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문세족 ()

고려시대사
개념
고려후기 정치세력으로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 조선의 양반사대부와 비견되는 지배층. 권문세가.
이칭
이칭
권문세가(權門勢家)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권문세족은 고려 후기 정치세력으로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 조선의 양반사대부와 비견되는 지배층이다. 권문세가라고도 한다. 무신란을 계기로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 사회가 붕괴한 뒤 무신집권기라는 새로운 정치·사회적 배경 위에서 성장하여 원간섭기인 13세기 후반 무렵에 완성된 지배세력이다. 전통 문벌귀족 일부와 무신집권기에 부역한 관인층 또는 무신으로서 등장한 가문, 그리고 대원관계 속에서 신흥세력으로 새로이 등장한 가문 등이 포함된다.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에 비해 관료적 성격이 강하여, 귀족 사회에서 관료 사회로 발전하는 중간 단계의 지배세력이었다.

정의
고려후기 정치세력으로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 조선의 양반사대부와 비견되는 지배층. 권문세가.
개설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은 1170년에 일어난 무신난(武臣亂)을 계기로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 사회가 붕괴된 뒤 무신집권기의 새로운 정치 · 사회적 여건 아래서 성장하기 시작하여 원간섭기인 13세기 후반 무렵 정착하였다.

이 세력을 권문세족(權門勢族)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을 특별히 가리키는 용어가 없이 사료에 나오는 ‘권세지가(權勢之家)’, ‘세신대족(世臣大族)’, ‘구가세족(舊家世族)’, ‘권문(權門)’, ‘권귀(權貴)’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하다가 권문세족으로 통일해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한자 표기도 초기에는 부정적 의미가 내포된 ‘권문세족(權門勢族)’으로 쓰던 것을 점차 ‘권문세족(權門世族)’으로 바꿔 쓰게 되었다.

연원 및 변천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으로서 권문세족의 성립 시기는 대원(對元) 관계가 안정되는 충렬왕대(재위 1275~1308)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구체적으로는 1308년에 충선왕이 복위하여 발표한 교서에서 ‘재상지종(宰相之宗)’이라 하여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을 나열한 데서 그 존재가 확인된다.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이란 당시 고려의 최고 가문을 뜻하므로 그것은 곧 당시 지배세력의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상지종’으로 언급된 가문은 경주 김씨(慶州金氏), 언양 김씨(彦陽金氏), 정안 임씨(定安任氏)[장흥 임씨(長興任氏)], 경원 이씨(慶源李氏), 안산 김씨(安山金氏), 철원 최씨(鐵原崔氏), 해주 최씨(海州崔氏), 공암 허씨(孔巖許氏), 평강 채씨(平康蔡氏), 청주 이씨(淸州李氏), 당성 홍씨(唐城洪氏), 황려 민씨(黃驪閔氏), 횡천 조씨(橫川趙氏), 파평 윤씨(坡平尹氏), 평양 조씨(平壤趙氏) 등 15개이다.

이 가운데는 고려 전기 이래의 문벌귀족 일부와 무신집권기에 ‘능문능리(能文能吏)’의 새로운 관인층 또는 무신으로서 등장한 가문, 그리고 대원관계의 전개 속에서 신흥세력으로 새로이 등장한 가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원간섭기(元干涉期)에 들어 몽골어 통역관이나 원의 환관(宦官), 원에 보내는 매를 사육하는 응방(鷹坊)을 통해 출세한 사람들, 원 공주 출신 고려 왕비의 게링구〔怯怜口: 사속인(私屬人)〕, 국왕이 즉위하기 이전 원에서 숙위(宿衛)할 때 시종하고 돌아와 공신에 책봉된 사람들, 대원관계 속에서 무공을 세워 출세한 무신 등 여러 갈래의 신흥세력이 권문세족에 포함되었다.

내용

권문세족은 대원관계의 전개 속에서 몽골어 통역, 매의 사육, 무공 등으로 출세하거나 심지어는 환관 족속마저 포함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문학적 · 유교적 소양과 거리가 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과거(科擧)보다는 음서(蔭敍)를 통해 관리가 되었으며, 그런 만큼 본질적으로 귀족적 성격을 지닌 지배세력이었다.

또한 이들은 고려 후기 정치체제의 재편 결과 왕권이 약화되고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중심으로 하는 합좌체제가 강화되자 도평의사사의 구성원으로서 국정 전반을 합의하는 데 참여함으로써 정치권력을 장악하였다.

동시에 권문세족은 원의 정치적 간섭이 강하게 미쳐오는 가운데 대체로 원과 결탁하는 데 적극성을 띠었다. 이들은 원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征東行省)이나 만호부(萬戶府) 등의 관직에 임명되거나, 원의 황실 또는 실력자와 혼인관계를 맺는 등의 방법으로 원의 후원을 받아 국내에서 정치적 · 사회적 기반을 강화하였다.

다만, 이들은 원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거나 원에서 고려 왕조를 없애고 행성(行省)을 설치하려는 데 대해서는 적극 반대하여 국가적 독립성을 지키고자 하였고, 이 점에서 부원세력(附元勢力)과는 구별되는 존재였다.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은 대토지를 집적하여 형성한 농장이었다. 무신집권기에 집권 무신들에 의해 토지 집적과 농장 경영이 유행하였는데, 원간섭기에 들어서는 권문세족에 의해 이러한 추세가 더욱 심해졌다.

몽골과의 장기간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지를 개간할 목적에서 사급전(賜給田)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사급전이 주로 권문세족에게 지급되어 대토지 집적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사급전을 지급받지 않고도 마치 받은 것처럼 꾸며 남의 토지를 빼앗는 ‘모수사패(冒受賜牌)’가 횡행하여 당시 권문세족의 농장은 ‘산천(山川)으로 경계를 삼았다’거나 ‘주군(州郡)에 걸쳐 있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권문세족이 농장을 경작하기 위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일반 양인을 억지로 노비로 만드는 이른바 ‘압량위천(壓良爲賤)'의 현상이 발생하였고, 이는 토지 탈점과 함께 고려 후기 사회 모순을 심화시키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원간섭기에 간헐적으로 전개된 개혁정치에서 권문세족은 개혁의 대상이 되었으며, 고려 말에 이르러 신진사대부가 추진한 전제개혁(田制改革)으로 인하여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고 조선 건국 후 소멸하였다.

한편, 권문세족은 본질적으로 귀족적 성격을 갖는 지배세력이었지만, 이들의 정치권력은 고위 관료가 되어 도평의사사의 합좌에 참여함으로써 행사될 수 있었다. 따라서 권문세족은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에 비해 관료적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귀족 사회에서 관료 사회로 발전하는 중간 단계의 지배세력이었다.

의의와 평가

권문세족은 한국사의 발전을 사회적 지배세력의 변천을 통해 설명하는 가운데 고려 초의 호족(豪族),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 무신집권기의 무신에 이은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계속해서 조선시대의 지배세력으로 양반사대부를 설정함으로써 고려 귀족사회가 조선 관료사회로 발전하는 과정을 지배세력의 변천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을 권문세족으로 특정함으로써 고려 후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간섭기가 고려 전기 문벌귀족사회와 조선 양반관료사회 사이의 단순한 과도기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부마국(駙馬國) 체제, 사회경제적으로는 녹과전(祿科田) 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독자적인 시기라는 점도 분명해졌다.

한편, 1960년대에 권문세족의 개념이 제시된 데에는 같은 시기 신진사대부에 대한 연구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고려 후기에 지방의 중소 지주, 향리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하여 신진사대부 집단을 형성하였으며, 이들이 고려 말에 이르러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연구가 그것이다.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수용하였고, 원간섭기의 개혁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반원적인 성향을 띠었던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권문세족이 신진사대부의 상대 개념으로 제시됨으로써 한동안 고려 후기의 역사 연구는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대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고려 후기 정치사 연구가 진행되면서 권문세족의 개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먼저, 원간섭기에는 국왕권이 약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국왕을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종래 권문세족으로 분류되던 몽골어 통역관, 환관, 응방 관계자, 게링구〔怯怜口〕, 친종행리(親從行李)의 공신, 무장 등 원간섭기의 신흥세력은 대부분 국왕측근세력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렇다면 이들 신흥세력을 포함하여 정의된 권문세족의 개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었다. 특히, 권문세족이 ‘비문비유적(非文非儒的)’ 존재로서 과거보다는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었다는 설명이 그러했는데, 그것은 더 나아가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존재였다는 인식도 수정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권문세족 개념과 관련하여 용어의 사용례를 분석한 연구도 있다. 즉, 각종 사료에서 ‘권문’은 특정 개인이 행사하는 정치권력을 지칭하는 말이고, ‘세족’은 특정 가계의 사회적 지위를 가리키는 계층의 의미를 갖는 말로서 서로 층위가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용어라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권문과 세족을 단순히 합친 권문세족은 적절한 역사 용어가 될 수 없으며,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권문세족’ 대신 ‘세족’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처럼 권문세족은 용어로서의 적절성과 개념 및 범주를 둘러싸고 아직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고려후기세족층연구』(김광철, 동아대출판부, 1991)
「고려후기 사대부와 권문세족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익주,『역사와 현실』8, 1992)
「충선왕의 복위교서에 보이는 ‘재상지종’에 대하여󰠏소위 ‘권문세족’의 구성분자와 관련하여󰠏」(김당택,『역사학보』131, 1991)
「고려 충렬왕대의 정치상황과 정치세력의 성격」(이익주,『한국사론』18, 1988)
「고려 충렬왕대 정치세력의 동향」(김광철,『창원대논문집』7-1, 1985)
「고려후기의 권문세족」(민현구,『한국사』8,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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