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덕왕 ()

경주 신라 헌덕왕릉 좌측면
경주 신라 헌덕왕릉 좌측면
고대사
인물
통일신라의 제41대(재위: 809년~826년) 왕.
이칭
이칭
언승(彦昇), 김언승(金彦昇)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826년(헌덕왕 18)
본관
경주
출생지
신라
주요 관직
신라 제41대 국왕(재위: 809∼826년)
관련 사건
제공(悌恭)의 난|김헌창(金憲昌)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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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헌덕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09~826년이다. 할아버지인 원성왕 대부터 주요 관직을 거치면서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형인 소성왕이 즉위 2년 만에 죽고 어린 조카 애장왕이 즉위하자 섭정을 하다가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관제개혁을 통해 왕권강화를 도모했고, 불사를 금하여 귀족세력을 억압했으며, 일가가 정치권력을 독점하자 반발한 구귀족들이 김헌창의 난을 일으켰다. 819년에 당의 요청으로 군사 3만을 보내 절도사의 반란진압을 도왔고, 826년에는 패강에 300리 장성을 쌓았다.

정의
통일신라의 제41대(재위: 809년~826년) 왕.
개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언승(彦昇)이다. 소성왕(昭聖王)의 동생으로, 아버지는 원성왕(元聖王)의 큰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인겸(仁謙)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이다. 할머니는 각간(角干) 신술(神述)의 딸 숙정부인(淑貞夫人) 김씨이며, 비는 숙부인 각간 예영(禮英)의 딸 귀승부인(貴勝夫人) 김씨이다.

헌덕왕은 관제개혁(官制改革)을 통해 왕권강화를 도모하였고, 불사(佛事)를 금하여 귀족세력을 억압하였으며, 일가를 통해 정치권력을 독점했으므로 구 귀족들의 반발을 낳아 김헌창(金憲昌)의 반란을 야기시켰다.

생애 / 활동사항

790년(원성왕 6)에 대아찬(大阿飡)을 제수받아 중국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다음 해에는 제공(悌恭)의 난(亂)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잡찬(迊飡)이 되었다. 794년 시중(侍中)에 임명되었고, 그 다음 해에 이찬(伊飡)으로서 재상(宰相)이 되었다. 그리고 796년에는 병부령(兵部令)을 제수받았다.

그는 이미 원성왕 말년에 정치적인 기반을 확고하게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세력 기반이 애장왕(哀莊王)의 즉위와 함께 그를 섭정(攝政)의 지위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애장왕대 그의 세력은 대단해 집안이 당나라의 조정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801년에 어룡성(御龍省)의 장관인 사신(私臣)이 되었고, 이어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 애장왕대에는 정치 개혁이 시도되었다. 805년 ‘공식 20여조(公式二十餘條)’가 반포됨에 따라 다음 해에는 불사를 금하였다. 그리고 808년에는 군(郡) · 읍(邑)의 경계를 정하는 조처를 내렸다.

이러한 개혁은 대체로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다만 이러한 개혁의 주도자가 언승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애장왕대 최고의 실력자였고 또 뜻을 같이하는 수종(秀宗)이 시중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때의 관제개혁은 그 목적이 애장왕의 왕권 강화라기보다는 김언승과 그 일가의 권력집중을 위한 것이었다. 상대등에 있었던 언승은 왕에 버금갈만한 정치적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추정은 설득력이 있다.

언승은 애장왕대 일련의 관제개혁을 통해 행정체계를 재정비하여 지휘감독을 일원화하였고, 귀족과 사원세력의 결합을 억제시킴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809년에는 동생인 이찬 제옹(悌邕)과 더불어 난을 일으켰다. 이때 애장왕이 살해되고, 언승이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헌덕왕 대에는 뚜렷한 정책이나 정치 개혁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애장왕 당시의 개혁 정치가 그대로 이어졌다. 그에 못지 않게 왕권강화에 도전하는 세력의 반발 또한 거세었다.

비록 언승이 난을 일으켜 왕위를 쟁취했지만, 헌덕왕은 여전히 반대 세력의 반발에 부딛쳤다. 그 결과 정국은 날로 불안해져 갔으며 빈번한 기근은 그것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814년(헌덕왕 6) 서쪽 지방에 큰 홍수가 났고, 815년에는 서쪽 변방의 주(州) · 군(郡)에 기근이 들었다. 이 후 816 · 817 · 820 · 821년 등 계속해 기근이 들었으며, 경우에 따라서 초적(草賊)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마침 당나라에서는 절도사(節度使) 이사도(李師道)의 반란을 당해 신라에 출병을 요청하였다. 헌덕왕은 816년에 김웅원(金雄元)으로 갑병(甲兵) 3만을 이끌고 반란의 진압을 도왔다. 이러한 국내외의 모순이 누적되는 가운데 822년에는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녹진(祿眞)의 인사원칙에 대한 제언이고, 또 하나는 김헌창 난의 발발이다. 당시 충공(忠恭)이 상대등이 되어 인사를 처리하는 데 갑자기 병이 들었다. 그러자 집사시랑(執事侍郎)인 녹진이 충공을 찾아가 인재의 쓰임을 목재에 비유해 인사처리에 적절한 대책을 제언하였다. 그 말을 들은 충공은 물론 부군(副君)인 수종과 헌덕왕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 때 녹진이 제시한 인사원칙은 왕당파(王黨派)에게 유리한 것으로, 왕권에 반대하는 귀족에게는 불리한 것이었다. 곧이어 일어난 김헌창의 난은 헌덕왕이 주도한 개혁정치에 반대해 오던 귀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일어났다. 또한, 녹진의 제안이 김헌창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것도 난이 일어나게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헌덕왕 14년(822년)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은 헌덕왕 · 김수종 · 김충공을 따르는 귀족들과 이에 반대하는 정치에서 소외된 귀족들 간의 대립에서 빚어진 갈등의 소산이다. 애장왕대부터 헌덕왕의 치세기간을 통하여 추진된 일련의 개혁은 국왕의 권력을 강화시키고자 한 의도에서 추진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헌덕왕의 형제들이 육두품의 협력을 받아 전담하게 되었다.

따라서 다른 많은 귀족들은 견제되고, 소외되었다. 김헌창의 난은 이러한 갈등의 한 소산이었다. 이러한 김헌창의 난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독립된 가계의 귀족들이 사병(私兵) 세력을 바탕으로 상호 연합해서 항쟁하는 양상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연합의 범위가 중앙을 넘어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는 점 역시 주목된다.

826년에 사망했으며 장지(葬地)는 천림사(泉林寺) 북쪽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 애장왕대(新羅 哀莊王代)의 정치변동(政治變動)과 김언승(金彦昇)」(최홍조,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34, 2004)
「신라하대(新羅下代) 균정계(均貞系)의 왕위계승(王位繼承)과 김양(金陽)」(윤병희, 『역사학보(歷史學報)』96, 1982)
「신라 헌덕·흥덕왕대 개혁정치(新羅 憲德·興德王代 改革政治)」(김동수,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39, 1982)
「신라하대(新羅下代)의 왕위계승(王位繼承)과 정치과정(政治過程)」(이기동, 『역사학보(歷史學報)』85, 1980)|『신라 골품제사회(新羅 骨品制社會)와 화랑도(花郞徒)』(이기동, 일조각, 1984)
「신라원성왕계(新羅元聖王系)의 왕위교체(王位交替)」(오성, 『전해종박사회갑기념논총(全海宗博士回甲紀念論叢)』, 1979)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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