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거지는 목단강(牧丹江)·두만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부족 자체의 정치적 통일은 이루지 못하였고, 읍락(邑落)마다 추장들이 있어 통치하였다.
부여족과는 다른 특유한 언어를 사용하였고, 산이 많은 곳에 살았기 때문에 물자가 부족하여 이를 조달하기 위해 자주 인접한 북옥저(北沃沮)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한대(漢代)에 부여에 신속하였으나 부여의 경제적 착취에 항거하여 여러 차례 부여의 영향권에서 이탈하려고 하였다. 주위의 부족들에 비하여 문화적으로 대단히 낙후해 있었으나 그들이 사용하던 활과 화살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상고시대 숙신씨(肅愼氏)의 후예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대개 수혈주거지(竪穴住居地)에서 거주하였고, 돼지를 길러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두껍게 발라서 추위를 막았다. 여름에는 옷을 입지 않고 척포(尺布)로 몸을 가렸다. 오곡(五穀)·마포(麻布)·적옥(赤玉) 등을 산출하였고, 특히 초피(貂皮)는 궁시(弓矢)와 더불어 유명하였다.
남녀의 기강은 문란하였으며, 남자가 혼인을 하고자 하면 여자의 머리에 꽃을 꽂아 주었고, 여자도 그 남자가 마음에 들면 꽃을 가져가서 예를 치르고 혼인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당일로 장사를 지냈고, 사후의 생활을 위하여 돼지를 순장하였다. 남자의 경우는 부모가 죽어도 슬픔을 표시하지 않았다. 법은 매우 엄격하여 도둑질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생활상은 고대 한민족의 생활상과는 상당히 다른 것인만큼, 이들은 고아시아족 내지 고시베리아족 계통의 종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진시대(魏晉時代)에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였으나, 559년 북제(北齊)에 사절을 파견한 것을 끝으로 역사상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물길(勿吉)·말갈(靺鞨) 등이 이의 후예라고 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