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국가를 포함한 전통시대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도읍(都邑)의 외부에 구조물을 쌓았는데 이를 성곽(城郭)이라 했다. 성은 왕을 비롯한 지배층과 행정공간이 위치한 내성과 관료와 일반민이 거주하는 외성으로 구분되었다. 일반적으로 도읍을 둘러싼 성곽을 도성(都城)이라 했으며, 성은 내성을, 곽은 외성을 의미했다. 대체로 도성은 평지에 위치하였기에 주변에 나성(羅城)이 축조되었는데, 나성 내부지역은 바둑판 모양으로 나뉘고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이때의 도시 구획이 방 또는 리로 편제되었으므로 방리제라 하고, 양자를 상하관계 또는 병렬관계로 보기도 하는데, 전자가 일반적 견해이며 리(상)-방(하)의 구조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자비왕 12년(469) 정월에 “서울의 방리명을 정하였다(定京都坊里名)”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5~6세기 무렵 부터 왕경의 도시계획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동서와 남북으로 직선도로를 구획하고 담장으로 둘러친 구역을 방이라 칭한 시기는 당대(唐代)이므로, 신라가 방리제를 도입하고 시행한 시기는 김춘추가 대당교섭을 전개하며 적극적으로 문물도입을 추진한 7세기 중반 무렵 이후일 것으로 추측된다.
방리제의 시행은 건축공간의 체계화인 동시에 통치규범에 입각한 체제의 정비라는 점에서 고대 율령제적 지배질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