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진(仇珍)은 『삼국사기』 「거칠부전」 진흥왕 12년(551) 조에 "구진(仇珍) 대각찬(大角飡)"으로 나오며, 561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에 보이는 "한지▨▨(漢只▨▨) 굴진지(屈珎智) 대일벌간(大一伐干)"을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대각찬과 대일벌간은 모두 대각간(大角干)의 다른 표기로, 신라 17등 관등 중 제1위인 각간(角干) 위에 설정된 비상설(非常設) 관등이다.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는 660년(태종무열왕 7)에 백제를 멸망하게 한 공로로 김유신(金庾信)에게 처음 준 관등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 사례를 통해 그전부터 수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고위 관등 보유자로서는 이례적으로 한지벌부(漢只伐部), 즉 한기부(漢岐部) 소속일 가능성이 있으며, 적어도 551년(진흥왕 12)부터 561년(진흥왕 22)까지 대각간의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거칠부전」에 551년(진흥왕 12) 왕이 거칠부와 구진 대각찬, 비태(比台) 각찬,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잡찬,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파진찬, 비차부(比次夫) 대아찬, 미진부(未珍夫) 아찬 등 8명의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고 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같은 해 백제 성왕이 신라군과 함께 고구려의 한강 하류 거점인 한성(漢城)과 (남)평양(平壤)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또 「거칠부전」에 따르면, 신라는 그 승세를 타고 죽령(竹嶺)에서 고현(高峴)까지 10군(郡)을 취하였다. 여기에서 죽령은 현재의 죽령이며, 고현에 관해서는 임진강 방면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었지만, 북한강 최상류의 철령(鐵嶺)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랬을 때 10군은 후대에 삭주(朔州)로 편제되는 남한강 유역의 내제군(奈堤郡), 북원경(北原京) 및 북한강 유역의 군들로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552년(진흥왕 13) 백제가 고구려와 신라의 화친으로 인하여 한성과 남평양, 즉 한강 하류역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으며, 신라가 이 지역까지 점령하여 553년(진흥왕 14) 한강 유역 전체를 신주(新州)로 편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