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은 4인이다. 품질(品秩)은 고려 초기에 7∼9품으로 4인 가운데 2인은 권무직(權務職 : 임시사무직)이었다가 뒤에 8품으로 정해졌으며, 고종 때 다시 권무직으로 되었다.
문과 급제자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사람으로 충당되었으며, 급제자의 초입사직(初入仕職)으로 제수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7∼9품의 다른 관직과 겸직하기도 하였다. 사관의 관직인 감수국사(監修國史)·수국사·동수국사(同修國史)·수찬관이 모두 겸직이었으므로, 평상시에 사초(史草)의 기록, 보관이나 사관의 직숙(直宿) 등 실무를 전담하였다.
그리고 한림원의 직한림과 함께 금중(禁中 : 궁중)을 직숙하였으며, 1298년(충선왕 즉위년)에는 직문한(直文翰, 直翰林)과 1인씩 번갈아가며 문한서(文翰署, 翰林院)를 직숙하도록 하였다.
1308년(충선왕 복위년)에 사관이 문한서와 합쳐져 예문춘추관으로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 사관의 복치와 함께 부활되었다. 이때는 정원이 2인으로 줄고, 품질도 정9품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