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삼국통일을 달성한 뒤 패강(浿江: 예성강 혹은 대동강) 유역의 고구려 옛 땅을 점유하고 있었다. 735년(성덕왕 34)에 당나라로부터 정식으로 이에 대한 영유권을 공인받게 되면서 이 지방의 개척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748년(경덕왕 7)에는 예성강(禮成江) 이북에 대곡성(大谷城) 이하 14군현(郡縣)을 두었고, 762년에는 오곡성(五谷城) 이하 6성을 수축하여 태수(太守)를 두었다. 이 지역에 군현 설치 후 다시 6성을 설치한 것은 발해(渤海)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782년 선덕왕(宣德王)이 패강 남쪽 주 · 군(州郡)을 안무(按撫)하는 등 일련의 준비 작업이 끝난 뒤 782년(선덕왕 3)에 현재의 황해도 평산에 패강진(浿江鎭)을 설치하여 예성강 이북의 땅을 군정(軍政) 방식으로 통치하도록 하였다. 패강 지역은 패강진을 중심으로 하여 군사적 성격이 강한 하나의 독자적 광역권으로 묶여져, 한주(漢州)와 구분되는 특수구역으로 편제되었으며, 822(헌덕왕 14)에 김헌창(金憲昌)의 난(亂)이 일어났을 때에는 거병자수(擧兵自守)하기도 했다.
한편 헌덕왕(憲德王) 때에 패강진의 관할 지역은 더욱 북쪽으로 확대되어 취성군(取城郡) 및 그 영현(領縣) 셋을 신설, 이윽고 대동강(大同江) 남안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10군현에서 다시 14개 군현이 증치(增置)되면서 그 관할범위가 늘어났으며, 그 이후 다시 재령강(載寧江) 이서의 평야지대에 12개의 군현이 추가 증치되어 26개의 군현을 거느리는 거대한 광역권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9세기 후반경에는 패강진의 편제 및 운영체계도 새롭게 재편되었다. 패강진은 바로 이 지역의 군정을 맡은 패강진전(浿江鎭典)의 본영(本營)에 해당하였다. 패강진전에는 장관인 두상대감(頭上大監) 1인을 비롯하여 대감(大監) 7인, 두상제감(頭上弟監) 1인, 제감(弟監) 1인, 보감(步監) 1인, 소감(少監) 6인을 두었다.
신라 하대(下代)의 진(鎭)들은 대부분 군사적 거점으로 설치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유독 패강진만이 10∼26개의 군현을 관할하는 광역의 군사적 특수구역으로 편제되었다. 또한 다른 진들의 경우 조직체계에 관한 기록이 전혀 전해지지 않는데 반해 패강진의 경우에는 패강진을 관장하는 외관직제(外官職制)의 조직체계가 전해지고 있어 다른 진들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