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수관(界首官)의 ‘계(界)’는 일정한 권역을 나타내며, ‘수(首)’는 그중 가장 격이 높은 존재를 말한다. 이에 계수관은 크게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지방의 행정 구획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역의 거점이 되는 대읍(大邑)을 가리켰다. 관호(官號)가 경(京) · 목(牧) · 도호부(都護府)인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한편 계수관은 여러 군현의 외관을 거느리는 대읍의 외관(外官)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계수관의 구성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 곧 고려 군현제(郡縣制)는 외관이 설치된 진(鎭)과 현령관(縣令官) 이상의 관부와 외관이 설치되지 않은 속현(屬縣)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지는 이중 구조이며, 군현 지배의 본질적인 부분인 조세와 역역(力役) 수취를 담당하는 진장과 현령관 이상의 관부가 모두 계수관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계수관은 해당 권역에 다수의 관부를 전제(全制)하기 때문에 일반 외관이 계수관이 될 수는 없다는 비판도 있다.
계수관은 보통 많은 인구와 넓은 영역을 가진 대읍으로서 해당 권역의 교통, 경제,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만큼 대읍으로서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계수관 제도는 고려에서 수립되었지만, 그 연원은 신라의 구주(九州)로 올라간다. 신라의 주(州)는 전국을 9개의 광역권으로 구분하는 동시에 해당 권역에서 가장 높은 격을 가진 군현이었다. 이 주는 상서물을 진상하거나 이상 현상을 보고하였고, 그 장관인 도독(都督)은 관내의 태수(太守)와 현령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그리고 군사 및 역역 동원은 군 단위를 기반으로 하여 주 단위로 확대 운영되었다. 이러한 가능은 고려의 계수관에서도 확인되는 것들이다.
고려는 983년(성종 2) 십이목(十二牧)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외관을 파견하였다. 십이목은 구주의 이념과 기능을 계승한 것으로서 천하의 확대를 표상하였다. 이들은 지방 행정을 담당하던 향리(鄕吏)들에 대한 감찰과 천거 등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계수관은 1018년(현종 9) 지방 제도 개편을 통해 제도적으로 확립되었으며, 당시 구성은 양경(兩京) · 사도호(四都護) · 팔목(八牧)으로 되어 있다. 양경은 고구려의 구도(舊都)인 서경(西京)과 신라의 구도인 동경(東京)을 말한다. 도호부(都護府)는 원래 안북(安北) · 안변(安邊) · 안서(安西) · 안남(安南) · 안동(安東) 등 5개가 있었으나 안동도호부가 폐지되면서 4개가 남았고, 이후 안남도호부마저 폐지되어 3개가 되었다. 팔목은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서 1018년 당시 광주(廣州) · 충주 · 청주 · 나주 · 상주 · 진주 · 해주 등 7개만 확인되며, 도호부였던 전주가 나중에 목이 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는 정기적으로 안찰사(按察使)를 파견하여 수령을 감찰하였다. 아울러 필요에 따라 다양한 사신을 파견하여 지배를 관철하였다. 이처럼 고려의 지방 제도는 대읍을 중심으로 형성된 몇 개의 큰 단위, 곧 계수관을 기축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계수관 중심 체계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계수관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이 관할하는 영역의 대표로서 주요 의례를 수행하는 것이다. 팔관회(八關會)나 국왕의 탄신일 등 국가의 주요 행사에 표(表)를 올려 축하하거나 왕이 죽으면 관리들을 이끌고 애도 행사를 가졌다. 또한 지역의 특산물을 정기적으로 바치거나 상서로운 물건이 생기면 이를 진상하였다. 관내에 사신(使臣)이 지나갈 경우 나가서 이를 접대하였고, 정부의 명을 받아 노인연(老人宴)이나 반승(飯僧: 승려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일) 행사를 주관하였다. 향공선상(鄕貢選上)이라 하여 관내에서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중앙으로 올려 보내는 일도 담당하였다.
다른 하나는 관내의 외관들을 관리 감독하는 상급 체계로서의 기능이다. 우선 관내의 군사 운영을 총괄하였다. 고려에서 지방군은 외관이 설치된 군현 단위의 군사도(軍事道)에 따라 정액(定額)이 정해져 있었고 이에 따라 차출되었다. 그런데 반란 진압이나 대규모 인력 동원이 필요한 사업에서는 계수관을 단위로 편성하였다.
이와 함께 사법 운영에서 계수관은 외관이 심리한 사건을 재심하는 상급심의 역할을 하였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계수관에는 감옥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관내에서 사용하는 도량형(度量衡) 기기에 대해 계수관이 검수하고 기준을 채운 것에 대해 인증서를 새겨 주었다. 수취 과정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았으나 정보 관리 차원에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계수관의 구성은 고려 전기에는 남경(南京)이 설치되는 정도의 변화만 있었으나 고려 후기에는 정치적 이유로 군현의 등급이 상승하면서 목이나 도호부 등 계수관 등급의 군현이 늘어났다. 이중 일부는 계수관이 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장 이른 사례로 의종(毅宗) 때 지주사(知州事)인 수주(樹州: 지금의 인천 부평)가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승격한 것인데 계수관은 아니었다. 원(元) 간섭기에는 지나치게 높아진 군현의 등급을 낮추기도 하였다.
한편 안찰사의 순찰 구역으로 수립된 오도(五道) 중에서 남부 지역은 몇 개의 계수관을 묶어 구역을 설정하였다. 양광도는 양주(남경)와 광주, 경상도는 경주(동경)와 상주,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에서 따온 명칭이다. 그런데 정치적 이유로 계수관의 위상에 변동이 생기면 도명도 함께 바뀌었다. 무신 집권기 동경의 반란으로 경주가 강등되면서 경상도가 한 때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로 개정된 것은 그 예이다. 이러한 사정은 조선에서도 자주 발생하여 도명의 변화가 빈번하였다.
고려의 계수관 제도는 모든 군현에 외관을 파견하지 못한 조건에서 지방 통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고려 후기에 외관이 늘어나면서 계수관 중심의 운영 체계도 흔들리게 되었고 대신 도의 기능이 점차 강화되었다. 조선에 들어가면 도와 군현이 직접 상하 행정 체계를 구성하면서 계수관은 도량형 관리와 같은 일부 기능만 수행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계수관은 고려 지방 제도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