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

고대사
지명
698~926년,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 동북 랴오닝성 ‧ 지린성 ‧ 헤이룽장성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걸쳐 존속하며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루었던 고대국가.
이칭
이칭
진국(振國), 진국(震國)
지명/고지명
제정 시기
698년
폐지 시기
926년
지역
중국 동북 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러시아 연해주
내용 요약

발해는 698~926년,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 동북 랴오닝성 ‧ 지린성 ‧ 헤이룽장성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걸쳐 존속하며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루었던 고대국가이다. 대조영이 698년에 건국하였고, 초기 국명은 진국이다. 건국 초에는 신라와 교류하며 대아찬 직을 받았고, 이후 신라도를 설치하였다. 713년에 당나라에서 발해군왕을 받은 뒤 국명을 발해로 변경하였다. 제3대 문왕 대에 황제국 체제를 갖추었고, 9세기에는 해동성국으로 불렸다. 925년 12월에 거란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고 926년 초에 멸망하였다.

정의
698~926년,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 동북 랴오닝성 ‧ 지린성 ‧ 헤이룽장성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걸쳐 존속하며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루었던 고대국가.
발해의 건국과 흥망

건국

698년에 고구려 옛 장수인 대조영(大祚榮, ?∼719)이 발해를 건국하였다. 초기 국호는 진국(振國 또는 震國)이다. 대조영은 당나라에 의해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遼寧城〕 차오양〔朝陽〕에 해당하는 요서(遼西) 지방의 영주(營州)에 강제로 옮겨가 살았다. 대조영과 그 가족이 언제 영주로 끌려갔는지는 논란이 있다. 주로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가 고구려 유력층을 당나라 내지로 끌고 갈 때 영주에 남겨졌다는 설과 679~681년에 요동에서 보장왕말갈과 반당(反唐) 모의를 한 것이 드러나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이 다시 당나라로 끌려갈 때 남겨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영주는 당나라가 동북쪽 이민족을 통제하던 거점 도시로, 주변 지역에서 귀순해 오거나 강제로 끌려온 이민족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그러한 이민족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거란족〔契丹族〕, 해족(奚族), 말갈족(靺鞨族) 등이 있었다.

당나라는 변경 이민족 지역에 기미주(羈靡州)를 두고 지배하였는데, 요서와 요동지역에서는 나당전쟁 이후 기미 지배 체제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682년에 동돌궐 제국이 재건에 성공하자 동북지역 여러 민족의 반당 활동을 자극하였다. 693년경에는 흑수말갈과 실위의 반란이 있었고, 696년에는 요서에서 거란족을 중심으로 해족, 고구려 유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이 연대한 대규모의 반당 전쟁이 일어나 요동지역으로 확대되었다.

696년 5월에 거란족 수장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營州) 도독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유주(幽州: 지금의 베이징)와 허베이〔河北〕 지역을 공격하여 당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반란에는 영주에 거주하던 대조영 집단도 참여하였다. 대조영의 아버지인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은 영주를 떠나 요동지역에서 반당 전쟁에 참여하였는데,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 집단도 함께하였다.

허베이 지역으로 남하하였던 거란족 중심의 반당 세력은 이듬해에 겨우 진압되었다. 그러나 요동지역의 반당 세력은 친당 세력을 압도하며,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있던 신성(新城), 그리고 요동성(遼東城), 마미성(磨米城) 등의 전투에서 상당한 세를 떨쳤다. 따라서 당나라는 걸걸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 허국공(許國公)을 주어 이들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걸사비우가 이를 거절하자 당나라에 투항하였던 거란 장수 이해고(李楷固)가 측천무후의 명령을 받아 걸사비우를 공격해서 죽이고, 이어 대조영 집단을 뒤쫓았다. 이 무렵 걸걸중상도 사망하여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병을 이끌고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추격해 온 당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이해고는 겨우 몸만 피하여 돌아갔고, 곧바로 요서지역의 거란이 돌궐에 투항하며 길이 막히게 되자, 당은 더 이상 대조영 집단을 토벌할 수 없었다.

천문령 전투를 마지막으로 대조영은 걸사비우의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 멸망기부터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요동을 떠나 동쪽으로 가서 동모산(東牟山)에서 건국하였다. 동모산은 지금의 지린성〔吉林城〕 둔화〔敦化〕에 있는 청산쯔산성〔城山子山城〕으로 여겨진다. 건국 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으나 일본 『유취국사(類聚國史)』에 기록된 698년이 정설이다.

대조영은 나라를 세우고 곧바로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교류하였다. 신라는 나당전쟁 이후 당나라와 사이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최치원의 글에 따르면 이때 신라는 대조영에게 대아찬(大阿飡) 관등을 주었다고 한다.

발해 건국 이후 당나라는 발해를 포섭하기 위하여 먼저 사신을 보냈다. 당시 당나라는 서쪽의 토번(吐蕃)과 북쪽의 돌궐, 동북쪽의 거란 등과 계속해서 무력 충돌을 하였다. 당나라 중종은 돌궐 및 거란과 우호 관계에 있었던 발해를 끌어들여 이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705년에 사신을 파견하고 대조영을 위무하였다. 대조영은 그 보답으로 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당나라로 보내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713년에 당 현종이 최흔(崔訢 또는 崔忻)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책봉하면서 발해와 당나라는 정식으로 국교를 맺었다. 이후 발해는 점차 진국 대신 발해를 국명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중국 학계 일각에서는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 발해군왕 책봉 이후 “말갈 칭호를 버리고 발해로만 불렀다”는 기록을 근거로, 발해의 초기 국호를 ‘말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당나라의 입장을 반영한 기록으로, 당나라의 지배를 벗어나 건립한 독립 국가인 진국을 인정하지 않고 말갈로 낮추어 불렀기 때문이다.

발해는 대조영이 당나라에서 발해군왕을 받으며 당나라와 조공(朝貢) · 책봉(冊封) 관계를 맺지만, 당의 지배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대조영이 719년에 사망하자 고왕(高王)이라는 시호를 사용하였는데, 당서(唐書)에는 이를 두고 그 나라에서 사사로이 시호를 삼았다고 하였다. 대조영의 장자인 대무예(大武藝)가 지닌 계루군왕(桂婁郡王)은 당나라에서 책봉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을 동급의 군왕(郡王)으로 삼는 것은 이례적이고, 대무예를 당나라에서 계루군왕으로 책봉하였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발해 자체의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모든 시기에 걸쳐 연호시호를 독자적으로 사용하였고, 황제국 체제를 갖추었던 것을 보면 발해가 독립국가임을 알 수 있다.

대조영이 건국하고 난 뒤에 주변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빠르게 결집하며, 발해는 초기에 10여만 호에 정예병이 수만 명이나 될 정도로 성장하였다. 독립국가로서 당시 국제 정세를 잘 이용하여 주변 말갈 세력의 대외 활동을 통제하며 빠르게 왕권을 안정시켜 나갔다.

발전

제1대 고왕의 뒤를 이은 제2대 무왕(武王, 재위 719∼737) 대무예와 제3대 문왕(文王, 재위 737∼793) 대흠무(大欽茂) 시기는 발해 역사의 전반기에 해당하며, 영토 확장과 제도 ‧ 문화면에서 큰 발전을 이룬 시기이다.

무왕은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무치(武治)에 큰 업적을 남겼다. 무왕이 727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는 여러 나라를 주관하고 여러 번(蕃)을 총괄하며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남은 풍속을 가졌다고 하였다. 『신당서』에는 발해가 부여 ‧ 옥저 ‧ 조선 등 바다 북쪽 여러 나라를 얻었다고 하였다. 이렇듯 무왕의 활발한 영역 확장은 필연적으로 주변국과 마찰을 야기하였고, 마침내 발해가 당나라와 무력 충돌하는 원인이 되었다.

무왕 대에 발해는 지금의 헤이룽강〔黑龍江, 러시아 아무르강〕 주변에 살던 흑수말갈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해 갔는데, 여기에 압박을 느낀 흑수말갈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발해를 견제하려 하였다. 당나라 역시 북방을 위협하던 돌궐 ‧ 거란 등과 연대하고 있던 발해를 견제하기 위하여 726년에 흑수말갈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설치하였다.

무왕은 이것을 흑수말갈이 당과 손을 잡고 앞뒤에서 발해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기고, 친동생인 대문예와 장인 임아(任雅 또는 任雅相)를 보내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숙위한 경험이 있던 대문예는 흑수말갈을 공격하는 것이 당나라를 배반하는 일이고, 군사의 열세를 들어 반대하였다. 대문예가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 이르러서도 반대 글을 올리자 화가 난 무왕은 대문예를 불러들여 죽이려 하였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하였다. 이후 대문예의 송환을 둘러싸고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한편 발해는 727년에 일본에 사신을 처음 파견하여 국교를 수립하고, 만약에 있을 당과 신라의 연계에 대비하였다. 신라의 경우 발해가 팽창하는 것에 맞서 북경의 방어 시설을 정비하고, 당나라와의 관계를 강화시켰다. 이로써 발해는 돌궐 ‧ 거란 ‧ 일본과 연합하고, 당나라는 신라 ‧ 흑수말갈과 연합하는 형세가 구축되었다.

동북아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무왕은 732년 9월에 대장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였고, 이듬해에는 돌궐 및 거란과 연합하여 마도산 등 하북 지방을 공격하면서 국제전을 벌였다. 당나라는 발해를 격퇴하기 위하여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의 남쪽 경계를 협공하였다. 이때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735년경 신라는 참전 공로로 패강 이남의 영유권을 당으로부터 인정받았다. 그리고 735년 전쟁이 종식된 이후 발해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죄하면서 양국 간의 국교가 회복되었다.

무왕이 사망하고 문왕이 즉위한 뒤에는 정복 전쟁을 통하여 외부로 발산하던 국력을 내부로 수렴하여 문치(文治) 중심의 체제 안정에 집중하였다. 문왕은 즉위 직후 당나라로부터 국가의례를 정한 『개원례(開元禮)』 및 역사서를 수입하는 등 유학과 불교를 진작시켰다. 중앙 행정 기구와 중앙 군대, 관리의 등급 제도와 복장 제도가 정비되었고, 지방에는 부(경)-주-현의 3단계 행정 체계가 갖추어졌다.

『신당서』 발해전에 보이는 5경 15부 62주가 언제 완비되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발해는 756년 초에 현주(顯州, 지금의 지린성 허룽〔和龍〕)에서 상경(上京, 현재의 헤이룽장성 닝안〔寧安〕)으로, 780년대 후반에는 동경(東京, 현재의 지린성 훈춘〔琿春〕)에 천도하였던 사실과 776년 일본에 파견한 사신이 남해부(南海府)의 토호포(吐號浦)에서 출발하였던 기록을 통해 문왕 대 후반에 부주현제와 5경제가 성립되었다고 본다. 한편 초기 수도인 구국(舊國)에서 현주로 천도한 시기에 대해서는 기존에는 문왕 대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무왕 대의 일로 본다.

문왕은 당나라에서 여러 번 책봉을 받아 762년에는 발해의 국왕(渤海國王) 겸 검교태위(檢校太尉)로 승격하였고, 774년에는 연호를 대흥(大興)에서 보력(寶曆)으로 개원하였다. 신라와의 사이에는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新羅道)를 설치하여 교류하였고, 일본과의 교섭은 이전의 군사적 목적에서 점차 문화 ‧ 경제 외교로 전환해 갔다. 문왕은 56년의 장기 집권으로 왕권을 안정적으로 강화하여 황제국 체제를 구축하였다.

문왕은 존호로 금륜성왕(金輪聖王)을 사용하여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였으며, 황상(皇上) ‧ 황후(皇后) 칭호나 조고(詔誥) 등 황제와 관련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국력 신장과 황제국으로서의 자신감을 토대로 771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이 천손(天孫)임을 자처하고, 양국의 관계를 구생(舅甥) 관계로 설정하여 일본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정체

발해 제4대 폐왕(廢王) 대원의(大元義, 재위 793~793?)부터 제9대 간왕(簡王, 재위 817?~818) 대명충(大明忠)까지는 불과 25년간 6명이 왕위를 이어, 발해 내부에서 정치적 분쟁이 있었던 시기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시기를 내분기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내분은 일시적이며 정체기로 보는 시각이 늘고 있다.

문왕의 왕위 계승자인 대굉림(大宏臨)은 문왕보다 일찍 사망하였는데, 문왕의 사후에 문왕의 자손이 아닌 족제(族弟) 대원의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 1년 만에 성격이 의심이 많고 포악하여 지배층이 그를 죽이고, 대굉임의 아들 대화여(大華璵)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대화여가 발해의 제5대 왕인 성왕(成王, 재위 793?~794?)이다. 성왕은 곧바로 동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하고 중흥(中興)을 연호로 삼았다. 그러나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사망하고, 문왕의 작은 아들인 대숭린(大嵩隣)이 제6대 강왕(康王, 재위 794~809)으로 즉위하였다.

강왕은 폐왕을 축출하고 성왕의 즉위와 상경 환도를 주도하며 권력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조카인 성왕을 이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왕은 왕권의 정통성 확보와 상경 환도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하여 당과 일본에 잇달아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내분과 강왕이 조카를 이어 즉위한 것이 알려지며, 당은 강왕을 국왕이 아닌 군왕으로 책봉하였다. 이에 그 다음 일본에 사신을 파견할 때는 강왕을 문왕의 고손(孤孫)이라고 하였다.

강왕은 15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빠르게 국정을 안정시켰고, 앞선 시기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드러내었다. 연호는 정력(正曆)이라고 하였다. 강왕 이후 제7대 정왕(定王, 재위 809~812) 대원유(大元瑜), 제8대 희왕(僖王, 재위 812~817?) 대언의(大言議), 제9대 간왕 대명충이 잇달아 왕위를 이었다. 정왕 ‧ 희왕 ‧ 간왕은 각각 영덕(永德)주작(朱雀)태시(太始)를 연호로 사용하였다.

발해는 한차례 짧은 내분을 거친 뒤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9세기로 넘어가면서 주변부에 대한 통제력과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당시 당나라와 회흘의 정세가 계속 불안정한 상태에서 거란, 실위, 말갈 등 동북방 민족에게 상대적으로 안정된 발해와의 교역은 매우 중요하였다. 발해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발해의 영향력은 증가하였다.

기존에 내분론에 입각하여 802년과 815년에 보이는 월희, 우루, 흑수말갈 등의 당 조공을 발해의 세력 약화에 따른 독자적인 활동으로 보았으나, 발해의 말갈 지배 강화와 영역 확장에 대한 반대급부로 당나라 조공 무역의 기회를 얻은 것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815년의 흑수말갈의 당 조공을 『당회요(唐會要)』 발해전에 수록한 것은 발해와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융성

발해의 제10대 선왕(宣王, 재위 818∼830) 대인수(大仁秀)는 고왕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으로, 그가 즉위하면서 발해의 왕계가 바뀌었다. 선왕은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삼았고, 문왕 사후의 침체기를 완전히 벗어나 중흥을 이루었다. 선왕은 즉위하자마자 당나라로부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검교비서감도독(檢校秘書監都督) 발해의 국왕에 책봉되었다.

선왕은 “자못 바다 북쪽의 여러 부락을 토벌하여 영토를 크게 여는 데에 공이 있어” 820년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검교사공(檢校司空)으로 승격되었다. 선왕 대에는 대외 확장을 통해 월희말갈 등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헤이룽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흑수말갈을 통제하였다. 또한 서남쪽으로는 요동지방을 아우르고 남쪽으로는 대동강과 원산만 방면으로 남하하여 신라를 압박하였다. 이로써 발해의 정복 활동은 거의 마무리되었고, 사방 5,000리의 경계가 확정되어 5경, 15부, 62주가 완비되었다.

대외관계도 안정되어 재위 12년간 당나라에 매년 사신을 파견하였고, 일본에도 다섯 차례나 사신을 파견하였다. 견일본사는 규모도 크고 상업적 성격이 강하여, 사신 접대에 경제적 부담을 겪은 일본은 방문 기한을 12년으로 제한하고 사신단의 사무역을 금지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기도 하였다.

선왕의 사후 아들 신덕(新德)이 일찍 죽어 손자인 대이진(大彛震, 재위 831∼857)이 제1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대이진은 연호를 함화(咸和)라고 하였고 시호는 전해지지 않는다. 대이진 대에는 관제를 크게 개편하여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 좌우삼군(左右三軍), 120사(司)를 두었다. 이 시기 발해에 다녀간 당나라 사신 장건장(張建章)은 『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저술하였다.

대이진 이후의 왕들은 연호와 시호 모두 전하지 않는다. 제12대 왕인 대건황(大虔晃, 재위 858~871)은 대이진의 동생이며, 제13대 대현석(大玄錫, 재위 872~894?)은 대건황의 아들이다. 제14대 왕인 대위해(大瑋瑎, 895?~906?)는 발해 왕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근대 중국학자인 진위푸〔金毓黻〕가 『당회요(唐會要)』에서 그 존재를 발견하며 알려졌다. 대위해의 연호 ‧ 시호 ‧ 가계는 알 수 없다.

발해는 선왕 이후 융성기를 맞으며 마침내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당나라와 신라가 내분에 휩싸이면서 해동성국의 모습을 전하는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 더욱이 발해 스스로 남긴 기록도 전해지지 않아 9세기 발해의 발전상을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일본과의 경제 ‧ 문화 외교 모습이나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그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특히 872년에 발해 사람 오소도(烏炤度)는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서 신라인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하였고, 906년에는 그 아들이 차석을 차지하며 신라와 우열을 다투었다. 897년에는 발해 왕자가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한 쟁장사건(爭長事件)이 벌어졌는데, 당나라 황제가 “국명의 선후는 본래 강약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거절하였다. 이것은 발해가 9세기 말 신라를 능가하는 국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멸망과 부흥운동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大諲譔, 907?~926)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동아시아 각국의 정세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되었고,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 10국이 번갈아 일어났다. 이 기회를 타고 거란족이 크게 발흥하였는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거란 부족을 통일하고 사방으로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발해는 부여부(扶餘府)에 정예병을 주둔시켜 거란을 대비하였는데, 거란은 발해 서북 경계의 소황실위(小黃室韋), 월올(越兀), 오고(烏古) 등과 동북여직(東北女直)을 공격하여 복속시키고, 부여부 일대를 고립시켜 나갔다. 그리고 거란은 요동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하여 발해와 수십 년간 치열한 혈전(血戰)을 치렀다.

왕 대인선은 후량 · 신라 · 일본 등에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펼치고 거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외교적인 고립을 피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야율아보기는 924년에 숙원하였던 소위 ‘양사(兩事)'라고 불리는 서방과 발해의 정복 가운데 하나인 서방 정벌을 단행하였고, 925년 12월에 발해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926년 정월에 발해를 무너뜨렸다.

발해가 갑자기 무너진 것에 대해 거란이 “마음이 갈라진 것을 틈타서 싸우지 않고 이겼다”는 기록 등을 통해 한때 ‘내분설’이 정설로 여겨졌고, ‘백두산 화산 폭발설’이 주목받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대인선 시기에 적극적인 외교 활동과 멸망 전쟁에 관한 연구, 그리고 백두산 화산 폭발 시기가 멸망 이후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두 설 모두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족(漢族)으로 거란에 투항하였던 진만(陳滿)의 묘지명을 통해, 거란이 923년과 925년에 두 차례나 더 발해를 공격하였고, 최소한 멸망 전쟁이 기록보다 수개월 전에 시작된 것이 밝혀졌다.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멸망시킨 뒤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홀한성(忽汗城)을 천복성(天福城)으로 고쳐, 맏아들인 야율배(耶律倍)에게 통치를 맡겼다. 발해가 멸망한 직후부터 안변부(安邊府), 막힐부(鄚頡府), 정리부(定理府) 등지에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고, 동생인 야율덕광(耶律德光)과 황제 자리를 두고 갈등을 빚던 야율배가 후당에 망명하면서 동단국은 혼란에 휩싸인다. 이에 당 태종은 928년에 동단국 우차상 야율우지(耶律羽之)의 건의를 받아들여 동단국의 발해인을 요양(遼陽)으로 이주시켰다. 사실상 동단국 자체가 서천(西遷)한 것으로 요동 동쪽의 발해 땅에 대한 거란의 통치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발해의 부흥운동 사례는 먼저 후발해가 있다. 후발해는 정식 국호는 아니며 이전 발해와 구분하기 위하여 이렇게 부른다. 고정사(高正詞)가 후당(後唐)에 발해의 사신으로 929년에 갔던 무렵에 건국한 것으로 보지만, 정확한 건국 연대와 멸망 시기는 알 수 없다. 왕은 대씨인데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10여 년 정도 존속하다가 정안국(定安國)에 흡수되었다는 견해와 올야(兀惹) 세력을 후발해로 보아 11세기 초까지 존속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중심지 역시 상경 용천부(龍泉府) 지역과 압록강 유역 설로 나뉜다. 정안국은 970년에 국왕 열만화(㤠萬華)가 처음 송나라에 표문을 보내면서 기록에 등장한다. 『송사』 열전에는 정안국이 본래 마한의 종족으로 거란의 공격을 받아 남은 무리가 서쪽 변경에서 건국하고 개원하며 자칭 정안국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뒤 981년 국왕 오현명(烏玄明)이 송나라에 표문을 보냈는데, 이로서 열씨에서 오씨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보낸 표문 말미에는 원흥(元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가 나온다. 991년에 왕자 태원(太元)이 여진을 통해 송나라에 표문을 보낸 뒤에는 정안국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오사국은 975년에 발해의 부여부 지역이었던 거란 황룡부(黃龍府)에서 위장(衛將)을 지내던 발해 유민 연파가 거란에 반기를 들었다가 올야성(兀惹城)으로 패주하였다는 기록에서 처음 확인된다. 올야성은 오사국의 중심지인 오사성으로 발해의 수도였던 홀한성, 또는 부여부에서 가까운 곳으로 추정된다.

왕은 '오사성 부유부 발해염부왕(烏舍城浮渝府渤海琰府王)' 또는 ‘발해염부왕’, ‘발해왕’ 등으로 불렸고, 오소도(烏昭度) · 오소경(烏昭慶)이 확인된다. 1004년 여진이 오소경의 처자를 사로잡아 요나라에 보내고, 철리국이 1012년과 1022년에 오사국 사람을 붙잡아 요나라에 보낸 기록으로 보아, 이때를 전후하여 세력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료국(興遼國, 1029∼1030)은 대조영의 7대손(혹은 11대손)인 대연림이 요나라 동경 요양성에서 세운 나라이다. 연호는 천경(天慶) 혹은 『고려사』에 기록된 천흥(天興)이다. 대연림은 건국 직후인 1029년 9월 초에 고길덕(高吉德)을 고려에 보내 건국을 알리고 여러 차례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요나라 토벌군에 의해 포위되어 약 1년 만에 성이 함락되고 대연림이 사로잡히면서 멸망하였다.

그 뒤 1116년 1월 1일에 요양에서 다시 발해 유민 고영창(高永昌)대발해를 세웠다. 국명은 『고려사』에는 대원국(大元國)으로, 『거란국지(契丹國志)』에는 대발해국(大渤海國)으로 나타나 차이가 있다. 연호도 『고려사』 등에는 융기(隆基)로, 『거란국지』에는 ‘응순(應順)’으로 나온다. 고영창은 건국 초에 요동의 50여 주를 함락하며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5월 요나라의 군대에 패하였다. 고영창은 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오히려 역공을 받고 도망 중에 붙잡혀서 건국한 지 불과 5개월 만에 멸망하였다.

<발해의 왕계>

1. 고왕 대조영(698∼719)
2. 무왕 대무예(719∼737)
3. 문왕 대흠무(737∼793.3)
4. 폐왕 대원의(793.3∼793?)
5. 성왕 대화여(793?∼794?)
6. 강왕 대숭린(794∼809)
7. 정왕 대원유(809∼812)
8. 희왕 대언의(812∼817?)
9. 간왕 대명충(817?∼818)
10. 선왕 대인수(818∼830)
11. □왕 대이진(831∼857)
12. □왕 대건황(858∼871)
13. □왕 대현석(872∼894?)
14. □왕 대위해(895?∼906?)
15. □왕 대인선(907?∼926.1)
* ?은 즉위년, 퇴위년이 확실하지 않음
* 10대 왕까지는 즉위년 칭원법, 11대 왕부터는 유년 칭원법에 따름
발해의 통치 제도

왕실 제도

발해의 왕실 제도는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 사람들이 왕을 가독부(可毒夫), 성왕(聖王), 기하(基下)라고 부르고, 왕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노왕(老王), 태비(太妃)로, 왕의 아내는 귀비(貴妃), 장자는 부왕(副王), 다른 아들들은 왕자(王子)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제3대 문왕의 두 딸인 정혜(貞惠)공주정효(貞孝)공주의 묘지명에 따르면 왕의 딸은 공주라고 하였으며, 공주들은 출가하기 전 왕실에서 여사(女師)에게 교육을 받았다. 왕위 계승자는 동궁(東宮)이라고 하며, 왕의 자녀들이 왕을 부를 때는 부왕(父王)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묘지명에는 문왕의 존호로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 보이는데, 왕의 재위 시기에 존호(尊號)가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왕과 왕실 가족이 사망한 뒤에는 시호(諡號)가 사용되었다.

발해는 문왕 대에 정치 · 제도 면에서 황제국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발해는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였고, 문왕 이후 왕을 황상, 왕비를 황후라고 하였다. 정혜, 정효 두 공주의 묘지명에 문왕을 대왕(大王), 황상(皇上)이라고 하였고, 2005년 중국 롱터우〔龍頭山〕 고분군에서 발견된 문왕과 제9대 간왕의 왕비 묘지명에는 왕비를 황후(皇后)라고 한 것이 확인된다.

『신당서』 에는 왕의 명령을 교(敎)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중앙기구인 선조성(宣詔省) 등의 이름을 통해 황제의 명령인 조(詔)를 함께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발해왕 아래에 계루군왕(桂樓郡王)과 허왕(許王)의 책봉호가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발해가 대외적으로는 왕을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표방한 외왕내제(外王內帝) 체제를 띠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중앙 관제

발해는 건국 초기에 통치 조직과 관료 제도를 정비할 여력이 되지 못해 수령(首領) ‧ 대수령(大首領)과 같은 수장층을 국정 운영과 대외 교섭 등에 활용하였다. 그 뒤 제2대 무왕 대부터 본격적으로 통치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하여 제3대 문왕 대에 완비하였고, 제10대 선왕에서 제13대 왕 대현석 대에 재정비를 하였다.

발해의 중앙 관제는 3성(省) 6부(部)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3성은 선조성(宣詔省), 중대성(中臺省), 정당성(政堂省)이다. 선조성은 정령(政令)과 조서(詔書)를 심의하고 국정 자문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좌상(左相) · 좌평장사(左平章事) · 시중(侍中) · 좌상시(左常侍) · 간의(諫議)를 두었다.

중대성은 정령과 정책을 기초하고 조칙이나 명령의 초고를 작성하는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우상(右相) · 우평장사(右平章事) · 내사(內史) · 조고사인(詔誥舍人)을 두었다.

정당성은 행정기구로 국왕의 정령을 집행하였으며, 3성 가운데 권한이 가장 커서 그 장관인 대내상(大內相)이 선조성과 중대성의 장관인 좌 ‧ 우상(左‧右相)보다 위에 있었다. 그러나 정당성의 차관인 좌사정(左司政)우사정(右司政)을 선조성과 중대성의 차관인 좌 ‧ 우평장사의 아래에 두어 3성이 서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도록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정당성의 좌 ‧ 우사정은 성격이 당나라의 복야(僕射)와 비슷하고, 사정 아래에 있는 좌윤(左允)우윤(右允)은 이승(二丞, 즉 좌 ‧ 우승)과 비슷하였다.

6부는 정당성 아래에 있었는데, 충부(忠部), 인부(仁部), 의부(義部), 지부(智部), 예부(禮部), 신부(信部)의 6부를 지사(支司) 6부와 함께 반으로 나누어 좌육사(左六司)우육사(右六司)로 구분하였다. 본 6부에는 각기 경(卿) 1명을 두었고, 정당성 사정 아래에 두었다. 지사 6부에는 각기 낭중(郞中)과 원외(員外)가 있었다. 6부 명칭으로 충 ‧ 인 ‧ 의 ‧ 지 ‧ 예 ‧ 신 등 유교 덕목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 중앙 관제로 1대(臺), 7시(寺), 1원(院), 1 감(監), 1국(局) 등이 있었다. 중정대(中正臺)는 관리의 감찰을 담당하였고, 대중정(大中正)과 소정(少正) 각 1명을 두었다. 대중정의 지위는 사정 아래 두었으며, 성격은 어사대부(御史大夫)와 비슷하다. 7시 가운데 전중시(殿中寺)는 국왕의 생활과 행차 의례 등을 담당하였고, 종속시(宗屬寺)는 왕족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각기 대령(大令)소령(少令)을 두었다.

태상시(太常寺)는 예제와 제사를 관장하고, 사빈시(司賓寺)는 외교 사절의 접대와 빈례(賓禮)를 담당하였으며, 대농시(大農寺)는 전국의 창고와 농경 관련 업무를 담당하였다. 각기 경(卿)을 두었다.

사장시(司藏寺) · 사선시(司膳寺)는 각종 재정과 주례(酒醴) ‧ 선식(膳食)과 관련한 일을 담당하였고, 각기 령(令)과 승(丞)을 두었다. 문적원(文籍院)은 경적 ‧ 도서 관리와 문장을 담당하고, 감(監)과 소감(少監)을 두었다. 주자감(胄子監)은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감 ‧ 장(長)을 두었다. 항백국(巷伯局)에는 상시(常侍) 등을 두었는데, 왕실과 후궁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환관들이 속해 있던 관청으로 보인다.

<발해의 중앙 관제>

  • 3성(省)

| 명칭 | 부서 | | -------- | -------- | | 선조성(宣詔省) | 좌상(左相), 좌평장사(左平章事), 시중(侍中), 좌상시(左常侍), 간의(諫議) | | 중대성(中臺省) | 우상(右相), 우평장사(右平章事), 내사(內史), 조고사인(詔誥舍人) | | 정당성(正堂省) | 대내상(大內相), 좌‧우사정(左‧右司政), 좌‧우윤(左‧右允)⋅우윤(右允) |

  • 6부(部)

| 명칭 | 부서 | | -------- | -------- | | 좌육사(左六司) | 충부(忠部)⋅인부(仁部)⋅의부(義部) 각 경(卿) | | - 지사(支司) | 작부(爵部)⋅창부(倉部)⋅선부(膳部) 각 낭중(郞中), 원외(員外) | | 우육사(右六司) | 지부(智部)⋅예부(禮部)⋅신부(信部) 각 경(卿) | | - 지사(支司) | 융부(戎部)⋅계부(計部)⋅수부(水部) 각 낭중(郞中), 원외(員外) |

  • 1대(臺)

| 명칭 | 부서 | | -------- | -------- | | 중정대(中正臺) | 대중정(大中正), 소정(少正) |

  • 7시(寺)

| 명칭 | 부서 | | ------------------ | -------- | | 전중시(殿中寺) | 대령(大令), 소령(少令) | | 종속시(宗屬寺) | 대령(大令), 소령(少令) | | 태상시(太常寺) | 경(卿) | | 사빈시(司賓寺) | 경(卿) | | 대농시(大農寺) | 경(卿) | | 사장시(司藏寺) | 영(令), 승(丞) | | 사선시(司膳寺) | 영(令), 승(丞) |

  • 1원(院)

| 명칭 | 부서 | | ------------------ | -------- | | 문적원(文籍院) | 감(監), 소감(少監) |

  • 1감(監)

| 명칭 | 부서 | | ------------------ | -------- | | 주자감(冑子監) | 감(監), 장(長) |

  • 1국(局)

| 명칭 | 부서 | | ------------------ | -------- | | 항백국(巷伯局) | 상시(常侍) |

관료 제도

발해의 관료 제도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실제 직무를 맡는 직사관(職事官)산관(散官)봉작(封爵) ‧ 훈관(勳官) 제도 등 관료에 관한 여러 등급 제도가 확인된다.

직사관의 등급인 관품(官品)은 9등급으로 구분되며, 질(秩)이라 불렀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9품 관등제는 일반적으로 정 · 종(正從) 또는 상 · 하(上下)로 구분되었지만, 발해에서 이런 구별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관리의 복장은 3질 이상은 자주색 옷〔자의(紫衣)〕에 상아홀〔아홀(牙笏)〕과 금어대(金魚袋)를 하였고, 4~5질은 짙은 붉은색 옷〔비의(緋衣)〕에 상아홀과 은어대(銀魚袋)를 착용하였다. 6~7질은 옅은 붉은색 옷〔천비의(淺緋衣)〕에 나무홀〔목홀(木笏)〕을, 8~9질은 녹색옷〔녹의(綠衣)〕에 나무홀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발해의 관복제도>

| 품계 | 복색 | 홀 | 어대 | | :------: | :-----------: | :------: | :--------: | | 1∼3질 | 자주색 | 상아홀 | 금어대 | | 4∼5질 | 진 붉은색 | 상아홀 | 은어대 | | 6∼7질 | 연 붉은색 | 나무홀 | | | 8∼9질 | 녹색 | 나무홀 | |

벼슬의 직위와 품계가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행수법(行守法)을 시행하였고, 임시직인 검교관(檢校官) 제도를 두었다. 외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에는 대사(大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녹사(錄事), 역어(譯語), 사생(史生), 천문생(天文生), 의사(醫師), 수령(首領), 뱃사공 등으로 임시 조직이 편성되었는데, 사신의 격을 높이기 위해 원래의 직위와 품계를 높여 상위의 직을 가수(假受)하였다.

산관에는 문산계(文散階)와 무산계(武散階)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등급 체계는 알 수 없다. 문산계로는 자수대부(紫綬大夫), 청수대부(靑綬大夫), 영서대부(英緖大夫), 헌가대부(獻可大夫), 광간대부(匡諫大夫) 등이 확인된다. 무산계로는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위군대장군(慰軍大將軍), 운휘장군(雲麾將軍), 귀덕장군(歸德將軍), 충무장군(忠武將軍), 영원장군(寧遠將軍), 유장군(游將軍) 등이 보인다.

봉작 제도와 관련해서는 개국공(開國公), 개국자(開國子), 개국남(開國男)이 확인되며, 공(公) · 후(侯) · 백(伯) · 자(子) · 남(男) 등 5등급의 봉작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군사적인 공훈을 기리기 위한 훈관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다. 발해에서는 당나라 훈관 제도에서 사용되었던 상주국(上柱國) ‧ 주국(柱國) 등은 확인되지 않으며, 상주장(上柱將)이라는 고유한 명칭이 확인된다.

군사 제도

발해의 군사는 건국 초기에 이미 정예병인 승병(勝兵)이 수만 명이었고,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군사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였다. 군사 제도의 정비는 중앙 관제의 정비와 함께 진행되었다. 3성의 하나인 정당성 아래에 있었던 우육사 지부에서 군대를 관리하고, 군수 물자를 담당하였고, 그 지사인 융부(戎部)수부(水部) 등에서 실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신당서』에는 발해의 무관(武官)으로 좌맹분위(左猛賁衛) · 우맹분위(右猛賁衛), 좌웅위(左熊衛) · 우웅위(右熊衛), 좌비위(左羆衛) · 우비위(右羆衛), 남좌위(南左衛) · 남우위(南右衛), 북좌위(北左衛) · 북우위(北右衛)가 있었고, 각각 대장군(大將軍) 1인, 장군(將軍) 1인을 두었다고 전한다.

발해의 중앙군사 조직은 남좌우위와 북좌우위를 각기 하나의 명칭으로 보고 2위로 보느냐, 남좌위 ‧ 남우위, 북좌위 ‧ 북우위로 나누어 4위로 보느냐에 따라 10위제 설과 8위제 설이 있다. 10위(또는 8위)는 주로 궁궐과 수도 방어를 담당하고 지방의 부병(府兵)을 관할하였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성터 서남쪽에서 "천문군지인(天門軍之印)"이 새겨진 인장 1점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위군이 각 성문을 지켰던 사실을 보여준다.

지방군사 조직은 확실하지 않지만, 과의도위(果毅都尉), 낭장(郎將), 별장(別將)과 같은 직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방 부(府) ‧ 주州) ‧ 현(縣)에 당나라 부병제도(府兵制度)와 비슷한 부병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군사 제도는 9세기 전반에 가서 한 차례 변화를 보인다. 제11대 왕 대이진 때인 832년에 당나라 사신 왕종우가 발해에 다녀간 뒤 당 문종에게 “발해에는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이 있고, 좌우삼군(左右三軍)과 120사(司)가 있다”고 하였다. 이후의 변화는 알 수 없다.

지방 제도

건국 초기에는 사방 2,000리에 달하는 영토를 확보하였고, 전성기에는 사방 5,000리에 달하는 영토를 지녔다. 넓은 영토를 유지하고 여러 계통의 주민 집단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지방 제도를 정비해 갔다. 처음에는 지방의 토착세력을 촌(村)의 규모에 따라 대촌, 소촌 등으로 구분하였고, 토착 지배층을 수령, 대수령으로 구분하여 이들을 통한 간접 지배 방식을 취하였다.

그리고 점차 이들을 일원적인 지방 행정 체제로 흡수하여 대촌은 도독(都督)을, 소촌은 자사(刺史)를 두어 다스렸다. 8세기 중반까지는 약홀주(若忽州), 목저주(木底州), 현도주(玄菟州)와 같은 고구려식 행정구역 명칭이 사용되었다.

『신당서』 발해전에 보이는 5경(京), 15부(府), 62주(州)와 같은 지방 제도가 완비되는 시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9세기 전반에 확정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문왕 대에 이미 5경이 설치되었고, 부(경)-주-현의 3단계 지방 행정 체계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제10대 선왕 대에 발해의 영토가 크게 확장되면서 이후 『신당서』 발해전에 보이는 모습이 갖추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신당서』 발해전에는 “숙신의 옛 땅으로 상경(上京)을 삼아 용천부라 하고, 용주(龍州)호주(湖州)발주(渤州)의 3주를 거느렸다. 그 남쪽의 중경(中京)은 현덕부(顯德府)라 하고, 노주(盧州) ‧ 현주 ‧ 철주(鐵州)탕주(湯州)영주(榮州)흥주(興州) 6주를 거느렸다.

예맥(濊貊)의 옛 땅을 동경(東京)으로 삼아 용원부(龍原府) 또는 책성부(柵城府)라 하고, 경주(慶州)염주(鹽州)목주(穆州)하주(賀州) 4주를 거느렸다. 옥저(沃沮)의 옛 땅을 남경(南京)으로 삼아 남해부라 하고, 옥주(沃州)정주(睛州)초주(椒州) 3주를 거느렸다.

고구려의 옛 땅을 서경(西京)으로 삼아 압록부(鴨綠府)라 하고, 신주(神州)환주(桓州)풍주(豊州)정주(正州) 4주를 거느렸다. 장령부(長嶺府)라 하고, 하주(瑕州)하주(何州) 2주를 거느렸다.

부여(扶餘)의 옛 땅은 부여부로 삼아 항상 굳센 군사를 주둔시켜서 거란을 막게 하였고, 부주(扶州)선주(仙州) 2주를 거느렸다. 막힐부는 막주(鄚州)고주(高州) 2주를 거느렸다. 읍루(挹婁)의 옛 땅은 정리부로 삼아 정주(定州) ‧ 심주(瀋州) 2주를 거느렸다. 안변부는 안주(安州)경주(瓊州) 2주를 거느렸다.

솔빈(率濱)의 옛 땅은 솔빈부(率濱府)로 삼아 화주(華州)익주(益州)건주(建州) 3주를 거느렸다. 불열(拂涅)의 옛 땅은 동평부(東平府)로 삼아 이주(伊州)몽주(蒙州)타주(沱州)흑주(黑州)비주(比州) 5주를 거느렸다.

철리(鐵利)의 옛 땅은 철리부(鐵利府)로 삼아 광주(廣州)분주(汾州)포주(浦州)해주(海州)의주(義州)귀주(歸州) 6주를 거느렸다. 월희(越喜)의 옛 땅은 회원부(懷遠府)로 삼아 달주(達州)월주(越州)회주(懷州)기주(紀州)부주(富州)미주(美州)복주(福州)사주(邪州)지주(芝州) 9주를 거느렸다.

안원부(安遠府)영주(寧州)미주(郿州)모주(慕州)상주(常州) 4주를 거느렸다. 또 영주(郢州)동주(銅州)속주(涑州) 3주는 독주주(獨奏州)로 삼았다. 속주는 그것이 속말강(涑沫江)에 가깝기 때문이니, 대개 이른바 속말수(粟末水)이다”라고 하였다.

발해는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왕이 상주하는 수도를 포함하여 15부 가운데 중요한 거점에 5경을 두었다. 15부에는 다시 관할 주를 두었고 모두 62주라고 하였으나 『신당서』 발해전에는 60개의 주 이름만이 나온다. 이 가운데는 부를 통하지 않고 중앙에 곧바로 보고하는 직할 주인 ‘ 독주주(獨奏州)’ 3곳이 있었다.

기록에 빠진 2주에는 『요사(遼史)』 등에 보이는 집주(集州), 녹주(麓州), 빈주(賓州), 신주(愼州) 등이 거론된다. 『요사』 지리지에 보면 주를 군(郡)이라고도 하였다. 발해 후기에 지방 행정 체제의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의 명칭은 영녕현(永寧縣) 등 일부만이 확인되는데, 실제 200~250개 정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에는 책임자로 도독을 두었고, 주에는 자사를 두었으며, 현에는 현승(縣丞)을 두었다. 발해가 지방 제도를 운영할 때 부주현제를 기본으로 하지만, 새로 복속된 지역에는 부족제와 기미(羈縻) 지배 등 간접 지배 방식을 병행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지방 행정 구역의 비정과 관련해서는 논란이 많다. 특히 『요사』 지리지는 발해의 주현 이름과 위치에 관한 정보가 많다. 그러나 연혁 기록에 오류가 많아 지명 비정에 큰 혼란을 주었다. 현재 가장 확실한 것은 발해 수도였던 3경의 위치이다. 상경은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寧安〕 상경성(上京城) 터이며, 중경은 지린성 허룽의 서고성(西古城) 터, 동경은 지린성 훈춘〔琿春〕의 팔련성 터가 확실시 된다. 남경은 함경남도 북청 청해토성(靑海土城)으로, 서경은 지린성 린장〔臨江〕 지역으로 비정된다.

<발해의 지방 행정 조직>

  • 5경(京)

| 명칭 | 소속 경 | | --------- | ---------- | | 5경(京) | 상경, 중경, 동경, 남경, 서경 |

  • 15부(府)

| 명칭 | 소속 주(州) | | -------- | ---------- | | 용천부 | 용주, 호주, 발주 | | 현덕부 | 현주, 노주, 철주, 탕주, 영주(숭주), 흥주 | | 용원부 | 경주, 염주, 목주, 하주 | | 남해부 | 옥주, 정주, 초주 | | 압록부 | 신주, 환주, 풍주, 정주 | | 장령부 | 하주, 하주 | | 부여부 | 부주, 선주 | | 막힐부 | 막주, 고주 | | 정리부 | 정주, 반주(심주) | | 안변부 | 안주, 경주 | | 솔빈부 | 화주, 익주, 건주 | | 동평부 | 이주, 몽주, 타주, 흑주, 비주 | | 철리부 | 광주, 분주, 포주, 해주, 의주, 귀주 | | 회원부 | 달주, 월주, 회주, 기주, 부주, 미주, 복주, 사주, 지주 | | 안원부 | 영주, 미주, 모주, 상주 |

  • 독주주 - 영주, 동주, 속주
  • 기타 - 집주, 녹주, 빈주, 신주
발해의 사회와 경제

사회 구성과 신분 구조

발해의 종족 구성은 고구려계, 말갈계, 거란계, 실위계, 투르크계(돌궐 ‧ 회흘 ‧ 소그드) 등 다양하였다. 발해의 건국 과정에서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아울러 나라를 세웠고, 발해의 영역 확장 과정에서 더 많은 구성원이 포함되었다. 727년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에 여러 나라를 주관하고 여러 번(蕃)을 총괄하며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남은 풍속을 가졌다고 하고, 『신당서』에 발해가 부여 ‧ 옥저 ‧ 조선 등 바다 북쪽 여러 나라를 얻었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무왕과 문왕 대를 거쳐 선왕 대까지 철리 ‧ 불열 ‧ 월희 ‧ 우루부(虞婁部) 등을 복속시켰고, 흑수말갈 역시 발해에 복속되었다. 그리고 남실위와 철륵 등의 종족이 일부 발해에 편입되었고, 발해의 땅에서 발견되는 거란계, 투르크계 유물 등을 통해 소수이지만 이들 역시 발해의 구성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인의 성명을 분석해 보면 역시 고구려계, 말갈계, 소그드계 등 다양한 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신라계로 보이는 인물들도 있다.

발해의 지방 사회 구조와 관련하여 일본의 『유취국사(類聚國史)』에 보이는 토인(土人)과 수령(首領)의 존재가 논란이 되었다. 이 책에는 “그 나라는 사방 2,000리인데, 주 · 현과 관(館) · 역(驛)이 없다. 곳곳에 촌리(村里)가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이 많고 토인이 적다. 모두 토인을 촌장으로 삼았다. 큰 촌은 도독이라 하고, 그 다음은 자사라고 한다. 그 아래 백성들은 모두 수령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여기서 토인은 말갈인에 대비되는 존재로 고구려인으로 보아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토인을 사인(士人)으로 보기도 하고, ‘백성’과 ‘수령’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들 사이의 상하 관계가 다르게 해석된다. 토인을 사인으로 볼 경우 종족 구분과는 무관해진다. ‘백성’을 일반민으로 볼 경우 피지배층인 백성이 도독과 자사를 수령으로 부른 것이 되고, ‘백성’을 관인으로 볼 경우 도독이나 자사 아래에 있는 관료로서 이들을 수령으로 불렀다고 해석될 수 있다.

발해의 사회 구성은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렇지만 상당수의 말갈인은 과거 다종족 국가인 고구려의 주요한 구성원으로 고구려인이었기 때문에,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 많았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발해의 신분 구조는 왕족(황족), 귀족, 평민, 그리고 하층민인 부곡(部曲)과 노비 등으로 이루어졌다. 발해의 신분 구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은 없으나, 남송(南宋)의 홍호(洪皓)가 지은 『송막기문(松漠紀聞)』에 “그 왕은 예전에 대(大)를 성으로 삼았고, 유력한 성씨〔右姓〕로는 고(高) · 장(張) · 양(楊) · 두(竇, 賀의 잘못으로 보기도 함) · 오(烏) · 이(李)로 불과 몇 종에 지나지 않는다. 부곡과 노비와 같이 성이 없는 자는 모두 주인을 따랐다”고 하였다.

고대 사회에서는 성의 유무가 신분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왕족(황족)인 대씨를 제외하고, 우성인 고 · 장 · 양 · 두(또는 하) ‧ 오 · 이씨는 상대적으로 높은 신분에 속한 유력한 귀족 성씨였을 것이다. 문왕 사후 대원의를 몰아내고 대화여(성왕)를 왕으로 추대한 ‘국인(國人)’은 중앙 귀족으로, 발해의 우성 가문이 국인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발해의 모든 기간 동안 기록에 등장하는 발해 인명은 왕을 포함하여 230여 명이고, 유민까지 합치면 380여 명이다. 확인되는 성씨는 60개가 넘는다. 이 가운데 왕족(황족)인 대씨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이 고구려의 왕족 성씨인 고인데, 이들 성씨가 발해에서 성씨를 가진 사람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 다음으로는 왕씨, 장씨, 양씨, 오씨, 이씨, 하씨가 상위를 차지한다. 이들 성씨는 고구려 당시부터 유력 성씨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밖에 고구려계 성씨로 보이는 마(馬) ‧ 해(解) ‧ 배(裵) ‧ 조(趙), 말갈계로 보이는 모(慕) · 여(茹) ‧ 섭(聶), 소그드계로 보이는 안(安) ‧ 사(史), 신라계로 보이는 박(朴) · 최(崔) ‧ 김(金)씨 등도 포함되어 있다. 왕 ‧ 장 ‧ 이 ‧ 마 ‧ 배 ‧ 조씨 등의 성씨를 가진 사람 중에는 한족(漢族)이나 다른 계통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구별되지는 않는다.

평민은 일반적으로 성이 없으며 국가의 호적에 등재되어 편호(編戶)를 이루었다. 이들은 농민이 다수를 차지하고 상인과 수공업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직접 생산과 경제 활동을 담당하며 나라에 조(租)와 요역(徭役), 병역(兵役) 등을 부담한 계층이다. 발해의 신분 구조에서 최하층에 속하는 것은 부곡과 노비로, 대부분 중앙 귀족이나 지방 유력자에 예속되었고 일부는 왕실과 관청에 소속되었을 것이다.

종교 생활

발해에서는 불교, 도교, 무속, 경교(景敎) 등 다양한 종교를 믿었다. 발해의 왕족들은 일찍부터 불교를 숭상하였는데, 713년 12월에 당나라에 갔던 발해의 왕자는 현지 절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제3대 문왕은 ‘금륜(金輪)’과 ‘성법(聖法)’이라는 불교 용어를 존호에 사용하였다. 이것은 문왕이 스스로 불법을 수호하며 천하를 다스리는 지배자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발해의 중심지인 상경(上京) ‧ 중경(中京) ‧ 동경(東京)을 비롯하여 지역 거점지에는 모두 절터가 확인되고 있다. 주요 거점 지역의 사찰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 왕실과 귀족 불교의 모습은 무덤 형태에서도 드러나는데,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 무덤을 비롯하여 고위 귀족의 무덤 위에 탑을 세운 것은 불교식 장례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발해의 불교는 문왕 대를 거치며 크게 발전하였다. 9세기 이후에는 석인정(釋仁貞, ?∼815), 석정소(釋貞素, ?∼828), 살다라(薩多羅), 재웅(載雄) 등과 같은 승려들의 활동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석인정은 제8대 희왕(僖王) 대의 인물로 승려의 신분이었지만 문예에 능하여 814년에 기록을 담당하는 녹사(錄事)의 신분으로 사신단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가 일본에서 지은 시 1수가 전해진다. 귀국 길에 풍랑을 만나 에치젠〔越前〕에 표류하였는데 그곳에서 죽었다. 같이 갔었던 왕효렴(王孝廉)이 먼저 창(瘡)을 앓고 갑자기 죽은 뒤 왕승기(王昇基)와 석인정이 이어 죽은 것으로 보아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석정소는 희왕 대부터 제10대 선왕 대까지 당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813년 가을에 일본 유학승 레이센〔靈仙, ?∼828〕을 만나 사귀었다. 그 뒤로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간 레이센과 일본 조정 사이를 왕래하면서 서신과 물건을 전해 주었다. 828년에 발해의 하정사(賀正使)와 함께 귀국하던 길에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살다라는 설화적인 인물로 당나라 장안에 머물렀는데 새와 짐승의 말을 잘 하였다고 전해진다. 재웅은 발해가 멸망한 뒤인 927년에 60여 명과 함께 고려로 투항하였다.

발해 관료와 관련된 일화로는 762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왕신복(王新福) 일행이 도다이지〔東大寺〕에서 예불하였던 것과 814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왕효렴이 일본 승려인 쿠우카이〔空海, 774∼835〕와 시문을 나눈 기록이 전해진다. 861년에 사신으로 갔던 이거정(李居正)은 일본에 다라니경(陀羅尼經)을 전해주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814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고예진(高禮進)은 금불상과 은불상을 바쳤다.

발해는 왕실에서부터 귀족층 그리고 일반 백성까지 불교를 숭상하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절터와 탑터, 불상, 사리함 등 불교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많다. 탑으로는 영광탑(靈光塔)만이 거의 완전한 형태이며, 정효공주 무덤탑, 마적달탑 등 흔적만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상으로는 금불, 금동불, 동불, 석불, 철불, 전불(塼佛), 소조불(塑造佛) 등이 있고, 벽화 조각도 남아 있다.

석불로는 상경성 2호 절터에 남아 있는 석불과 일본 오오하라〔大原〕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함화 4년명 불비상(咸和4年銘佛碑像)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발해 불상의 전형을 이루는 것은 전불로, 크기가 10㎝ 내외로 아주 작으며 틀빼기를 해서 구웠다. 형식면에서는 관음보살입상(觀音菩薩立像), 선정인여래좌상(禪定印如來坐像), 미타정인여래좌상(彌陀定印如來坐像), 2불병좌상(二佛竝坐像), 3존불(三尊佛), 5존불(五尊佛) 등이 있다. 지역적으로 관음상은 상경에서, 2불병좌상은 동경에서 주로 발견되어 지역별로 관음신앙과 법화(法華)신앙이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 초기의 불교는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불상은 상당수가 고구려 시기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절 지붕에 사용되었던 막새기와의 연꽃 문양도 고구려의 양식을 이었다. 발해 불교의 전통은 다시 발해 유민에게 계승되었다. 요나라에서 발해 유민이 가장 많이 살았던 랴오양〔遼陽〕 지역은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요나라와 금나라의 불교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도교의 경우 도교사원과 같은 유적은 확인되지 않으나, 정혜 ‧ 정효 공주의 묘지명이나 일부 기록에서 그 흔적이 보인다. 공주의 묘지명에는 『장자(莊子)』와 ‘무악(巫岳)’, ‘무산신녀(巫山神女)’, ‘신선(神仙)’ 등 도교와 관련 있는 고사가 인용되었다.

발해 사람 고원고(高原固)는 당나라 문인인 서인(徐夤)을 만나 시를 얻었는데 '인생기하부(人生幾何賦)'라는 시는 도가적인 생활을 동경하는 내용으로 도교적인 관심을 보여준다고 한다. 발해 사람 이광현(李光玄)은 도를 구하기 위해 20세에 출가하여 도교 수련법을 익히고, 불로장생약인 금단(金丹)을 제련하며 자신이 체득한 바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러한 내용이 도교 경전인 『도장(道藏)』에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 발해에는 기독교 일파인 경교가 들어왔던 흔적도 보인다. 발해의 동경성인 팔련성 제2절터에서 발견된 삼존불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고, 러시아 연해주의 아브리코스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새겨진 점토판이 나왔다. 이들 십자가는 가로 세로의 길이가 똑같은데, 이것은 경교 십자가의 특징이다. 또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샤머니즘이 보편적으로 신앙되었다.

생산 경제

발해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어 토양과 기후 조건, 거주민의 생활 방식 등에 따라 지역마다 산업 경제가 일정하지 않았다. 주로 서부와 남부는 농업이 중심이었고, 동부는 농업과 어업 ‧ 수렵이, 북부 지역은 수렵과 목축이 중심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의 특산물에 대해 “그 나라가 귀하게 여기는 것에는 백두산의 토끼, 남해부의 다시마, 책성부의 된장, 부여부의 사슴, 막힐부의 돼지, 솔빈부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면(綿),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가 있고, 과일에는 환도의 오얏, 낙유의 배가 있다”고 하였다. 이 특산물은 나라에서 각 지방에 부과하였던 공납품이면서, 일부는 대외 무역에서도 중요한 상품이 되었다. 이것을 관장하는 관청으로는 인부와 사장시, 대농시 등이 있다.

농작물로는 발해 지역이 전체적으로 한랭하여 내한성이 강하고 생장이 빠른 보리 ‧ 밀 ‧ 메밀 ‧ 수수 ‧ 기장 ‧ 조 ‧ 콩 등을 주로 심었다. 기후가 비교적 따뜻하고 수량이 많은 남부 지역 일부에서는 벼를 재배하였다. 『유취국사』에는 발해 지역이 매우 추워서 논농사〔水田〕에 적합하지 않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두만강 유역에 위치한 노성의 벼는 밭농사로 재배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노성 지역은 물이 풍부하고, 우경(牛耕) 등 발해의 농업 기술이 발달하였다는 점에서 논농사가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 밖에 직물을 짜기 위해 마(麻)를 재배하였고,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명주를 생산하였다. 과일은 오얏, 배, 살구, 앵두 등을 키웠다. 인삼이나 꿀 · 사향과 같은 약재 등은 채집이나 사냥 등으로 획득하였다.

가축으로는 말, 소, 돼지, 개, 양, 닭 등을 키웠고, 수렵으로 매와 꿩 등 날짐승과 담비, 사슴, 호랑이, 표범, 곰, 말곰, 멧돼지, 흰토끼, 사향노루 등 들짐승을 잡았다. 어업은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松花江〕, 무단강〔牡丹江〕, 칭포호〔镜泊湖〕, 싱카이호〔興凱湖〕 등 큰 하천과 호수를 낀 지역과 요동만과 동해 바다를 낀 지역에서 주로 발달하였다. 특산물로는 남해의 다시마, 동해의 대게, 미타호의 붕어 외에도 마른 문어, 숭어, 바다범 가죽, 고래 등이 있다.

수공업으로는 직조, 금속 가공, 요업(窯業) 등이 발달하였다. 베는 옛 옥저 시대부터 유명한 특산물로, 발해가 후당(後唐)에 보낸 세포(細布)와 말갈족이 거란과 교역한 세백포(細白布) 등이 현주의 베와 같은 종류로 보인다. 발해 고분군에서 발견된 베는 직조가 고르고 광택이 아직도 남아 있어 발해 직조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비단 직조술도 발달하여 주(紬), 어아주(魚牙紬), 조아주(朝霞紬) 등 다양한 종류의 비단을 생산하였다. 발해인은 금속 가공에도 뛰어나서 많은 철제 유물을 남겼고, 거란은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의 야철 장인들을 데리고 가 철기를 생산하게 하였다. 구리와 금 ‧ 은을 이용하여 만든 장신구와 거울, 불상, 기물 등은 발해인의 높은 주조 기술을 보여준다.

요업 분야에서는 벽돌과 기와, 흙으로 빚은 장식물 등 건축 자재 분야와 도자기 생산을 들 수 있다. 궁전이나 절, 유력자의 주거지 등에서 주로 쓰인 고급 벽돌 ‧ 기와 ‧ 건축 장식물은 대체로 담당 관청 소속의 장인 집단이나 지역별 생산 집단에서 만들어져 공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경, 동경, 중경 등 주요 건축 유적에서는 생산자를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 문자가 새겨진 기와가 많이 나왔다. 고급 도자기의 경우도 전문 장인 집단이 생산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3가지 유약을 배합하여 만든 발해 삼채(渤海三彩)가 유명하다.

상업과 교역

상업과 교역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지역 간 물류가 쉽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로가 발달해야 한다. 발해는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하며 5개의 주요 대외 교통로를 함께 정비하였다. 동경 용원부는 동남쪽으로 바다에 접해 있는데, 일본으로 가는 일본도(日本道)의 출발지였다. 동경 관할의 염주(지금의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의 서해안에 도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남해부는 신라로 이어지는 신라도(新羅道)에 해당하며, 여기서부터 국경인 니하(泥河)를 건너 신라의 천정군(泉井郡)을 거쳐 왕경이 있는 경주로 들어갔다. 천정군에서 남해부를 거쳐 책성부(즉 동경 용원부)까지는 모두 39개의 역(驛)이 있었다.

당나라의 장안으로 가는 길은 조공도(朝貢道)라고 하는데, 압록부에서 출발하여 압록강 하구에서부터 요동반도 연안의 뱃길을 따라 서행하다가 뤼순〔旅順〕 지역에서 남하하여 당나라의 등주로 들어가 장안까지 이어졌다. 당나라의 요서 지역 거점인 영주로 이어지는 교통로는 영주도(營州道)라고 하는데 장령부에서 출발하였다.

부여부에서 거란으로 이어지는 길은 거란도(契丹道)라고 한다. 영주도와 거란도는 당나라와 거란 외에 발해의 서쪽과 서북쪽에 위치한 실위, 말갈, 돌궐, 회흘 등과 교통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그리고 흑수말갈 지역으로 가는 흑수도(黑水道)와 초원의 길, 담비의 길 등이 발해로 이어졌다. 대외 교통로는 국내의 주요 간선도로와 함께 국내외 상업 ‧ 교역망을 형성하였다.

발해의 교통로를 따라 24개의 주춧돌로 되어 있는 건물지(일명 24개돌 유적)가 10여 개소 발견되었는데, 이들 유적은 역참 제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5경과 같이 리방(里坊)으로 구획하여 세워진 계획 도시 안에서는 외성 안에 시장터를 지정하여 상업 행위를 할 수 있도록 감독하였고, 지방의 일반 백성 사이에서는 자연 발생적인 장터나 보부상들에 의해 상행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발해가 직접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였는지는 논란이 많으며, 아직까지는 자체 주조한 화폐는 발견되지 않았다.

상업과 교역에서 주로 거래한 물품은 발해의 여러 산업 분야에서 생산된 특산품을 위주로 하였으며, 동남아시아나 중국, 거란, 일본 등 주변 나라의 상품을 중개 무역하기도 하였다. 대외 교역은 공무역과 사무역으로 구분된다. 발해는 대외 교역을 주로 국가가 주도하였는데, 교역에 말갈 등 복속 집단의 수령층을 참가시켜 복속에 대한 경제적 보상을 주는 통치 정책을 펼친 것이 특징이다. 기록상 발해가 가장 활발하게 무역을 하였던 대상은 당나라와 일본이었다.

공무역은 외교 의례에서 조공(朝貢) ‧ 선물, 회사품(回賜品)을 주고받는 형태와 사신단과 사행에 따라 간 상인들에 의해 행해지는 무역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변경 지역에서 행해지던 호시(互市)도 공무역에 해당한다. 발해와 당과의 공식적인 교역은 713년 12월에 당나라에 도착한 발해 왕자가 시장에서 교역할 수 있기를 청하여 허락받은 것이 첫 사례이다.

발해가 당나라에 보낸 상품으로는 담비 ‧ 호랑이 · 해표 · 곰 ‧ 흰토끼 등의 가죽과 말 · 매 등의 짐승, 고래 · 마른 문어 · 다시마 등의 해산물, 인삼 · 우황 · 백부자(白附子) ‧ 꿀 등의 약재가 주를 이뤘다. 그리고 두어 차례 여자 · 아이 · 노비 등 사람을 보낸 기록도 있다. 당나라에서 발해로 들여온 물품에는 백(帛) ‧금(錦) 등 비단이나 옷가지, 금 · 은으로 만든 그릇 등이 있었다.

9세기에 들어서는 사무역이 발달하였는데, 발해관(渤海館)이 있던 산동과 중국 동남해 지역에서 무역을 하였다. 특히 발해의 말은 등주(登州)와 청주(靑州)에서 많이 거래되었고, 839년에는 발해가 숙동(熟銅)을 가져다가 교역한 기록이 전해진다.

일본과의 경제 교류 역시 공무역이 주를 이루었고, 사무역도 일부 행해졌다. 발해는 일본에 35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였고, 일본은 발해로 13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였다. 발해와 일본과의 교섭은 처음에는 정치 ‧ 군사적 목적을 띠었지만, 뒤에는 점차 상업 ‧ 문화적 성격으로 변하였다. 특히 발해의 대일 교섭은 교역에 중심을 두고 빈번하게 대규모로 사신단을 파견하여 일본의 경제에 부담을 줬다.

일본은 이러한 발해 사신단의 모습을 보고 이웃 나라의 손님이 아닌 상인과 마찬가지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발해 사신의 일본 방문 시기를 6년에 한 번, 12년에 한 번으로 제한하고 사사로운 교역을 금지하며 통제하려고 하였으나 별로 효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일본과 교역에서 발해가 가져간 상품은 담비 가죽 · 표범 가죽 · 곰 가죽 ‧ 인삼 ‧ 꿀 등 발해의 특산품이 주를 이루었고, 거란의 큰 개, 대모(玳瑁)로 만든 술잔 등 다른 나라의 물산도 포함되었다. 일본에서 들여온 물품에는 비단 · 면포 · 실 등의 옷감, 황금 ‧ 수은 ‧ 칠(漆) ‧ 부채 등이 있다.

발해의 문화와 예술

문자 생활

발해의 문화 발전에는 문자 생활의 발전이 중요한 배경이 된다. 그런데 발해의 문자 생활과 관련해서 논란이 되는 것은 고유한 문자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12세기 초의 일본 설화집인 『강담초(江談抄)』에는 발해가 만든 글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연희(延熹: 901~922) 때에 발해국의 사신 2명이 일본에 왔는데, 첩장(牒狀)에 쓰인 사신의 이름은 모르는 문자였다. 일본인 키케〔紀家〕가 그것을 보고 비록 모르는 문자였지만, 풀어 읽어 신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발해의 문자와 관련해서는 중국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옥진총담(玉塵叢談)』에는 발해에서 당나라로 보낸 서신을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자, 이태백만이 이를 해독하고 회답하였다고 한다. 명나라 시기의 야설인 『고금기관(古今奇觀)』과 『 수당연의(隋唐演義)』에도 이태백이 발해의 문자를 해독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문자가 마치 새의 발자국을 닮았다고 하였다.

근대 이후 발해 유적에서는 문자가 새겨진 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다. 기존 한자와는 다른 글자들도 있어 발해 문자에 대한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발해 기와에 보이는 한자의 90%는 기존 글자와 다르지 않고, 그 외 상당수는 한자의 간체, 약체, 이체로 볼 수 있다. 확실히 독특한 글자도 있지만, 거란이나 여진과 같이 독립적인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공식 문자는 한자를 사용하였고, 일부 한자와 다른 글자는 고구려나 발해가 필요에 의해 새로 만든 글자일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한자를 수용하여 문자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발해는 건국할 때부터 이미 한자를 습득한 상태였다. 따라서 『구당서』에는 발해에 “문자(文字)와 서기(書記)가 있다”고 하였고, 『신당서』에서는 “서계(書契)를 잘 안다”고 하였다. 발해가 만든 서책은 거의 전하지 않지만, 일본에는 발해에서 가져간 다라니경이 전해지고 있다. 중앙에는 문헌을 정리하고 관리하던 문적원이 있었고, 체계적으로 인재를 양성하던 국가 교육 기관인 주자감이 있었다. 교육 기관에 세웠던 비석에는 “유생(儒生)이 동관(東觀)에 북적인다”고 하였다.

문서 행정 체계도 잘 갖추어져 왕의 명령에 따라 초고(草稿)를 작성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던 조고사인이 중대성에 속해 있었다. 또한 외국에 파견된 사신 가운데에는 문서와 기록을 담당하는 관리로 녹사가 있었다. 문자 유물로는 정혜, 정효 공주의 묘비, 개심사(開心寺) 출토 글쪽지, 영광탑의 명문, 인장과 동경 · 청동부절 · 불상 등의 명문이 있다. 최근에 발견된 발해 황후 2명의 묘지명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그 밖에 기와 등에 새겨진 명문도 많이 발견되고 있어, 발해에서 문자 생활이 발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에서 문자 생활이 발전한 사실은 발해가 9세기 들어 ‘해동성국’으로 불리게 된 문화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

유학은 삼국시기부터 국가의 통치와 교육에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발해는 고구려에서 이어지는 유학을 바탕으로 당나라와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발해는 714년 처음으로 당나라에 학생을 보내어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공부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신 파견과 숙위(宿衛) 등을 통해 선진 문화를 배우게 하였고, 유학 관련 서적을 당나라에서 수입하기도 하였다.

발해에서 본격적으로 유학이 발전하는 것은 문치에 힘을 기울인 문왕 때이다. 문왕은 즉위 다음 해인 738년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당례(唐禮)』 ‧ 『삼국지(三國志)』 ‧ 『진서(晋書)』 ‧ 『삼십육국춘추(三十六國春秋)』를 구하였다. 『당례』는 유학에 입각한 국가 통치 규범과 의례를 담고 있던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로, 문왕 시기의 통치제도와 국가의례 정비에 중요한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그 외 서적들은 문적원에 소장하거나 주자감에서는 귀족 자제들을 교육하는 데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제도와 문장을 살펴보면 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 많다. 관청의 명칭을 보면, 궁중에서 후궁의 업무를 담당하던 항백국(巷伯局)의 항백은 『시경(詩經)』에서 따온 것이다. 무엇보다도 6부의 명칭을 충 · 인 · 의 · 지 · 예 · 신이라는 유교 덕목으로 삼은 것은 발해에서 유학의 이념이 얼마나 중시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문왕의 존호인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에 있는 효감(孝感)이란 단어도 유교에서 강조하는 덕목이다.

문왕의 두 딸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지명에는 중국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들을 두루 섭렵하여 변려체 문장을 구사하고 있어서 당시 발해 지식인의 유학적 소양을 보여준다. 묘지에 인용된 경전으로는 『상서(尙書)』 ‧ 『춘추(春秋)』 ‧ 『좌전(左傳)』 ‧ 『시경』 ‧ 『역경(易經)』 ‧ 『예기(禮記)』 ‧ 『맹자(孟子)』 ‧ 『논어(論語)』 등이 있다. 공주들은 여사(女師)에게 생활 예절과 함께 유학에서 강조되는 여성의 덕목과 소양을 배웠다.

외국과 주고받은 국서(國書)에서도 유학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국서는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말들로 가득 차 있는데, 상대국에게 문화적 소양을 드러내기 위하여 유학적 지식과 고사, 미사 등을 많이 사용하였다. 얼마나 이를 잘 활용하여 세련되게 썼는가가 국가의 격을 보여준다고 여겼다. 이러한 국서에는 상대에 대한 칭찬이나 평가 역시 유학과 관련한 내용을 담은 경우가 많았다.

제10대 선왕은 일본으로부터 “신의로 본성을 이루고, 예의로 입신하였다〔신의성성, 예의입신(信義成性, 禮儀入神)〕”, “세속에는 예악을 전하고, 가문에는 의관을 이었다〔속전예악, 문습의관(俗傳禮樂, 門襲衣冠)〕”, “믿음은 금석과 같이 확고하고 절개는 소나무 · 대나무처럼 곧다〔신확금석, 조정송균(信確金石, 操貞松筠)〕”라는 말을 들었다.

제11대 왕 대이진은 중국으로부터 “대대로 충정을 이어받았고, 사람 됨됨이는 인후에 바탕을 두었다〔대습충정, 기자인후(代襲忠貞, 器資仁厚)〕”는 평가를 얻었다. 이러한 평가는 상투적이지만 발해인들이 상당한 유학적 소양을 갖추었던 사실을 보여준다.

발해인의 이름에서도 유학의 영향이 보이는데, 왕의 이름인 대원의(大元義), 대언의(大言義), 대명충(大明忠), 대인수(大仁秀)나 왕족의 이름인 정혜(貞惠)공주, 정효(貞孝)공주, 대의신(大義信), 대성경(大誠慶), 대성신(大誠愼) 등이 그 예이다. 발해에서 유학이 발달한 것은 당나라의 빈공과에서 10여 명의 합격자를 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발해인은 이 빈공과에서 신라인과 함께 수석과 차석 자리를 두고 다툴 정도로 학문적 자신감을 드러내었다.

한문학

발해의 문자 생활과 유학이 발달하며 동시에 발해인의 한문학 수준도 높아졌다. 한문학은 발해의 귀족층과 관인들에게 기본 소양이었고, 이웃 나라와의 외교 교섭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한문학이 뛰어난 사신을 외국에 파견하여 자국의 문화 수준을 선양하는 것이 외교 수단이 되었다. 이를 이른바 문화(문예) 외교라고 한다.

먼저 발해의 한문학 실력을 볼 수 있는 것은 외교 문서이다. 발해는 당나라 · 일본 · 신라 · 거란 · 돌궐 등 이웃 나라들과 교류를 하였지만, 발해의 외교 문서는 당나라와 일본과 주고받은 일부만이 전해진다. 발해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145차례 이상 확인되는데, 당나라에 보낸 문서로는 연대를 확인할 수 없는 하정표(賀正表) 1편만이 남아 있다.

한편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는 모두 23편이 남아 있다. 발해 국왕이 보낸 국서(國書) 16편과 중대성에서 일본 태정관(太政官)에 보낸 중대성첩(中臺省牒) 7편이다. 이들은 외교 문서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고 있고 대부분 상투적인 어구로 채워져 있지만, 국왕과 중앙 관청의 이름으로 작성된 문서여서 발해에서 가장 높은 문장 실력을 보여준다.

발해의 한문학 수준은 9세기가 되면 당나라와 일본에서도 감탄할 만큼 올라가는데, 특히 발해의 사신들이 일본 문인들과 교류한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발해 초기에는 군사적 목적을 위해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주로 무관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8세기 후반부터는 국내외 정세의 안정을 기반으로 문관을 주로 사신으로 보내었고, 9세기 들어서면서 문인들이 파견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일본 문인들과 시문을 교환하였던 발해 사신으로는 758년에 파견된 부사 양태사(楊泰師), 814년에 파견된 대사 왕효렴과 부사 고경수(高景秀) 및 녹사 석인정 등이 있다. 또한 858년에 파견된 부사 주원백(周元伯), 871년에 파견된 대사 양성규(楊成規)와 부사 이흥성(李興晟), 882년에 파견된 대사 배정(裴頲), 894년에 파견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부사, 907년과 919년에 파견된 대사 배구(裴璆) 등이 있다. 배구는 발해가 멸망한 뒤 동단국의 사신으로 929년 한 차례 더 일본에 갔다.

일본에서는 문장에 조예가 있는 발해 사신을 접대하는 데에 무척 신경을 썼다. 문장에 능한 사람을 특별히 선별하여 발해 사신을 응대하였는데, 양태사 일행을 접대하는 임무를 맡았던 미야코 코토미치〔都言道〕는 이름이 발해 사신을 접대하는 데 적당하지 않다고 개명까지 하였다. ‘칠보지재(七步之才)’를 지닌 배정이 사신으로 갔을 때는, 문장에 능하지 못한 후지와라 요시즈미〔藤原良積〕가 부끄러워하며 연회 도중에 퇴장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발해와 일본 문인 사이에 주고받은 시는 일본의 『경국집(經國集)』,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 『관가문초(管家文草)』, 『부상집(扶桑集)』, 『강담초(江談抄)』 등에 전한다. 이 중 발해 문인의 작품으로는 양태사의 2수, 왕효렴의 5수, 석인정의 1수가 전해진다. 시는 오언율시, 칠언고시, 칠언절구의 형식을 띄는데 칠언으로 이뤄진 것이 많았다.

내용은 멀리 타국에서 고국을 그리는 향수를 그린 것이 있는가 하면, 일본 조정으로부터 환대를 받아 즐거운 마음을 표현한 것도 있다. 고국을 그리는 서정적인 시로는 양태사의 ‘ 야청도의성(夜聽擣衣聲)’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서 가을밤에 다듬이질 소리를 듣고 고국에 있는 부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일본 궁궐의 연회에 참석하여 환대를 받아 즐거운 마음을 표현한 왕효렴의 ‘봉칙배내연(奉勅陪內宴)’과 봄날에 비를 보고 정자(情字)를 얻었다는 내용의 ‘춘일대우 탐득정자(春日大雨 探得情字)’ 시도 유명하다.

그 밖에 발해인의 시는 승려인 정소가 중국에서 일본 승려 라이센〔靈仙〕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곡 일본국 내공봉 대덕 영선화상 시병서(哭日本國內供奉大德靈仙和尙詩幷序)’ 1수가 엔닌〔円仁〕의 『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전해져 온다.

한편 발해 문인이 당나라 문인과 교류하며 남긴 작품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발해인들이 문학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가는 고원고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다. 그가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에 과거시험에 함께 급제한 서인(徐夤)을 만나러 민중(閩中, 福建省 福州) 지방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때 고원고는 서인이 지은 ‘참사검부(斬蛇劍賦)’, ‘어구수부(御溝水賦)’, ‘인생기하부(人生幾何賦)’를 발해 사람들이 집집마다 병풍에 금으로 써놓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의 문인인 온정균(溫庭筠)은 발해를 “문물제도에서 당과 한 집안을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는데, 이를 보아 발해의 한문학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학 전통은 발해 유민들에게까지 계승되었다. 발해 멸망 뒤에 유민으로서 문학 작품을 남긴 인물도 적지 않은데, 요나라 때의 천조제(天祚帝)의 문비 대씨(文妃 大氏), 금나라 때의 왕준고(王遵古) · 왕정견(王庭堅) · 왕정균(王庭筠) · 왕만경(王萬慶) 집안, 고간(高衎) · 고헌(高憲) 집안, 장여위(張汝爲) · 장여능(張汝能) 형제 등이 유명하다.

미술과 공예

발해시대의 그림으로는 고분에 그려진 벽화가 대표적이다. 1959년 둔화〔敦化〕 리우딩산〔六頂山〕 고분군의 여러 무덤에서 벽화가 처음 발견되었으나, 모두 파손되어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었다. 1980년에 허룽〔和龍〕 룽터우산〔龍頭山〕 고분군의 정효공주 무덤에서 거의 완전한 인물화가 발견되었고, 1991년 닝안 산링둔〔三陵屯〕 2호묘에서도 벽화가 발견되었다. 정효공주 무덤에는 널방 동 ‧ 서 ‧ 북 세 벽에 시위 · 내시 · 악사 · 시종 등 10명이, 널방으로 이어지는 널길 동 ‧ 서벽에는 무사 2명이 그려져 있다. 모두 돌벽 위에 백회를 바르고 그렸다. 널받침〔棺臺〕 남쪽 측면은 백회 위에 그린 사자머리 같은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나 손상이 심하다.

인물들은 대체로 얼굴을 하얗게 칠하였고, 둥글고 살이 쪄서 풍만한 모습을 하고 있다. 눈은 작고 눈썹은 가늘며 코는 낮고 뺨은 둥글며 붉은 입술은 작고 동그랗다. 이러한 인물 표현은 대체로 당나라 때 유행하던 화풍이다. 그러나 무덤의 구조나 사신도, 병풍, 시녀 등이 등장하지 않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의 복식을 보면 머리에 높은 상투를 틀고 복두나 말액(抹額) · 투구를 썼다. 몸에는 단령포나 갑옷을 입었다. 단령포는 깃이 짧아서 목둘레선에서는 속옷이 보이지 않는다. 허리 아래에서 옆트임을 통해 속에 입은 중단(中單) · 내의(內衣) · 고(袴)가 드러난다. 소매에는 넓은 것과 좁은 것이 있고, 옷자락이 발등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다. 겉옷에는 여러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겉옷의 색깔은 갈색 · 붉은색 · 짙푸른색 · 흰색 · 자색 등이 있다. 허리에는 가죽띠를 둘렀고 신발은 검은 가죽신이나 미투리를 신었다.

산링둔 2호묘의 널방과 널길의 벽 및 천장에도 백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렸다. 이 무덤에는 인물과 함께 꽃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인물 그림은 널방 동쪽과 서쪽 벽에 각각 4명, 북쪽 벽에 3명, 남쪽 널길 입구 좌우에 각각 1명, 널길 동 · 서쪽 벽에 각각 무사 1명씩 도합 15명이 그려져 있지만 훼손이 심하다. 널방 천장과 널길 천장에는 꽃 그림이 있다. 삼각고임한 천장에는 흰색 바탕에 노란색 꽃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연꽃이나 모란꽃으로 보인다.

함경북도 화대군 금성리 고분에서는 사람의 다리 등이 묘사된 벽화편이, 상경성 절터에서는 꽃이나 천불도(千佛圖)가 그려진 벽화편이, 연해주 아브리코스(Abrikos) 절터에서는 번개무늬와 직물무늬가 섞인 벽화편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 복두를 쓴 인물의 얼굴이 그려진 벼루와 새와 별모양 등이 그려진 토기편들이 발견되었다.

화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데, 원나라 때에 편찬된 『도회보감(圖繪寶鑑)』에는 금나라 때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 대간지(大簡之)가 소나무와 돌 및 작은 풍경을 잘 그렸다고 한다. 발해의 공예품으로는 조각 · 도자기 · 기와 · 벽돌 · 금속 세공품 등이 있다.

상경성 2호 절터에는 현무암으로 만든 높이 6m의 8각형 석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 상하대석에 새겨진 연꽃과 목조 건축 양식이 표현되어 있는 옥개석과 화사석은 발해 조각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정혜공주 무덤에서 출토된 화강암으로 된 돌 사자상은 크기가 작지만 강한 힘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밖에 조각품에 속하는 것으로는 상경성에서 출토된 귀부(龜趺)와 짐승머리가 조각된 그릇 다리 등이 있다.

발해의 그릇은 도기(陶器)와 자기(磁器)가 있다. 일반 백성들은 유약을 바르지 않은 도기를 사용하였다. 유약을 바른 도기는 주로 귀족이나 왕실에서 사용하였고, 3가지 유약을 사용하여 만든 발해 삼채가 유명하다. 허룽 베이따〔北大〕 고분군에서 발견된 삼채 도기, 허룽 스꿔〔石國〕 고분군과 룽하이〔龍海〕 고분군의 삼채 도용, 산링둔 4호묘의 삼채 향로가 대표적이다. 자기는 수량이 아주 적으며 대부분 조각 상태로 발견되었다. 상경성에서 백자완(白磁碗)과 자색관(紫色罐) 편이 발견되었고, ‘함화(咸和)’라는 발해 연호가 바닥에 먹으로 쓰인 갈색 교유(絞釉)를 바른 호리병이 발견되었다.

건축 자재로는 기와와 벽돌 · 치미 · 용면와(龍面瓦) · 기둥밑장식〔柱礎裝飾〕 등이 있다. 발해 기와에는 암키와 · 수키와 · 치미 · 용면와 · 기둥밑장식 등이 있다. 기와 가운데 유약을 바른 것은 녹유가 대부분이고, 자색 유약을 바른 것도 일부 있다.

암키와는 겉에 새끼줄 · 그물 · 마름모꼴 무늬 등이 장식되어 있고, 안쪽에는 포목 무늬가 많다. 가장자리에는 손가락으로 누른 무늬나 연주문(連珠紋) 또는 톱날 무늬가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수키와는 막새기와가 대표적인데,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연꽃잎 무늬가 주종을 이룬다. 연꽃잎은 대체로 양식화되어 6개가 기본을 이루었다.

치미는 상경성 · 서고성 · 연해주 아브리코스 절터 등에서, 용면와는 상경성 · 서고성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기둥밑장식은 발해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로 커다란 고리 모양으로 기둥과 주춧돌이 만나는 부분을 씌워 장식하면서 비가 들이쳐 기둥이 썩는 것을 방지하였다.

발해의 금속 공예는 금 ‧ 은 ‧ 동 ‧ 철 등을 사용하여 장신구, 그릇, 무기, 사리장엄구 등을 만들었다. 창덕 3호분에서 나온 태환식 귀고리는 고구려 양식을 이었다. 룽하이 고분군 14호분에서 나온 금관 장식은 기다란 잎사귀가 세 갈래로 갈라진 모양인데, 가운데 것은 위로 곧게 솟아 있고 양쪽은 뒤로 날개를 편 듯이 구부러져 있어 고구려 조우관과 매우 닮았다.

그리고 14호분에서는 금판을 붙인 옥대(玉帶) 등이 함께 발굴되었던 13호분에서는 금팔찌와 금비녀 등이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발해 고분에서는 팔찌, 귀걸이, 머리꽂이 등의 장식이 발견되었다. 발해의 유적에서는 금동과 청동 ‧ 철 등의 과판을 가죽에 붙여 만들었던 과대가 여러 점 출토되었는데, 지린성 허룽현 허난둔〔河南屯〕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과대가 대표적이다.

발해는 불교 국가로 돌과 소조로 불상을 많이 만들었고, 금과 은으로도 만들었다. 814년에 당나라에 갔던 발해 사신은 금과 은으로 만든 불상을 당나라에 선물하였다. 발해의 상경성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은 현재 일본 도쿄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사리장엄구의 경우 닝안현 투타이쯔〔土臺子〕 절터에서 발견된 것이 대표적이다. 이 사리장엄구는 2중의 석함과 철함 ‧ 동함 ‧ 칠갑(漆匣) ‧ 은함 ‧ 은병 ‧ 유리병 등 모두 8중의 용기로 구성되어 있다. 청동 인물상으로는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 부근의 강가에서 발견된 청동용(靑銅俑)과 상경성과 연해주 우수리스크 등에서 발견된 기마인물상 등이 있다.

음악과 무용

발해의 궁중 음악과 무용은 예제와 제사를 담당하던 의부와 태상시, 그리고 외교 사절의 접대와 빈례를 담당하던 사빈시에서 의례를 행할 때 반드시 포함되었다. 발해에서도 교방이 설치되어 전문 악사(樂師)와 무사(舞師)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발해의 음악은 일본과의 교류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기진몽(己珍蒙) 일행은 740년 정월에 연회에서 본국의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이것이 발해 음악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리고 777년 사례(射禮)에서 사도몽(史都蒙) 일행도 본국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이때 연주한 음악은 속악(俗樂)보다는 아악과 같은 관악(官樂)이거나 귀족층의 음악이었을 것이다.

발해의 음악은 일본의 왕실 법회나 궁중행사에서 연주되었는데, 749년에 도다이지〔東大寺〕에서 개최된 법회에서 연주된 기록이 처음이다. 이 무렵에 ‘ 발해악(渤海樂)’은 정식으로 일본의 궁중음악이 되었고, 발해 사신들을 접대할 때에 의례적으로 연주되었다. 외교 의례에서 발해악을 제대로 연주하기 위해 일본 조정에서는 유학생을 발해에 파견하여 직접 배워 오게 하기도 하였다.

발해 음악은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중국의 송나라와 금나라에 이어졌는데, 송에서는 1185년에 발해 음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며 명맥이 끊어졌다. 금나라에는 발해교방(渤海敎坊)을 설치하여 제도적으로 발해 음악의 명맥을 이었다.

발해 악기로는 송나라 때까지 발해금(渤海琴)이 있었지만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이 발해금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거문고와 같다는 견해와 3현(弦)으로 된 악기라는 주장이 있다. 정효공주 무덤의 서쪽 벽에 그려진 3명의 악사 그림을 보면 각기 보자기에 싼 악기를 들고 있다. 외형으로 보아 박판(拍板), 공후(箜篌), 비파(琵琶)로 추정된다.

무용과 관련해서는 『속일본기(續日本記)』에 발해 사신이 일본에 도착하여 영객사(領客使)의 환영을 받을 때 말에서 내려 무도(舞蹈)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송나라 진양(陳暘)이 지은 『악서(樂書)』 「호부(胡部)」에는 말갈무(靺鞨舞)라는 춤이 보이는데 발해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는 거란의 유하관(柳河館, 현재 중국 허베이 灤平縣 紅旗鎮 부근) 근처에 살던 발해 유민들이 답추(踏鎚)라는 춤을 추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는 “세시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논다. 먼저 노래와 춤을 잘 하는 사람을 여러 명 앞에 내세우고 그 뒤를 남녀가 따르면서 서로 화답해 노래 부르며 빙빙 돌고 구르는데 이를 답추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발해에서 백성들 사이에 춤추고 노래 부르는 일종의 집단 무용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침 2008년에 러시아 연해주의 콕샤로프카-1 성터에서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은 여인들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모습이 장식된 발해시기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마치 강강술래를 연상하게 하는데, 발해의 집단 무용의 하나로 보인다.

건축 문화

발해의 건축은 성 ‧ 건물 ‧ 사찰 등이 있다. 성터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는 1933년과 1934년에 일본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가 동경성(東京城: 지금의 상경성)을 발굴한 것이 최초이다. 그 뒤 많은 성터들이 확인되었다. 성을 쌓는 재료로 볼 때에 토성(土城), 석성(石城), 토석 혼축성(土石混築城)이 있다. 평지성은 토성과 혼축토성이 많고, 산성은 석성과 혼축토성이 많다. 평면은 긴네모모양〔長方形〕 · 네모모양〔方形〕 · 부정형 등이 있다. 장성의 형태를 이룬 것으로는 무단장변장〔牡丹江邊墻〕이 대표적이다.

발해는 전국을 부(경)-주-현으로 설정하여 통치하였다. 주요 관청의 소재지에는 성을 쌓아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도성터로는 상경성(上京城), 서경 서고성, 동경 팔련성(八連城)이 있다. 남경은 함경남도 북청(北靑)의 청해토성(靑海土城)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경은 닌장〔臨江〕 지역이 유력하나 성의 흔적은 불명확하다.

지린성 둔화에 있는 청산쯔산성은 대조영이 처음 성을 쌓고 나라를 세웠던 동모산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최근 중국 학계에서 투먼〔圖們〕 모판춘〔磨盤村〕 산성을 동모산으로 보는 설이 제기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부성으로는 수미성〔蘇密城〕이 장령부의 소재지로, 따청쯔고성〔大城子古城〕이 솔빈부의 소재지 등으로 꼽히고 있다. 크라스키노(Kraskino)성 · 원터허부성〔溫特赫部城〕 · 난청쯔고성〔南城子古城〕 · 난후터우고성〔南湖頭古城〕 등은 주급 성으로 추정된다.

발해 성의 변화 과정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청산쯔산성처럼 방어 기능을 중요시하여 산성에 의지하다가 8세기 중반 이후 국내외 안정을 기반으로 평지성을 쌓으며, 고구려와 같이 산성과 평지성이 세트를 이루는 방어 체계를 갖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한편 초기에는 환런〔桓仁〕 오녀산성이나 지안〔集安〕 환도산성에서 볼 수 있는 듯이 고구려 성의 전통을 계승하였지만, 이후 당나라 문화를 수용하며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한 평지성 중심의 방어 체계로 전환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발해시대의 건물로는 궁전이나 관청터 등이 발굴되었다. 궁전과 관청 자리는 상경성과 서고성 ‧ 팔련성에서 조사된 것이 대표적이다. 도시 계획에 의해 공간을 구획하고 건물을 배치하였다. 상경성 궁전은 5개의 건물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각 건물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왕이 거처하던 건물지에서 온돌이 발굴되었는데, 고구려식 온돌을 발전시킨 형태이다.

궁성의 동쪽 구역에는 어화원(御花園)으로 불리는 후원이 있는데, 인공으로 만든 못과 산이 있고 정자 터도 확인되어 발해의 정원 건축을 엿볼 수 있다. 상경성 북쪽 인근의 무단강〔牧丹江〕에는 발해 때 만들어진 오공교(五孔橋), 칠공교(七孔橋)로 불리는 교량 유적이 남아 있다.

왕실과 귀족들의 주거지 및 사찰의 전각은 흙이나 돌로 올린 기단에 주춧돌을 놓고 굵은 나무 기둥을 세워 기와를 얹었다. 이러한 건축물은 기초 부분과 건축 자재를 제외하고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외형을 정확히 알 수 없다.

1987년 연해주 하산지구의 비짜지만에서 발견된 불판(佛板)에 불상이 안치된 건물과 상경성 절터의 석등 상부에 조각된 건물의 형태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초석 등을 통해 볼 때 대체로 기와를 얹은 건물은 맞배지붕우진각지붕팔작지붕이 기본을 이루고, 상경성의 팔보유리정과 같은 누각식 건물은 사각 ‧ 육각 ‧ 팔각 지붕을 이루었다. 건물 축조에 사용되었던 기와와 벽돌은 도성과 지방 행정성 주변의 가마터에서 구웠는데, 상경성 부근의 싱산〔杏山〕과 크라스키노 성에서 발굴된 것이 대표적이다.

평민들의 주거지는 반지하식 건물이 많이 보이는데 둥닝〔東寧〕 단결(團結) 유적에서 발굴된 것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화덕자리나 온돌 장치가 딸린 반지하식 주거지도 많이 확인되고 있어 발해는 상류층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온돌을 많이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절과 탑 자리도 많이 확인되었다. 발해의 교통로를 따라서는 24개의 주춧돌이 남은 건축 유적 10여 곳이 발견되었다. 건물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대체로 역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24개돌 유적을 요나라나 금나라 때의 것으로 보는 시각이 늘고 있다.

매장 문화

발해 무덤은 초기 수도인 구국(舊國)이 있었던 지린성 둔화를 비롯하여 상경 ‧ 중경 ‧ 동경 ‧ 남경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 및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수천 기가 발견되었다. 둔화에 있는 리우딩산 고분군에서는 160여 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1949년 정혜공주 무덤이 발견되면서 발해 초기 왕실과 귀족들이 묻힌 고분군으로 밝혀졌다.

중경 지역인 허룽 룽터우산 고분군은 제일 남쪽의 스꿔〔石國〕 고분군, 중간의 룽하이 고분군, 북쪽의 룽후〔龍湖〕 고분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룽하이 고분군에서 1980년 정효공주 무덤이 발견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 15기를 추가 발굴하면서 문왕과 간왕의 황후인 효의황후와 순목황후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인근의 베이따〔北大〕 고분군에서는 약 70기 정도가 발굴되었고, 서고성 남쪽에서는 왕릉급인 허난둔 고분이 발굴되었다.

상경성 부근에서는 왕실 무덤인 산링둔〔三陵屯〕 고분군이 발굴되었다. 벽을 돌려서 왈(曰)자 모양의 능역을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남쪽은 제사구역이고 북쪽은 무덤구역인데, 이 능역에서는 3기가 발굴되었고, 부근에서 1기가 더 발굴되었다. 2호묘에서는 정효공주묘의 벽화와 비슷한 벽화가 발견되었으며, 4호묘에서는 발해의 특징적인 삼채 향로가 발굴되었다.

상경성 서북쪽에 있는 훙준어장〔虹鱒魚場〕 고분군에서는 1990년대에 고분 323기, 방단(方壇) 7기, 집터 1기를 발굴하고, 유물 1,800여 점을 수습하였다. 무덤은 돌무덤〔석축표(石築墓)〕, 전돌무덤〔전축묘(塼築墓)〕, 돌전돌혼축무덤〔석전혼축묘(石塼混築墓)〕 3가지 유형이 있다. 영안 따주둔〔大朱屯〕 고분군 역시 규모가 큰데 약 20여 기만이 발굴되었다.

북한 함경도 일대에는 회령 궁심고분군, 청진 부거리 일대의 고분군(다래골, 연차골, 합전, 옥생동, 토성 등), 화대 금성리 고분군 등이 있는데, 금성리 고분에서는 벽화 일부가 발견되었다. 근래에는 청진 부거리 고분군과 북청 ‧ 회령 일대의 발해 고분을 발굴하여 국내에서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도 발해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 체르냐티노(Cherniatino) 5 고분군에서 159기를 발굴한 것이 가장 큰 성과이다. 움무덤이 대부분이지만 돌방무덤〔석실묘(石室墓)〕, 돌깐무덤〔부석묘(敷石墓)〕, 돌돌림무덤〔위석묘(圍石墓)〕, 무시설 무덤 등 다양한 고분 양식이 확인되었다. 매장법에서도 매장, 화장, 굴지장(屈肢葬), 단인장(單人葬), 다인장(多人葬), 1차장, 2차장 등 여러 모습이 보인다. 이 고분군은 지방 사회에 발해의 중앙 매장 문화가 침투되어 들어가는 모습을 추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발해 고분에는 흙무덤, 돌무덤, 벽돌무덤 등이 있다. 흙무덤은 건국 이전부터 유행하였던 양식이다. 돌무덤은 다시 돌방무덤, 돌덧널무덤〔석곽묘(石槨墓)〕, 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으로 나뉜다. 이 중 돌방흙무지무덤〔석실봉토묘(石室封土墓)〕이 최상층의 무덤이다.

돌을 이용하여 무덤을 쌓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고구려에서 영향을 받았다. 특히 돌방흙무지무덤은 고구려 후기의 양식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것인데, 정혜공주의 무덤이 대표적이다. 벽돌무덤은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정효공주의 무덤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산링둔 고분군의 고분은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축조하였다.

매장 방식으로 단인장 · 2인 합장 · 다인 합장이 모두 보인다. 2인 합장은 부부 매장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인 합장은 발해 매장 습속의 특색을 이루는데, 주인공과 배장자가 뚜렷하게 구별된 예도 있다. 배장자는 적게는 1인에서 많게는 14인에 이른다. 1차장과 2차장이 모두 있으며, 한 무덤에서 2가지가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 2차장된 사람 뼈는 대체로 추가장에 의한 것이다. 1차장의 경우에는 널을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널 없이 직접 묻은 예도 보인다. 발해 초기에는 리우딩산 고분군에서처럼 화장이 유행하였는데, 시신을 널에 넣은 채 무덤 안에서 불에 태웠다.

이 밖에 리우딩 고분군에서는 사람 뼈와 함께 동물 뼈도 출토되었다. 동물 뼈로는 말, 소, 개의 뼈들이 있다. 무덤 위에 건물을 짓던 풍습도 있었다. 산링둔 고분과 허난둔 고분, 룽하이 고분군에서는 흙무지 위에 주춧돌이 남아 있는 무덤도 발견되었다. 리우딩산 고분군과 룽터우산 고분군에서는 흙무지에서 기와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러한 묘상 건축물 전통은 불교가 성행하면서 탑으로 변하였다.

발해사 연구동향

발해는 전성기에 사방 5,000리에 달하는 영토를 가졌다. 서쪽으로는 요하까지, 북쪽으로는 쑹화강과 헤이룽강까지 이르는 지역을 아울렀고, 동쪽으로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남쪽으로는 대략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선에서 신라와 접하였다. 오늘날 국가로 따진다면 한국, 중국, 러시아에 걸쳐 있었던 나라이다. 따라서 이 3국에서 발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며, 발해 당시 교류가 빈번하였던 일본에서도 상당한 연구가 이뤄졌다.

한국

한국의 발해사 연구는 조선 후기에 처음으로 실증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당시 발해사에 대한 관심은 영토적인 문제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연구는 자연히 지리 고증에 집중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정약용 · 한치윤 · 한진서 등이다. 그리고 유득공의 『 발해고(渤海考)』를 통해 발해를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으로 부르며, 한국사에서 남북국시대를 설정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실증적 연구는 19세기 중반부터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실증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박은식 · 신채호 · 장도빈 · 권덕규 · 황의돈 등에 의해 발해를 한국사로 이해하는 역사 인식이 발전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분단으로 남북한에서 발해사 연구가 별도로 진행되었다.

남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동양사 연구자인 이용범이 고구려 계루부와 발해 왕실의 연결 가능성과 발해의 사회 구성 ‧ 유민사 등을 연구하였다. 1970년대에는 이우성의 「남북국시대와 최치원」이란 글이 남북국시대론에 대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송기호 · 한규철 · 노태돈 등이 발해사 연구에 참여하였고, 1990년대에는 한규철을 시작으로 송기호 · 임상선 등의 박사논문이 나오며 점차 연구진과 연구 주제가 확대되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역사학에서 박진숙 · 김은국 · 김동우 · 김종복 · 이효형 · 김진광 · 권은주 등의 박사논문이 나왔다. 이 밖에 신라사나 일본사 연구자를 비롯하여 역사 교육 ‧ 건축 ‧ 복식 ‧ 고고학 분야에서 조이옥 · 구난희 · 윤재운 · 이병건 · 전현실 · 정석배 등 많은 연구자들이 발해사 연구에 참여하였다.

연구 주제는 대조영의 출자와 건국 주체, 주민 ‧ 사회 구성, 지리 ‧ 강역 ‧ 교통, 문화 성격, 발해 인식의 변천, 역사 귀속, 정치 제도, 대외 관계(신라 ‧ 일본 ‧ 당 ‧ 거란 ‧ 말갈 ‧ 북방 민족), 부흥 운동과 유민, 유적과 유물 등 다양하다. 최근에는 문헌학보다는 고고학 분야의 신진 연구자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북한에서는 1962년에 박시형이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라는 논문에서 발해가 모든 면에서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명제를 제시한 것이 본격적인 연구이다. 문헌에 기초를 둔 그의 주장은 주영헌이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1970년대 초까지 문헌사와 고고학 두 방면에서 연구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

이후 북한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한동안 침체를 보이다가 1980년대 후반에 다시 활기를 띠며 연구자가 늘었다. 문헌학자로 장국종 · 손영종 · 현명호 · 채태형 · 김혁철 등이 있고, 고고학자로 김종혁 · 리준걸 · 김지철 등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에는 주체사상이 유일사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연구 주제가 고구려의 계승성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함경도에서 발해 유적들이 연이어 확인된 것이 큰 성과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는 『발해사1~7-성립과 주민, 정치, 경제, 문화, 역사지리』, 『조선단대사(발해사)』, 『발해사문답』, 『발해정치사연구』, 『발해의 대외관계연구』, 『력사이야기: 발해 및 후기신라편』, 『동해안 일대의 발해유적에 관한 연구』, 『발해교통운송사』, 『대조영과 발해국』 등의 책이 출판되었고, 논문의 수도 많아졌다. 문헌학 분야에서는 김성호 · 림호성 · 전동철 · 리진국 · 리춘민 등이 있고, 고고학 분야에는 김창호 · 김남일 · 김대영 · 리창진 · 최춘혁 · 장철만 · 김인철 등의 연구가 확인된다.

중국

중국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19세기에 조정걸(曹廷杰) · 경방창(景方昶) 등이 역사 지리를 고증하면서 단초를 열었고, 20세기 초 탕옌〔唐宴〕 · 황우이한〔黃維翰〕 · 진위푸〔金毓黻〕에 의해 한층 발전하였다. 특히 진위푸의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篇)』은 중국 ‧ 한국 ‧ 일본의 발해사 관련 기록을 망라하여 체계적으로 정리 ‧ 고증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중국의 발해사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중국에서 발해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계기는 일본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이다. 동북 3성(만주) 지역이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음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발해가 중국의 변강사라는 인식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발해사를 한국사와 명확히 구분하지는 않았다.

현대에 들어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9년 둔화 리우딩산 고분군에서 정혜공주의 묘가 발굴되면서 발해사 연구에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에는 북한과 연합하여 리우딩산 고분군과 발해 상경성 유적에 대해 공동으로 발굴하였고, 헤이룽장성〔黑龍江城〕에서는 무단강〔牧丹江〕 일대의 발해 유적을 조사하였다.

이후 문화 대혁명으로 중국에서 발해사 연구가 중단된 사이에 북한이 일방적으로 공동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발해를 한국사이자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강조한 것이 중국에 알려지게 된다. 중국은 문화 대혁명이 끝난 뒤 발해사를 비롯한 동북 변강 연구를 본격화하였고, 1983년 중국사회과학원 산하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研究中心: 현재 중국변강연구소)을 설립하여 발해사를 주요 연구 사업에 포함시켰다. 이 무렵에도 중국 측은 발해가 말갈족이 주체가 된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였다.

1990년대에는 한중 수교로 남한의 발해사 연구가 중국 학계에 알려지면서 중국에는 적지 않은 발해사 연구가 쏟아졌다. 이후 ‘ 동북공정(2002~2007)’을 거치며 중국 측은 발해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매년 10편 내외의 석박사 학위논문을 포함하여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100여 편에 가까운 관련 연구가 나왔다.

대표적인 발해사 연구자로는 쑨슈런〔孫秀仁〕 · 왕청궈〔王成國〕 · 리우전화〔劉振華〕 · 왕청리〔王承禮〕 · 웨이궈중〔魏國忠〕 · 주궈천〔朱國忱〕 · 쑨위량〔孫玉良〕 · 웨이춘청〔魏存成〕 · 쑨진지〔孫進己〕 · 류샤오동〔劉曉東〕 · 양위수〔杨雨舒〕 · 판언스〔范恩实〕 · 량위뚜어〔梁玉多〕 · 마이홍〔马一虹〕 등이 있고, 조선족 학자로는 방학봉 · 정영진 · 김태순 · 김향 · 이동휘 · 윤현철 · 정경일 · 강성산 등이 있다.

발해사 연구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발굴된 주요 유적으로는 발해 상경성 유적 ‧ 동경 팔련성 유적 ‧ 중경 서고성 유적, 리우딩산 고분군 ‧ 롱터우산 고분군 ‧ 싼링둔 고분군 ‧ 훙준어장〔虹鱒漁場〕 고분군 ‧ 허난둔〔河南屯〕 고분 ‧ 따주둔〔大朱屯〕 고분군 ‧ 베이다〔北大〕 고분군 등이 있다. 최근 발굴 유적으로 가장 주목되는 곳은 투먼〔圖們〕 모판춘〔磨盤村〕 산성으로, 중국 학계에서 이곳을 발해 건국지인 동모산으로 보는 견해가 확산되고 있다.

일본

일본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발해의 영토를 점유하고 있는 한국이나 중국 ‧ 러시아에 못지않게 많이 이루어졌다. 차이점은 한국 등 3국은 자국사의 입장에서 발해를 연구한다면, 일본은 대외 관계사의 측면에서 주로 연구한다.

일본의 발해사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는 19세기 말에 시작되었다. 정치적으로 정한론(征韓論)과 연결되어 그 연장선상에서 관심을 기울였다. 20세기 전반에는 일본의 만주 침략과 연계하여 지리 고증과 고고 조사를 중심으로 진행하였고, 만선사(滿鮮史) 연구의 일환을 이루었다.

고고학 성과로서 닝안 동경성(東京城, 상경성), 허롱 서고성, 훈춘 반랍성(半拉城, 팔련성) 등을 조사하여 발해의 5경(京) 중 수도였던 3경 지역을 처음으로 확정하였다. 이 시기에는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 미카미 츠기오〔三上次男〕, 고마이 가즈치카〔駒井和愛〕, 사이토 유우〔齋藤優〕, 와다 세이〔和田淸〕,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등과 같은 연구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현대에 들어와서 1960년대까지는 기존 연구자들이 일제시기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발해사를 연구하였고, 히노 가이자부로〔日野開三郞〕, 니이즈마 토시히사〔新妻利久〕 등이 새로 합류하였다. 1970년대에는 전후 세대로 구성된 연구자들이 등장하였고, 1980~1990년대를 거치며 연구진이 확대되었다.

냉전시기에는 중국과의 학술 교류가 제한되어 문헌사 연구가 중심이 되었다. 특히 일본사 전공자들이 주축이 되어 발해사를 연구하면서 발해와의 대외 교류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동양사 내지 한국사 그리고 고고학 연구자들의 참여가 늘면서, 발해의 정치 제도 · 사회 구조 · 수령제 ‧ 국서(國書) 및 중대성첩(中臺省牒), 발해의 고구려 계승 의식 등 연구 주제가 다양해졌다.

관련 연구자로는 이시이 마사토시〔石井正敏〕 ‧ 스즈키 야스타미〔鈴木靖民〕 ‧ 사카요리 마사시〔酒寄雅志〕 ‧ 가네코 슈이치〔金子修一〕 ‧ 오오스미 아키히루〔大隅晃弘〕 ‧ 후루하타 도루〔古畑徹〕 ‧ 가와카미 히로시〔河上洋〕 ‧ 이성시(李成市) ‧ 하마다 코사쿠〔濱田耕策〕 ‧ 고지마 요시타카〔小嶋芳孝〕 ‧ 니시가와 히로시〔西川宏〕 등이 있다. 2000년대 이후 신진 학자로는 아카바메 마사요시〔赤羽目匡由〕 ‧ 하마다 쿠미코〔浜田久美子〕 등이 있다.

러시아

러시아에서 연해주와 발해에 대한 개략적 이해는 19세기 중엽에 활동한 비추린(N. Ia. Bichurin) 등과 같은 중국학 학자들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우수리강 동쪽 연해주 지역이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면서 발해 유적 조사와 연구가 시작되었다.

1884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아무르 변구(邊區) 연구회(OIAK)’가 창립되어 발해를 연해주 중세의 첫 시기로 설정하고, 발해 유적을 포함한 연해주 지역의 유적 조사가 이뤄졌다. 그 밖에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지질 조사가,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 군사 측량가, 고고 탐험가, 신문 기자 등에 의해 발해 유적이 조사되었다. 1929년에는 국립극동대학교 교수였던 마트베예프(Z. N. Matveyev)가 『발해』를 출간하였다.

러시아에서 발해사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이다. 주로 고고학자들이 많으며, 문헌학 연구자는 소수이다. 1953년 소련과학원(현재 러시아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극동고고학조사단이 조직되었고, 이듬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소련과학원 극동지소 역사학고고학민속학연구소가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조사단 단장인 저명한 고고학자 오클라드니코프(A. P. Okladnikov)와 그의 제자인 샤프쿠노프(E. V. Shavkunov)가 발해사 연구를 주도하였다.

1958년 코프이토(Kopyto) 절터를 발굴하면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하였고, 아크리코스 발해 무덤과 절터 발굴, 크라스키노성 답사 등이 이루어졌다. 1959년 오클라드니코프의 『연해주의 먼 과거-연해주의 고대사 및 중세사 개관』에서는 연해주 통사의 일부로 발해사가 처음 정리되었고, 1968년 샤프쿠노프의 『발해국과 연해주의 발해 문화 유적』에서는 최초로 발해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는 금나라 유적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발해사 연구가 부진해졌다.

러시아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1970년대부터 새로운 연구자들이 참여하면서 활기를 띄었다. 그리고 1990년 한러 수교와 1992년 블라디보스토크 개방으로 한러 학술 교류가 가능해지며, 1993년부터 연해주 지역 발해 유적에 대해 한국학자들과 공동 조사 ‧ 발굴이 활성화되었다. 공동 발굴 유적으로는 마리야노프카(Mar'ianovka) 성터 ‧ 크라스키노(Kraskino) 성터 ‧ 콕샤로프카(Koksharovka) 성터와 코르사코프카(Korsakovka) 절터 ‧ 체르냐티노(Cherniatino) 고분군 및 주거지 등이 대표적이다.

발해 고고학과 문헌학 연구자로는 셰메니첸코(L. Ye. Semenichenko), 볼딘(V. I. Boldin), 렌코프(V. D. Lenkov), 이블리예프(A. L. Ivliev), 크라딘(N. N. Kradin), 니키틴(Yu. G. Nikitin), 겔만(E. I. Gelman), 디야코바(O. V. D’iakova), 크루퍈코(A. A. Krupyanko) 등이 있다.

참고문헌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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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박순우, 「10~14세기 ‘발해인’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7)
권은주, 「발해 전기 북방민족관계사」(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김동우, 「발해 지방 통치 체제연구: 발해 수령을 중심으로」(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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