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년(헌덕왕 3) 이찬(伊飡)으로 완산주도독(完山州都督)이 되었으며, 819년에 순천장군(順天將軍)으로 당나라의 운주절도사(鄆州節度使) 이사도(李師道)의 반란토평을 위한 당나라 헌종(憲宗)과 양주절도사(楊州節度使) 조공(趙恭)의 요청에 응해 3만의 원군을 이끌고 가서 도왔다.
다시 822년 웅천주도독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잡찬(迊飡)으로서 김균정(金均貞)·김우징(金祐徵)과 함께 3군을 이끌고, 성산(星山)싸움에서 반란군의 지대(支隊)를 격파하고 웅천(熊川)을 함락시켜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웠다.
김웅원을 김유신(金庾信)의 후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김해김씨 삼현파보(金海金氏三賢派譜)』에 김유신의 후손으로 그의 행록을 지은 장청(長淸)의 아들로 김웅원이 기록되어 있음을 근거로 그렇게 보기도 한다.
만약 김웅원을 김유신의 후손으로 본다면, 통일전쟁 이후 한때 몰락하였던 김유신의 가계를 다시 부흥시키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 인물이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