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현은 고려·조선시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지방행정구역이다. 관내·임내·겸현(兼縣)·합속현(合屬縣)·부읍(附邑)·지현(支縣) 등으로 기록되었다. 고려 초기에 호족의 신분적 위계를 반영하여 대호족의 세력권을 주현으로, 그에 복속된 중소 호족의 세력권을 속현으로 개편하였다.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主縣)을 통해 중앙정부의 간접통치를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속현에 감무를 파견하거나 여러 속현을 합해 하나의 주현으로 개편하거나 속현을 주현의 직촌(直村)으로 만드는 등 속현을 정리하였다. 그 결과 주현으로 승격되거나 면으로 개편되어 17세기에 이르면 모두 소멸하였다.
속부(屬府) · 속읍(屬邑) · 속현(屬縣)의 총칭으로, 관내(管內) · 임내(任內) · 겸현(兼縣) · 합속현(合屬縣) · 부읍(附邑) · 지현(支縣) 등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主縣)과 구별되며, 행정체계상으로는 주현을 통해 중앙정부의 간접통치를 받았다.
발생 원인에 대한 학설로, 고려가 기존의 지방 호족들 사이의 세력관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대호족의 세력권을 주현으로, 그에 복속해 있던 중소 호족의 세력권을 속현으로 각각 개편하였다는 설명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의하면 주현과 속현의 관계는 단순히 행정적인 것이 아니라 호족간의 신분적 위계를 반영하는 것이며, 이와 같이 군현제의 편성이 신분적 질서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고려 군현제의 특징으로 설명된다.
이 밖에 전국의 군현 가운데 중심이 되는 대현(大縣)을 주현으로, 인근의 소현(小縣)들을 속현으로 삼아 통할하게 하였다는 견해와, 규모가 큰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해 작은 군현까지 아울러 통치하게 하였다는 견해, 그리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고려에 항거했던 지역에 지방관과 중앙군을 주둔시키고 그 주변의 군현들을 통제하도록 함으로써 속현이 발생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고려 초기에 처음 나타났으며, 고려시대 지방제도의 가장 큰 특징이 되기도 한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고려 전기에 주현이 130이었는데 비해 속현은 374로 훨씬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 지역별로는 경상도가 114로 가장 많고, 양광도 97, 전라도 87, 교주도 25, 서해도 17, 경기 13의 순으로 분포하였다.
한편, 동계에 17, 북계에 4가 있었으나, 모두 남도에 준하는 성격을 띤 남부지역에만 분포하였고 순수 변경지역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속현의 광범한 존재는 고려의 지방제도가 아직 미숙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1106년(예종 1)부터 속현에 감무(監務)를 파견해 주현으로 승격시키는 등 속현을 줄이기 위한 정책을 꾸준히 실시하였다. 그 결과 고려 말에 이르면 전국의 174군현에 감무가 파견되고, 속현도 약 160 정도로 감소하였다.
속현에 대한 정리 작업은 조선시대에 더욱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때에는 속현에 감무를 파견하는 것 이외에도 여러 속현을 합해 하나의 주현으로 개편하거나 속현을 주현의 직촌(直村)으로 만드는 방법 등이 사용되었다. 15세기 후반기에 이르면 72속현만이 남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되었으며, 이것도 점차 주현으로 승격되거나 면(面)으로 개편되어 17세기경에는 모두 소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