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주 ()

고대사
제도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설정한 9개의 지방 광역(廣域) 행정구역.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685년(신문왕 5)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구주(九州)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설정한 9개의 지방 광역(廣域) 행정구역이다. 신라에서 주제(州制)는 6세기 중엽에 성립하여 삼국 통일 직전에 6주가 되었고, 삼국통일을 이룬 뒤 옛 백제 지역에 3개 주를 설치하면서 9주를 갖추었다. 구주는 하나의 천하(天下)를 상징하는 것으로 삼국을 통일하여[一統三韓] 하나의 천하를 이루었다는 인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설정한 9개의 지방 광역(廣域) 행정구역.
주제(州制) 및 9주의 형성 과정

신라는 중국의 지방 제도인 군현제(郡縣制)를 참고하여 주(州) · 군(郡) · 현(縣)의 3단계 행정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라 중고기(中古期) 때의 지방 제도는 주군제(州郡制)라고 하는데, 삼국통일기의 군현제에 대하여 아직 현제(縣制)를 채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주와 군의 제도를 병렬적으로 본 것이었다. 최근에는 주제(州制)와 군 이하의 제도를 분리해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라 중고기 때 주는 군주(軍主)가 이끄는 지방 주둔 군단(軍團)인 정(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505년(지증왕 6)에 실직주(悉直州, 지금의 삼척)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실직에 정을 설치한 것을 말한 것이다. 또 525년(법흥왕 12)에는 사벌(沙伐, 지금의 상주)에도 정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6세기 중엽 진흥왕 대가 되면 상주(上州), 하주(下州)와 같은 주가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광역 구역으로서의 주인데, 주마다 하나의 정이 배치되어 주가 정의 관할 구역이 되고 정은 주의 중심지, 즉 주를 다스리는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주와 하주는 당시 신라의 영역을 대체로 팔공산 줄기를 따라 상하로 나눈 것이며, 이밖에 동해안 방면이 하나의 광역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신라가 고구려,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그 지역을 신주(新州)로 편제하였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561, 이하 창녕비)에서는 사방군주(四方軍主)의 주둔지, 즉 4개의 정과 각 군단의 관할 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4개의 광역 구역(상주, 하주, 신주, 동해안 방면)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별도로 행사대등(行仕大等) 각 2인이 파견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행사대등의 기능에 대해서는 행정 장관으로 보는 견해와 감찰관으로 보는 견해 등이 제시되었다. 정은 전략적인 필요에 따라서 종종 이동하였지만, 광역 구역의 범위는 대체로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정 및 주의 숫자는 사방군주 단계의 4개에서 637년(선덕여왕 6)에 우수주(牛首州, 지금의 춘천)를 설치하면서 5개가 되었다. 이때 신주는 두 개로 쪼개져 각각 정의 소재지, 즉 주치(州治)에 따라 북한산주(北漢山州, 지금의 서울 광진)와 우수주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또 당시 동해안 방면은 달홀주(達忽州, 지금의 북한 고성)였을 가능성이 큰데, 각각은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의 전신으로 이른바 옛 고구려 영역의 3주는 637년에 이미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 된다.

영남 지역은 여전히 상주와 하주로 구분되어 있었다. 상주의 정은 사벌, 감문(甘文, 지금의 김천 개령)에서 614년(진평왕 36)에 일선(一善,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으로 이전하였고, 하주의 정은 비사벌(比斯伐, 지금의 창녕)에서 565년(진흥왕 26)에 대야(大耶, 지금의 합천)로 갔다가 642년(선덕여왕 11)에 대야성이 함락된 이후 압량(押梁, 지금의 경산)에 머무르게 되었다.

신라가 다시 낙동강 서쪽의 대야로 주치를 옮긴 것은 백제를 멸망시킨 660년(태종무열왕 7)의 이듬해인 661년(문무왕 1)이었다. 그후 서부 경남 지역에서 백제 반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663년(문무왕 3)에 주치를 거열(居列, 지금의 거창)로 옮겼다. 665년(문무왕 5)에 하주의 영역을 삽량주(歃良州, 지금의 양산)와 거열주로 분할하였는데, 마침내 영남에서도 주치에 따라 삽량주, 거열주, 일선주로 지칭하게 되었을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웅진도독부 지역을 점령하면서 옛 백제 지역에 소부리주(所夫里州, 지금의 부여)를 설치하고, 남쪽에는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를 두었다. 또 보덕국의 반란을 진압한 이듬해인 685년(신문왕 5)에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를 설치하였다. 이 지역은 신라가 거열주에서 진출하여 확보했는데 거열주의 영역을 완산주와 청주(菁州)로 분할함으로써 9주가 갖추어졌다.

통일기 9주의 구조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685년(신문왕 5)에 9주를 완비하였고, 686년과 687년에는 몇몇 주치를 이전하여 확정하였다. 757년(경덕왕 16)에는 주(州), 소경(小京), 군(郡), 현(縣)의 명칭을 한식(漢式)으로 고쳤다. 사벌주(沙伐州)는 상주(尙州, 지금의 상주)로, 삽량주는 양주(良州, 지금의 양산)로, 청주는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로, 한산주(漢山州)는 한주(漢州, 지금의 하남)로, 수약주(首若州)는 삭주(朔州, 지금의 춘천)로, 하서주(河西州)는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로, 웅천주(熊川州)는 웅주(熊州, 지금의 공주)로, 완산주는 전주(全州, 지금의 전주)로, 무진주는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로 이름을 고쳤다.

『삼국사기』 지리지 서문에서는 본국(신라) 경계 내에 3주, 고구려 남쪽 영토 내에 3주, 백제 영토 내에 3주를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삼한(三韓, 이때에는 삼국을 의미)을 통합하여 9주, 즉 하나의 천하(天下)를 이루게 되었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9주를 완비하면서 군현제(郡縣制) 또한 정비하였다. 먼저 왕도(王都)를 제외한 전국을 9주로 나누었으며(1단계: 주급), 각 주는 경우에 따라서 소경과 10여 개의 군을 거느리고 있었다(2단계: 군급). 이때 주의 중심이 되는 군은 없었는데 예컨대 상주의 중심이 되는 군급 행정구역은 그냥 상주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와 군은 다시 현을 거느리고 있었는데(3단계: 현급), 이 경우에도 중심이 되는 현은 없었고 그냥 같은 이름의 주 · 군으로 불렀다.

통일기의 주치는 단순히 정의 소재지가 아닌 지방 도시의 형태로 되어 있었다. 즉 평지에 왕도와 같은 격자형 시가지가 조성되었는데, 사벌주(상주로 개칭)의 주치였던 현 상주시의 경우 지적도와 항공 사진에서 그러한 구획을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복룡동에서는 구획 내의 통일신라시대 생활 유적이 조사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통일 직후 주치에 성을 새로 축조한 기록들이 보인다. 평지 시가지를 둘러싼 나성(羅城)의 형태가 아니라 인근 산에 있는 산성의 형태로 파악되며 주치 거주민의 피난성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의 지방관과 기능

『삼국사기』 직관지에서는 661년(문무왕 1)에 주의 장관이 군주에서 총관(摠管)으로,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도독(都督)으로 개칭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본기를 보면 주의 장관인 군주는 대체로 656년(태종무열왕 3)까지 나타나며, 총관이라는 관직은 당나라의 것을 제외하면 문무왕 대부터 사용되고 있다.

통일 전쟁기에는 중앙의 대당(大幢)과 상주정, (북)한산정, 우수정, 하서정, 하주정 등 6정(停) 군단이 행군(行軍) 조직의 중추를 이루었는데 이때 복수의 총관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신문왕 대부터 주의 장관으로 단수의 총관이 임명되었으며, 주의 장관을 총관이라고 한 사례는 혜공왕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천 선진리비」에서도 확인된다.

신라본기에서 도독 칭호가 나타난 것은 642년(선덕여왕 11)부터 나타나 경향성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원성왕 대 이후에는 도독만 나타나고 있다. 대체로 문무왕 대부터 주의 장관을 도독이라고 불렀고, 신문왕 5년(685)부터 총관이라고도 하다가 785년(원성왕 1)부터 오로지 도독이라고만 불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독의 보좌관으로는 주조[州助, 주보(州輔)라고도 함]장사[長史, 하마(司馬)라고도 함]가 파견되었는데, 주조는 관등이 나마(奈麻)에서 중아찬(重阿飡)까지인 자를, 장사는 사지(舍知)에서 대나마(大奈麻)에 이르는 자를 임명하였다. 주조가 주로 민정을 보좌하고, 장사가 군정을 보좌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673년(문무왕 13)에는 주에 2인, 군에 1인의 외사정(外司正)을 파견하여, 지방관을 감찰하도록 하였다.

주의 장관인 총관 혹은 도독은 주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기에 지방에는 10정 군단이 주둔하였는데, 각 주에 1개씩, 한주에는 2개를 두었다. 이들은 주치가 아닌 주변 현에 배치되었는데, 주 장관의 지휘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9주에는 비금당(緋衿幢), 사자금당(師子衿幢), 만보당(萬步幢)이 배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역시 도독의 관할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 822년(헌덕왕 14) ' 김헌창의 난' 때 주의 장관인 도독이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에 참여하거나 그에 대응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인력을 징발하고 조세를 수취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군 · 현에서 이루어졌겠지만, 중간 단위인 주는 그것을 지휘하고 감독하였을 것이다. 특히 군 · 현에서 수취한 물품은 주 내외에서 필요로 하는 곳이나 중앙으로 운송하는 것을 관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사신의 접대와 환송, 표류민의 송환 등 외국과 관련된 사항 역시 주에서 처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신라에서 주는 6세기 중엽에 일종의 광역 군 관할 구역으로 시작하여 통일기에 광역 행정구역으로 정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하기 전에 이미 그 수가 6개 주로 늘어났고, 백제를 멸망시킨 뒤 3개 주를 더 설치하여 9주를 완비하였다.

9주는 하나의 천하를 의미하기도 하고, 삼국을 통일하여 하나의 천하를 이루었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신라의 주와 유사한 것으로는 백제의 5방(方)이 있으며, 통일신라의 광역 행정구역은 고려시대 계수관(界首官)의 계(界)나 도(道) 제도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단행본

주보돈, 『신라 지방통치체제의 변화과정과 촌락』(신서원, 1998)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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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재, 「통일신라 주 · 군 · 현의 기능과 운영」(『역사문화연구』 79,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21)
박성현, 「삼국통일 후 신라의 지방 제도, 얼마나 달라졌나?」(『역사비평』 127, 역사비평사, 2019)
박성현, 「신라 통일기 주 · 소경의 성곽과 그 활용: 한산주와 국원소경을 중심으로」(『한국성곽학보』 21, 한국성곽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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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우, 「통일신라시대의 지방도시에 대한 연구」(『백제연구』 18,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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