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영지(英之), 호는 하천(霞川). 고상지(高尙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공조참의 고자검(高自儉)이고, 아버지는 형조좌랑 고운(高雲)이며, 어머니는 이호선(李好善)의 딸이다. 아들이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다.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546년(명종 1) 예조좌랑이 되었다. 다음해 사헌부감찰이 된 뒤, 1550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다음해 특지(特旨)로 옥천군수가 되었다. 1553년 폐단을 제거하고 선정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1558년 양사(兩司)의 장령 · 헌납 · 집의 · 사간을 거쳐, 1560년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제수된 뒤 얼마 후에 가자(加資: 관직이나 품계가 오름)되었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 이량(李樑)의 당여(黨與: 정치적인 식견을 같이함)로서 항상 측근에 있고 싶어하였다.
이량이 평안감사에서 내직으로 들어오자, 자신도 병을 핑계로 내직으로 들어왔다. 1562년 첨지중추부사 · 동부승지 · 대사간 · 홍문관부제학 · 병조참의 · 이조참의 · 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양사에서 이량의 당여를 탄핵할 때, 고맹영도 유배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이후 거듭 탄핵을 받다가 1565년 이량의 실각과 함께 유배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