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702~737년이며,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서 형 효소왕이 후사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했다. 즉위 후 축성과 민생안정 사업에 주력했다. 잦은 수해와 전염병 만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고 정전제를 실시하여 민생 안정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꾀했다. 발해와 당의 대립을 기회로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패강 이남 지역에 대한 영유권도 인정받았다. 유교적 예제를 정비하고 국가불교도 고취하여 신라 천년의 역사 중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본래 융기(隆基)였으나 뒤에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동모제(同母弟)이다.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비는 704년(성덕왕 3)에 승부령(乘府令)이던 소판(蘇判) 김원태(金元太)의 딸 성정왕후(成貞王后, 또는 嚴貞王后)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성덕왕 15년에 왕궁에서 내보내고,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 소덕왕후(炤德王后)를 계비로 맞이하였다.
성덕왕이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서 국인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음을 감안하면, 그는 자신이 무열왕과 신문왕의 정통임을 인식시켜 왕권의 위상을 높이려고 다방면에서 노력하였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성덕왕대는 통일신라시대의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였으며, 특히 정전(丁田)제를 실시하여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온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신라 천년의 역사를 통해 최대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고 칭송받는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성덕왕은 부왕인 신문왕(神文王)을 어릴 때 여의었고, 어머니 신목태후(神穆太后) 역시 그가 10여 세 때인 700년 6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효소왕이 사망하자 국인들의 추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704년 5월 소판 김원태의 딸과 혼인하였으나(성정왕후 혹은 엄정왕후), 외척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잠재우기 위하여 716년 3월 왕후를 궁궐에서 내보내야만 했다. 왕후가 궁궐에서 나간 이후 곧바로 태자의 사망을 보아야 했다. 이후 성덕왕은 720년 3월 이찬 김순원의 딸을 계비로 맞이하였다(소덕왕후). 그렇지만 계비가 724년 12월 죽자 성덕왕은 그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 가까운 세월을 왕비 없이 고독한 삶을 이어 나갔다.
성덕왕의 인생 역정이 비록 그러하였지만 그의 시대는 통일신라시대의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집사부(執事部)의 중시(中侍)가 모든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됨에 따라 전제 왕권이 보다 강화된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아찬(阿飡) 김원훈(金元訓)이 성덕왕이 즉위하던 702년에 중시에 임명된 이후 원문(元文) · 신정(信貞) · 김문량(金文良) · 김위문(金魏文) · 효정(孝貞) · 김사공(金思恭) · 문림(文林) · 선종(宣宗) · 윤충(允忠) 등 10명의 인물이 성덕왕 대에 중시로 활동하였다. 특히 이들 가운데 원훈 · 사공 · 선종의 경우에는 천재지변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남으로써 중시가 전제 왕권의 안정을 위한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성덕왕 대에는 효소왕 때부터 활동하던 이찬 김개원(金愷元)을 비롯해 인품(仁品) · 배부(裵賦) · 사공의 4명이 상대등으로 재직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던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렇지만 성덕왕대 상대등을 지냈던 인물 가운데는 성덕왕과 혈연적으로 매우 가까운 인물도 있었으며, 성덕왕의 즉위과정에서 상대등이었던 김개원의 역할이 컸다고 하는 지적을 염두에 두면 신라 중대의 상대등은 상대 · 하대와는 달리 왕권의 옹호자였을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다. 또한 상대등은 친왕파이며 중대에서도 여전히 최고의 실권자라고 하는 주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는 결국 중시가 상대등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려주게 되는 것으로 신라 중대 사회가 전제적 왕권의 시대였다고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헤아릴 수 있게 한다.
성덕왕은 왕위를 계승한 이후 무엇보다 민생의 안정과 축성 사업에 힘을 쏟았다. 정치의 성패가 일선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들의 자질이나 복무자세 여하에 달려 있음을 인식한 그는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관료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타일렀다. 그리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교서를 내려 백관들로 하여금 북문에 들어와 진언하도록 언로(言路)도 개방하였다. 이와 같이 왕은 관료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한편 직접 민정 시찰에 나서 주 · 군(州郡)을 자주 순행하였다. 또한 왕은 기회 있을 때마다 죄인에 대한 사면조치를 단행하였는데, 그 빈도는 역대 제왕 가운데 단연 으뜸이었다.
왕의 재위 기간 동안 수재와 전염병이 만연하였는데, 그러한 것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영농민을 보호하기 위한 근본 대책으로 당의 균전제(均田制)를 본떠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는데 이는 백성들의 사실상 사유지였던 전답의 소유권을 정식으로 인정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자영농민을 법제상으로 보호하려는 조정의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국방문제에 있어서도 빈틈없이 대비하였는데, 전국의 요충지에 성을 쌓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이를 위해 732년 제1급 중앙관부로 경성주작전(京城周作典)을 설치하고 도성의 방비태서를 강화하였다.
대외관계에서 무엇보다 주력한 것은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왕은 재위 36년간 46회의 견당사(遣唐使)를 보냈으며 유학생도 보내어 국학에서 유학을 배우도록 조치하였다. 그런 가운데 732년 9월 발해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산동반도 등주를 공격하게 되자 당과 혈맹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과 같이 손잡고 발해를 견제하고자 하여 김유신의 손자로서 왕의 총신이었던 김윤중(金允中)과 적잖은 병사를 파견하였다. 비록 큰 눈이 내려 길은 막히고 얼어 죽은 병사가 절반이나 되어 도중에서 회군하고 말았지만, 이에 당으로부터 735년 패강 이남의 지경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정식으로 승인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당과의 관계가 개선되어감에 따라 성덕왕은 일본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늦추지 않았다. 당시 일본 조정은 동아시아 국제 환경의 변화를 직시하지 못한 채 독선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735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서 신라는 어제의 신라가 아니며 이름도 왕성국(王城國)으로 고쳤다고 자부했다. 이는 신라조정의 높아진 자존의식을 표현한 것인데, 일본이 이에 대하여 거부감을 드러냈고 결국 성덕왕이 죽을 때인 737년 2월 일본조정에서는 신라 침공의 논의가 나오기까지 했다.
성덕왕은 유교적 예제의 정비와 국가불교도 고취하였다. 717년 당에서 귀국한 김수충(金守忠)이 공자 이하 10철과 72제자의 도상을 가져오자 왕은 이를 국학에 안치토록 조치하였다. 또한 718년에는 누각전(漏刻典)을 설치하였고, 721년에는 내성 기구 속에 소내학생(所內學生)을 두어 장차 문한계통에서 종사할 요원 양성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제도정비에서 주목되는 것은 유교적 예의에 입각하여 각종 예제를 정비한 것이다. 유교사상과 의례를 강화함으로써 가까스로 확보한 평화를 지켜나가고자 하였다.
왕은 호국불교 이념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가 전광대왕(典光大王)이란 불교식 왕명을 가진 중대 유일의 군주였던 것만 보더라도 그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즉위한 이후 증조부인 태종무열왕을 추복하고 겸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국가의 안태를 기원할 목적으로 봉덕사 건립에 착수, 7일 동안 인왕도량을 베풀었으며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이는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사찰 가운데 하나로 성전사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성덕왕이 즉위하자 당나라 측천무후가 그에게 효소왕이 가졌던 보국대장군 행좌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輔國大將軍 行左豹韜尉大將軍 雞林州都督)을 이어 받도록 하였다. 재위 12년에 당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표기장군 특진 행좌위위대장군 사지절 대도독계림주제군사 계림주자사 상주국 낙랑군공 신라왕(驃騎將軍 特進 行左威衛大將軍 使持節 大都督雞林州諸軍事 雞林州刺史 上柱國 樂浪郡公 新羅王)으로 봉하였다. 재위 30년에는 당나라의 현종이 태복소경원외치(太僕少卿員外置)의 관작을 내려 주었다. 또한 32년에는 성덕왕에게 관작을 더해 주었는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영해군사(寧海軍使)로 삼았다.
왕이 승하하자 당나라 현종은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성덕(聖德)이며,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 지냈다. 왕릉은 현재 경주시 조양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