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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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지명
고려시대, 안찰사(按察使)가 파견된 5도(五道)의 하나로서, 지금의 황해도 일대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
지명/고지명
제정 시기
고려 문종 대 후반
폐지 시기
1395년(태조 4)
지역
지금의 황해도 일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서해도는 고려시대에 안찰사(按察使)가 파견된 5도(五道)의 하나로서, 지금의 황해도 일대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이다. 성종 때 시행된 10도(十道) 중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으며, 그중 서도(西道)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다. 관내에 계수관(界首官)으로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 해주(海州)와 황주목(黃州牧)이 있었으나 일찍부터 안찰사가 파견되면서 도(道)로 정착하여 5도가 성립하는 바탕이 되었다.

목차
정의
고려시대, 안찰사(按察使)가 파견된 5도(五道)의 하나로서, 지금의 황해도 일대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
위치

고려는 995년(성종 14)에 처음으로 10도를 설치한 이후, 현종 때 5도양계, 즉 양광도(楊廣道) · 경상도(慶尙道) · 전라도(全羅道) · 교주도(交州道) · 서해도(西海道)와 동계(東界) · 서계(西界)로 개편하였다. 이 중 양광도는 지금의 경기도충청도 일대, 서해도는 지금의 황해도 일대에 해당한다.

형성 및 변천

고려시대에 지방 관리를 감찰하고 백성의 상황을 살피는 안찰사(按察使)가 파견된 5도(五道) 가운데 하나이다. 7세기에 개성(開城)과 우봉(牛峯: 지금의 금천) 지역을 확보한 신라는 성덕왕 때 대동강 이남의 영유권을 확보한 뒤 영토를 개척하였고, 이를 관할하는 관청으로 패강진(浿江鎭)을 두었다. 그리고 태봉(泰封) 때 지금의 황해도 서부 지역을 개척하여 패서(浿西) 13 진(鎭)을 새로 설치하였다. 이 지역은 신라 말 고려 초에 ‘패서’ 또는 ‘ 패서도(浿西道)’로 지칭되었다.

995년(성종 14)에 전국을 10도(十道)로 편성할 때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다. 이 중 해주(海州)와 황주(黃州)가 관할하는 지역을 서도(西道)라 하였으며, 중앙에 직속된 경기(京畿), 양주(楊州), 광주(廣州) 등이 관할하는 동도(東道)와 구분되었다.

1018년(현종 9)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계수관(界首官)이 설치되었을 때 해주는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가 되었고, 황주는 목관(牧官)이 되었다. 관내 서도는 개경을 보호하는 기능을 가진 탓에 이른 시기부터 하나의 단위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10도가 폐지된 뒤에도 존속하였다.

일시적으로 패서도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나 본래 10도에서 북계(北界)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에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다시 서해도로 고쳤다. ‘서해도’라는 명칭은 1093년(선종 10)에 서해도 안찰사 사례에서 처음 확인되어 문종 후반에 개정된 것으로 짐작된다.

서해도에 가장 먼저 안찰사가 파견되었고, 이를 토대로 남도 지역에도 안찰사가 파견되면서 5도가 수립되었다. 남도 지역이 관내 계수관의 이름을 따서 도명(道名)을 정한 것과 달리 서해도는 기존 도명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조선에서 비로소 계수관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되었는데, 1395년(태조 4)에 풍해도(豊海道)로 부르다가 1417년(태종 17)에 황해도(黃海道)로 고쳤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변태섭, 『고려정치제도사연구』(일조각, 1977)

논문

윤경진, 「고려 안찰사의 연원과 ‘오도안찰사’의 성립」(『한국문화』 61,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13)
윤경진, 「고려전기 도의 다원적 편성과 5도의 성립」(『동방학지』 135,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6)
변태섭, 「고려안찰사고」(『역사학보』 40, 역사학회, 1968)
집필자
윤경진(경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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