. 진골을 제외한 각 두품층은 자신들이 진출할 수 있는 관등의 상한선이 규정되어 있어 정치·사회적으로 차별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신분 간 마찰과 대립 등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는데, 국가가 마찰을 방지하고 제도적인 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는 특진제도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중위제(重位制)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경위 17관등 가운데 아찬(6관등), 대나마(10관등), 나마(11관등)에 설정된 것이 보인다. 아찬은 4중아찬까지, 대나마는 9중대나마까지, 나마는 7중나마까지 있었는데, 실제로 사료에서 확인되는 것은 아찬 중위에 한정되어 나타날 뿐이다.
중위제의 시행 시기는 전하지 않으며, 단지 법흥왕대 율령 반포 등 국가체제가 정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며, 신라 중대 이후의 일부 기록에서 인물들이 확인된다. 「감산사미륵보살조상기」(718)에 김지성(金志誠)이 중아찬, 원성왕 7년(791) 김언(金言)이 삼중아찬,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872)에 김견기(金堅其)가 중아간, 『속일본기』(714)에 김원정(金元靜)이 중아찬 관등을 지니고 있었다.
중위제가 아찬을 상한으로 한다는 점은 두품층(비진골신분)이 진골로 신분상승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것으로 골품제의 폐쇄성과 배타성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