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맹영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사헌부지평, 옥천군수, 호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영지(英之)
하천(霞川)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02년(연산군 8)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장흥(長興)
주요 관직
사헌부지평|옥천군수|호조참의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전기에, 사헌부지평, 옥천군수, 호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영지(英之), 호는 하천(霞川). 고상지(高尙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공조참의 고자검(高自儉)이고, 아버지는 형조좌랑 고운(高雲)이며, 어머니는 이호선(李好善)의 주1 아들이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40년(중종 35) 주2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546년(명종 1) 예조좌랑이 되었다. 다음해 사헌부감찰이 된 뒤, 1550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다음해 특지(特旨)로 옥천군수가 되었다. 1553년 폐단을 제거하고 선정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1558년 양사(兩司)의 장령 · 헌납 · 집의 · 사간을 거쳐, 1560년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제수된 뒤 얼마 후에 가자(加資: 관직이나 품계가 오름)되었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 이량(李樑)의 당여(黨與: 정치적인 식견을 같이함)로서 항상 측근에 있고 싶어하였다.

이량이 평안감사에서 내직으로 들어오자, 자신도 병을 핑계로 내직으로 들어왔다. 1562년 첨지중추부사 · 동부승지 · 대사간 · 홍문관부제학 · 병조참의 · 이조참의 · 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양사에서 이량의 당여를 탄핵할 때, 고맹영도 유배시킬 것을 주3 이후 거듭 탄핵을 받다가 1565년 이량의 실각과 함께 유배당하였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월정집(月汀集)』
『백주집(白洲集)』
주석
주1

가계 : 『국조문과방목』 卷之六(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주2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六(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주3

고맹영 탄핵 : 명종실록29권, 1563년(명종 18) 10월 9일. "양사에서 이양 등의 중벌을 청하다"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