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간섭기는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전반까지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던 시기를 가리키는 역사용어이다. 고려의 대몽항쟁이 끝나고 원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반원운동에 성공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을 때까지로, 대체로 1259년에서 1356년 사이의 시기를 가리킨다. 고려 영토 안에 원의 지방관청이 설치되어 일부 영토를 상실한 상태였고, 국왕의 계승도 원이 좌지우지했으며, 고려 전기 이래의 황제국 체제가 부정되고 제후국 처지로 전락했다. 원이 수행하던 여러 전쟁에 군대와 각종 물자를 제공하고, 공물과 공녀를 상납하는 등 백성들의 피해가 매우 컸다.
고려는 1231년(고종 18)부터 몽골의 침략을 받아 약 30년 동안 항전을 벌인 뒤 1259년(고종 46)에 강화(講和)를 맺었고, 그로부터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의 반원운동(反元運動)이 성공할 때까지 원의 간섭을 받았다.
원간섭기(元干涉期)는 고려의 대몽항쟁(對蒙抗爭)이 끝나고 원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반원운동에 성공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을 때까지이므로 일반적으로는 1259년부터 1356년까지 97년간의 시기를 가리킨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1270년(원종 11)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개경환도(開京還都)가 이루어질 때까지 고려의 대몽항쟁이 계속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1273년(원종 14) 제주도에서 삼별초(三別抄)가 진압된 때를 대몽항쟁의 종료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는 무신정권(武臣政權)과 삼별초의 대몽항쟁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그에 따르면 원간섭기의 시작은 1270년 또는 1273년으로 늦추어진다.
원간섭기에 고려는 왕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원의 간섭을 받게 되어 자주성(自主性)이 크게 훼손되었다. 우선, 고려 영토 안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동녕부(東寧府),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등 원의 지방관청이 설치됨으로써 영토의 일부를 상실했다. 이 가운데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고려의 요구에 따라 이른 시기에 반환되었으나 쌍성총관부는 1356년 무력으로 수복할 때까지 약 100년 동안 원의 영토가 되었다.
또한 원간섭기에는 고려 국왕의 계승이 원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 때문에 고려 국왕이 원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국왕이 재위 중에 원에 의해 퇴위 당하거나, 퇴위했던 국왕이 복위하는 일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원의 간섭에 따라 고려의 정치제도가 3성(三省)-6부(六部) 체제에서 첨의부(僉議府)-4사(四司) 체제로 격하되었으며, 왕실에서 사용하는 용어도 격하되는 등 고려 전기 이래의 황제국 체제가 부정되고 제후국 체제가 정착되었다.
또한 원의 여러 전쟁에 필요한 군대와 각종 물자를 제공하게 되었으며, 공물(貢物)과 공녀(貢女) · 엄인(閹人) 등을 원에 보내게 됨으로써 일반 민들이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한국사학계에서 ‘원간섭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전반까지 고려와 원의 관계를 ‘간섭’으로 표현한 것은 당시 고려가 국가를 유지하고 있던 점에 주목한 결과였다.
즉, 양국 관계를 ‘지배’로 표현할 경우 고려가 국가로서 유지되었던 사실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 ‘사원기(事元期)’라는 용어도 사용되는데, 이것은 ‘원에 사대(事大)한 시기’라는 뜻으로 단순히 사대 관계, 즉 조공-책봉 관계의 상대를 나타낸 것일 뿐 이 시기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절한 용어라고 하기 어렵다.
또 한 가지, 특정 외세의 간섭을 특징으로 하는 기간을 한국사의 독자적인 시기로 설정하여 ‘원간섭기’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원간섭기에는 외세의 간섭 아래서도 고려 사회 내부의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우선, 고려의 지배세력에 변화가 있었다.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門閥貴族)이 무신난(武臣亂)을 계기로 몰락한 이후 무신집권기를 거쳐 원간섭기에 권문세족(權門世族)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지배세력이 등장했다.
또 고려전기 지배 체제의 근간을 이루던 전시과(田柴科)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이 녹과전(祿科田) 체제가 성립하였다. 이밖에 원과의 관계에서 부마국(駙馬國) 체제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의 특징적인 정치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이와 같은 연구를 바탕으로 원간섭기를 앞뒤 시기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시기로 설정하고 있다.
원간섭기는 오랜 전쟁 끝에 1259년(고종 46) 고려가 원의 항복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강화가 성립된 데서 시작되었다. 강화 이후 원의 간섭이 강력하게 미쳐 왔지만, 원은 고려 왕조와 왕실을 존속시키고 고려 국왕을 통해 고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278년(충렬왕 4)에 원의 군대와 다루가치〔達魯花赤〕가 고려에서 철수한 뒤로는 원의 관리나 군대가 상주하는 일도 없었다. 따라서 고려의 국가체제가 유지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몽골제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매우 드문 경우였다. 이러한 특수성은 많은 연구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원은 고려 국왕에 대한 책봉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함으로써 고려에 간섭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였다. 이전까지 고려가 송(宋), 거란(契丹), 금(金) 등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는 책봉이 고려에서 이미 이루어진 왕위 계승을 중국 왕조가 추인하는 절차에 불과했지만, 원간섭기에는 원이 책봉권을 이용하여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고 더 나아가 국왕을 퇴위시키기까지 하였다.
그 때문에 지위가 불안해진 고려 국왕들은 개인적으로 신임하는 측근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려는 경향을 띠었다. 그 때문에 국왕 측근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측근들이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무리하게 강화하는 과정에서 각종 불법 행위를 자행함으로써 정치 질서가 문란해지고 일반 민들의 생활도 크게 위협받았다.
한편, 원간섭기의 고려 국왕들은 원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왕실 혼인을 통해 원 황실의 부마가 되었다. 양국 간의 왕실 혼인은 1274년(원종 15)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의 공주와 고려 세자(뒤의 忠烈王)의 결혼을 시작으로 공민왕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1280년(충렬왕 6)부터는 고려 국왕이 고려에 설치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승상(丞相)을 겸함으로써 원간섭기의 고려 국왕은 부마, 국왕, 승상으로서 존재하였다. 국왕이 중국 왕조의 부마가 되거나 승상 등 다른 관직을 겸한 것은 한국 역사상 이 시기만의 특징이었다.
원간섭기에는 국왕이 직접 원에 가서 친조(親朝)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충선왕 같은 경우는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원에서 생활하였다. 그뿐 아니라 사신의 왕래도 매우 빈번하였다. 따라서 국왕의 친조와 재원(在元) 생활, 사신 왕래 등 대원 관계를 유지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어갔고, 그것은 곧 고려의 재정 부담으로 이어져 조세 수취가 강화되었다.
결국 원간섭기에는 권력자들에 의한 토지 탈점과 국가의 수취 강화로 일반 민들의 생활이 대단히 어려워졌으며, 그 때문에 요양(遼陽)이나 심양(瀋陽), 쌍성총관부 등 원의 영토로 도망해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유민(流民)을 막기 위해 국왕이 중심이 되어 토지 탈점을 금지하는 등 개혁정치를 추진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비록 원의 간섭을 받았지만, 고려는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원의 고려 국왕에 대한 책봉이 실질적인 권한으로 행사되었지만, 고려의 왕위계승 원칙에 따라 자격이 있는 사람 가운데 선택해야 하는 한계도 엄연히 존재했다.
또 고려에 원의 지방행정기관인 정동행성이 설치되었지만, 원의 다른 행성들과는 달리 하급 행정단위인 주 · 현(州縣) 등이 설치되지 않았고, 책임자인 행성 승상은 언제나 고려 국왕이 겸했으며, 행성의 관리들은 고려 국왕이 승상의 자격으로 원 황제에게 추천해서 임명하였다.
이 때문에 정동행성은 고려를 통치하기 위한 기관이 아니라 고려와 원 사이의 연락 기관, 또는 고려를 원의 행성에 준하여 상대하려는 취지로 설치된 형식적, 명목적 기관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가 국가로서 유지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와 원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서 원의 후원을 배경으로 고려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들 부원세력(附元勢力)에 의해 고려를 원의 행성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흔히 ‘입성책동(立省策動)’이라 불리는 것으로, 고려 국가를 없애고 원의 행성으로 만들어 원의 영토에 편입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는 고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성사되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고려를 행성으로 만드는 것이 경제적, 군사적 측면에서 실익이 없다는 원의 판단도 작용하였다.
한편, 원간섭기에는 고려와 원 사이에 관리와 학자, 승려, 상인(商人) 등의 왕래가 빈번했고, 이들을 통해 무역뿐 아니라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몽골족의 변발과 호복(胡服)이 고려 지배층 사이에서 유행하였고, 일찍이 남송(南宋)에서 발달한 성리학(性理學)과 강남농법(江南農法)이 이 시기에 고려로 전래되었다.
특히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대제국으로서 세계 각지의 문화가 융합되었으므로 고려는 원을 통해 티베트 불교나 이슬람 과학 등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러한 문화들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화발전에 기여하였다.
원간섭기에 고려가 국가로서 유지된 것은 당시 몽골제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매우 드문 사례였다. 그리고 그것은 원의 세력이 약화되자 즉각적인 반원운동(反元運動)을 일으켜 자주성을 회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국가를 유지한 사실에 주목하여 이 시기를 ‘원간섭기’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간섭’으로 표현되는 양국 관계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이견이 있다.
먼저, 원이 고려 국왕을 책봉하고 고려가 원에 조공한 사실을 근거로, 원의 간섭이 미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양국 관계를 책봉-조공 관계로 보는 견해가 있다. 책봉-조공 관계는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보편적인 국제질서 가운데 하나로서, 국가와 국가 간에 상하 관계를 서로 인정하는 가운데 책봉과 조공을 교환하는 관계라고 보는 입장에서 고려와 원의 관계도 그러한 범주에 포함된다는 주장이다.
반면, 고려와 원의 관계를 책봉-조공 관계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견해는 다시 둘로 나뉜다. 하나는, 책봉을 받은 조공국의 자주성 유지가 책봉-조공 관계의 핵심이라고 보아 원의 간섭으로 자주성이 침해되었던 고려와 원의 관계를 책봉-조공 관계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견해이다.
또 하나는 몽골족이 세운 원은 중국 왕조가 아니므로 책봉이나 조공 등 중국식 의례를 수용하지 않았고, 따라서 고려-원 관계도 책봉-조공 관계가 될 수 없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다시 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고려가 몽골의 황실 및 귀족들에게 분봉(分封)된 영지, 즉 몽골 투하령(投下領)의 하나였다는 견해이다. 이에 따르면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은 인정되지 않으며, 고려와 원의 관계는 국가 간의 관계가 아니라 몽골제국 내부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가 된다.
또 하나는 고려를 몽골제국 내에서 토착 군주의 지배를 받던 속국(屬國) 가운데 하나로 보아 국가적 독립성을 인정하면서, 몽골황실의 부마에게 수여된 속령(屬領)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한편, 최근에는 몽골사 연구가 진행되면서 몽골족이 세운 원을 중국왕조로 취급하는 데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에 따르면 대원(大元), 즉 원은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몽골제국의 일부이거나 혹은 전체 몽골제국의 한역(漢譯)이며, 이것을 ‘원’이라고 지칭했을 때 몽골제국의 고유한 역사성이 드러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지금까지 원이라고 부르던 나라 이름을 몽골제국, 대몽골 울루스, 대원 울루스, 쿠빌라이 울루스, 카안 울루스 등으로 고쳐 부른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연구자들은 대부분 고려-원 관계를 중국식 책봉-조공 관계로 설명하거나 양국 관계를 ‘간섭’으로 표현하는 데 반대하므로 ‘원간섭기’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떠한 대안이 제시된 것도 아니므로 앞으로의 연구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