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

안향초상
안향초상
유교
개념
송나라 이후의 유학으로 특히 성명(性命)과 이기(理氣)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 신유학 · 이학 · 정주학 · 주자학.
이칭
이칭
신유학, 이학, 정주학, 주자학
정의
송나라 이후의 유학으로 특히 성명(性命)과 이기(理氣)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 신유학 · 이학 · 정주학 · 주자학.
성리학의 의미와 특성

유학을 발전사적으로 볼 때 선진(先秦)의 본원(本源) 유학, 한당(漢唐)의 훈고(訓詁) 유학, 송명(宋明)의 성리학, 청(淸)의 고증학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성리학이라는 용어는 원래 ‘성명·의리의 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이다. 중국 송(宋)대에 들어와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을 ‘성리(性理)·의리(義理)·이기(理氣)’ 등의 형이상학 체계로 해석하였는데 이를 성리학이라 부른다. 성리학은 보통 주자학(朱子學)·정주학(程朱學)·이학(理學)·도학(道學)·신유학(新儒學) 등의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송의 주희(朱熹)는 주렴계(周濂溪),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성리학은 공자와 맹자를 도통(道統)으로 삼고서 도교와 불교가 실질이 없는 공허한 교설(虛無寂滅之敎)을 주장한다고 생각하여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한편 같은 유학임에도 불구하고 주희(朱熹)의 성리학이 이(理)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학이라 부르고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학문은 상대적으로 마음(心)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심학(心學)이라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정주계의 이학이 크게 발달하고 육왕계의 심학(心學)은 미미하였다. 같은 시기의 일본에서는 심학이 주류였던 것과 대조적이다.

불교는 당(唐)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지만 송대에는 성리학이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면서 중심 사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폐쇄적 귀족 사회였던 당은 안록산(安祿山)의 난과 황소(黃巢)의 난을 계기로 멸망하고 오대십국(五代十國, 907-960)의 혼란기를 겪으며 송나라가 등장하였다.

오대(五代)의 마지막 왕조였던 후주(後周, 951-960)는 재정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교에 대해 대규모의 박해를 가하였다.

송대로 접어든 이후 관료학자(士大夫)로서의 유학자들은 불교의 출세간성·반사회성·비윤리성 등을 공허하다(虛學)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성리학을 참된 학문(實學)이라고 정당화하였다. 당시 유학자들이 보기에 도교의 은둔 경향과 불교의 세속을 떠난 출가는 가정과 사회의 윤리 기강을 무너뜨리는 요인이었다.

성리학은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 공동체와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공동체의 윤리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의 중심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대학≫에 나오는 팔조목(八條目)인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개인의 수양과 국가의 통치를 위한 행위 규범으로 삼았다.

성리학은 주로 사회적 인간 관계와 개인의 수양이라는 두 측면에서 그 사상을 심화시켰다. ≪주례 周禮≫를 중시함으로써 사회 윤리인 예(禮)를 강조함과 동시에 우주 본체, 인간 심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탐구를 심화시킴으로써 도교나 불교를 형이상학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는 유교의 텍스트들 중에서 ≪대학≫·≪논어≫·≪맹자≫·≪중용≫의 사서(四書)를 경전화시킴으로써 그 지위를 격상시켰다.

≪논어≫는 공자의 교설을 제자들이 모은 것이고, ≪맹자≫는 맹자의 교설을 제자들이 모은 것이다. ≪대학≫·≪중용≫은 원래 ≪예기≫의 한 편이었는데 ≪대학≫은 증자(曾子)와 그 문인들이 지었고 ≪중용≫은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생각하여 각각 한 책으로 독립시켰다.

사서의 정립을 통하여 공자(孔子)·증자·자사(子思)·맹자(孟子)라는 유학 도통의 계보를 역사적으로 예시하고자 하였다.

또한 주희는 사서에 주(註)를 달았는데 이는 나중에 성리학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이와 같이 성리학의 중심 텍스트를 선정하고 거기에 새로운 해석학적 틀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유학으로 거듭났다.

성리학의 특징은 공자·맹자의 선진 유학을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일분수(理一分殊)·천도유행(天道流行)·생생지리(生生之理)로써 보편타당한 법칙의 편재를 주장하였다.

인간은 우주의 보편타당한 법칙(天理)을 부여받았다고 보아 인간성(性)을 본질적으로 신뢰하였다. 자신의 지나치거나 부족한(過不及) 기질(氣質)을 교정하면 선(善)한 본성을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성리학에서는 보편타당한 법칙을 궁구하고(窮理) 자신의 본성을 다 발휘(盡性)할 것을 주장하였다.

보편타당한 법칙을 온전히 익히기(體認·體得) 위한 방법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론을 제시한다. 즉 사사물물(事事物物)에 깃들어 있는 이치(理)를 궁구하여 인간의 앎을 확장할 것을 제시하였다.

한편 공자가 말했던 자기실현의 학문(爲己之學)을 닦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하였다. 자기자신의 마음을 항상 반성적으로 살피고(存心), 본성을 기르며(養性),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를 신중히 하는 것(愼獨·戒懼) 등이 그것이다.

성리학은 마음(心)의 극단으로 치닫는 불교와 기(氣)의 극단으로 치닫는 도교를 비판하면서 마음·기·이의 통합적 구도를 제시한다. 이와 기는 성격상 다른 것(不相雜, 決是二物)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不相離, 理氣相須)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마음·성(性)·정(情)의 역시 통합적 구조로 해석하였다.

마음은 성과 정 전체를 아우르는 것(心統性情)으로 보았다. 인(仁)·의(義)·예(禮)·지(智)로 구성되어 있는 마음의 본체(未發心體)가 성이고 성이 밖으로 표현되면 정이 된다고 하였다. 성과 정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체용일원(體用一源)의 관계에 있으므로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형이상자(形而上者)인 도(道)와 형이하자(形而下者)인 기(器) 역시 단절되지 않는다(無間斷)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체용일원(體用一源)의 구도를 가졌던 성리학은 일상적인 것(日用之間)에서부터 학문의 근본을 다져야 한다(下學而上達)고 주장하였다.

성리학의 전래와 발달

성리학의 초기 수용

성리학이 우리 나라에 전래되기 시작한 때를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송(北宋)에서 성리학이 발흥할 무렵인 고려 인종기 전후(11∼12세기)로 생각된다. 당시 고려에서는 송의 서적을 적극 수집해 들여 왔고, 김양감(金良鑑)·윤언이(尹彦頤) 같은 대학자가 사신의 임무를 띠고 송에 가는 한편, 중국 사신들이 고려에 빈번히 왔다.

중국에 유학가는 고려의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또한 고려 시대 학자였던 최충(崔冲)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의 재명이 솔성(率性)·성명(誠明)·대중(大中) 등 성리학자들이 특별히 중시한 텍스트였던 ≪중용≫의 용어로 되어 있는 데서도 성리학의 전래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 예종 때 왕의 임석 하에 거행되었던 중신들의 경전 강론의 분위기를 가리켜, "삼강오상(三綱五常)의 가르침(敎)과 성명도덕(性命道德)의 도리(理)가 만당에 가득하였다"고 하는 기록(淸讌閣記)이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성리학은 중국에서 발흥·성장한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주자학으로서의 성리학의 도입은 충렬왕 때(13세기 후반)로 추정된다. 안향(安珦, 安裕)은 주희의 호 회암(晦庵)에서 ‘회(晦)’자를 따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이라 하여 주희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었다. 그 무렵 백이정(白頤正)은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元)의 수도에 가 10년간 머물다 돌아오는 길에 성리학 관계 서적을 많이 구해 왔다.

또한 권부(權溥) 등은 주희의 ≪사서집주≫ 등을 전파함은 물론 과거 시험에서 채택하게 함으로써 성리학의 도입이 활기를 띠었다. 뒤이어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은 피상적 차원을 넘어 성리학이 정치적·사상적 토대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들처럼 성리학을 익혀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한 당시의 향리 출신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 정신에 입각하여 정책을 제안하였다. 그들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성리학의 정명적(正名的) 명분 의식에 기초하여 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면서 배원친명(排元親明)의 외교정책, 정방제(政房制)의 폐지, 토지 제도의 개혁 등에 힘썼다.

양반 사회의 통치이념화

성리학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조선조를 개창하였던 당시 역성혁명의 주체는 대내적으로는 왕씨 정통의 문란을 비판하고 대외적으로는 배원친명의 외교 정책을 추구하였는데 여기에서 성리학의 춘추대의적 의리관(義理觀)을 엿볼 수 있다.

성리학이 조선의 개창을 합리화하는 토대가 되면서부터 조선시대 사상의 중심부로 부상하였다. 조선 초 성리학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성혁명의 주체인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의 활동이다.

정도전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조선조의 기틀을 확립해 나가면서 철저히 불교를 배척하였다. 일찍이 고려 초의 최승로(崔承老)나 고려 말의 이제현·이색 등도 불교를 배척하였지만, 그것은 사원의 폐해와 승려들의 비행에 근거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정도전은 <불씨잡변 佛氏雜辨>·<심기리편 心氣理篇>을 저술하여 불교신앙의 허구성·미신성 및 불교이론 자체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불교를 비판하였다.

정도전은 불교의 비인륜성·반사회성 등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배척하였다. 불교도 중에는 기(器)를 버리고 도(道)만을 추구하여 사회를 멀리하는 고고(枯槁)·응체(凝滯)의 폐단에 빠지거나, 도와 기의 의미적 층차를 무시하고 아무 것에도 구애됨이 없고자 하여 창광방자(猖狂放恣)의 폐단에 빠지는 부류가 있다고 꾸짖는다.

또한 불교에서 윤회를 주장하여 현실을 벗어나 사후 세계를 논의하는 것도 비판하였다. 성리학이야말로 이러한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여 사회 윤리를 강화하고 국가에 이로움을 줄 수 있는 참된 학문(實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뜻에서 그는 성리학을 가리켜 “옛사람들의 덕을 밝히고 국민을 새롭게 하는 실학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 시대의 국교인 불교를 비판하고 성리학으로서 국가의 통치 이념을 건립함에 따라 성리학은 관학(官學)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권근은 불교에 대한 비판 보다는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여 ≪입학도설 入學圖說≫·≪오경천견록 五經淺見錄≫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오경천견록≫은 오경(五經)에 주해를 단 것으로 중국 오징(吳澄)의 ≪주역찬언 周易纂言≫, 진호(陳澔)의 ≪예기집설 禮記集說≫ 등의 약점을 보완·극복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는 체용관(體用觀)을 적용하여 오경 전체를 유기적인 관계로 파악하였다.

≪주역 周易≫과 ≪춘추 春秋≫를 각각 체[全體]와 용[大用]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고, ≪시 詩≫·≪서 書≫·≪예기 禮記≫는 그 중간에서 정사(政事)·언정(言情)·행위를 다룬 서적으로 파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경 각권 또한 그 내용에 따라 체용을 갖춘 것으로 이해하였다. ≪주역≫에서는 이와 도, ≪춘추≫에서는 도와 권(權)이 각각 체와 용에 해당한다고 파악하였다.

권근의 성리학적 식견은 그의 창의적 저술인 ≪입학도설≫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이것은 ≪중용≫·≪대학≫으로부터 출발하는 초학자를 위한 성리학 입문서로서 성리학의 중심 사상을 뽑아 작도(作圖)하고 개략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그림(圖)의 위치 배열과 해설(說)에서 그의 성리학적 견해를 볼 수 있다.

권근은 이 책의 맨 앞에 있는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에서 인간(人)·심·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천인 합일이라는 유학적 이상을 심성의 수양을 통하여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의 근원과 기의 근원을 대립적으로 배열하여 이로부터 순선무악(純善無惡)의 사단(四端)을 연역하고 기로부터 유선유악(有善有惡)의 정을 연역하였으며 선하고 악한게 되는 계기를 의(意)의 기미(幾微)에 두었다. 또한 성(誠)·경(敬)·욕(欲)의 권역을 구분하여 성인과 중인의 갈래를 보이고, 중인도 기질을 변화시켜 경으로써 존양성찰(存養省察)하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은 형질적 기와 본래적 이를 함께 갖추고 있으므로 이로써 동물적 욕망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권근의 이기 심성(理氣心性)론은 군주 및 지배층의 덕치(德治)·예치(禮治)·인정(仁政)·왕도(王道)를 실천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밝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16세기 후반 이황·이이 등 일군의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의리 실천의 도학적 경향

조선조가 기틀을 완전히 잡은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는 사림파(士林派) 성리학자들의 활동이 크게 돋보인 시기이다. 특히 사화가 많았던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중엽 사이에는 의리(義理)와 대의(大義)를 중시하는 성리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들의 의리관과 도학 정신은 도덕·정치·역사 등의 모든 영역에서 발휘되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慈)-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는 계통이 사림파의 계보로 공인되었다.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는 절의를 내세워 조선조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정신은 김숙자를 통해 이어졌다. 사림파 학자들은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 등 많은 사화(士禍)를 받으면서도 성리학의 의리 정신을 실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세조가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판하였던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死六臣)은 죽음을 당하면서도 절의를 밝혔고 김시습(金時習) 등의 많은 절사(節士)들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를 즈음하여 윤리 도덕서라고 할 수 있는 ≪주자가례≫·≪삼강행실도≫·≪오륜도≫·≪소학≫ 등이 널리 간행·반포되었다. 성리학의 입문서 역할을 하였던 ≪소학≫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 등의 편으로 되어 있는 성리학적 율신(律身)·수기(修己)의 책이었다.

≪소학≫의 학습은 김굉필·남효온(南孝溫) 등 당시 사림파 학자에게 일반화되어 있었다. 특히 평생 자신을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칭하였던 김굉필은 한시도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김굉필의 문하생인 조광조도 도학을 추구하였다. 그는 도(道), 즉 정(正)과 선에 의한 정치를 강조하면서 의리·공사(公私)의 구분을 확실히 함으로써 지배층의 사리사욕을 인정하지 않았다. 부제학(副提學)에 올랐던 그는 의(義)와 공(公)에 입각하여 애민(愛民)·위민(爲民)·이민(利民)의 정책으로 공부(貢賦)의 경감, 현량과(賢良科)의 설치, 언로의 활성화, 소격서(昭格署)의 철폐, 사림의 사기진작, 공신호(功臣號)의 재정리 등을 시행하였다.

한편 조광조는 의와 공을 살리는 길을 선비(士)에게서 찾았고 선비야말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모범이 되는 나라의 원기(元氣)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도학 정신에 근본하여 국정 개혁에 힘쓰던 중 기묘사화를 만나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공(公)과 의리를 지켰던 도학 정신은 길재에서 조광조로 이어지는 하나의 학통관을 형성하였고 한국 성리학이 대의·의리·명분을 중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기심성의 이론적 탐구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가 심화된 것은 16세기부터이다. 의리를 중시하던 이전의 성리학자들은 전기 사림파로, 이기심성(理氣心性)을 이론적으로 정밀화하였던 성리학자들은 후기 사림파로 분류할 수 있다.

16세기가 되면서 이기 문제의 본격적 논의가 이언적(李彦迪)과 서경덕(徐敬德)에서 시작된다. 이언적은 이와 기, 형이상자(形而上者)와 형이하자(形而下者), 도와 기(器)·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이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면서 둘(二而一, 一而二)인 관계로 합하여져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보편적 원리인 이를 구체적 기와 동시적으로 읽음으로써 이가 공허한 초월성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와 기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면서도 ‘이가 있은 뒤에 기가 있다’고 함으로써 이의 가치를 우선시하였다.

한편 자득(自得)의 방법으로 공부하였던 서경덕(徐敬德)은 기일원론 철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의 선차성을 부정하고 이는 기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세계는 담일무형(湛一無形)한 기가 모였다 흩어지는 것(聚散)에 불과하지만 기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기불멸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기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이와 기로써 사단칠정(四端七情)을 해석할 것인가라는 심성론적 연구로 이어졌고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논의의 발단은 이황이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 天命圖≫에 나와 있는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는 내용을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이라고 고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황은 사단(四端 : 惻隱·羞惡·辭讓·是非의 情)을 이에 칠정(七情 : 喜·怒·哀·懼·愛·惡·欲)을 기)에 대응시켜 사단과 칠정의 근거를 분립시켰다(七對四).

그러나 기대승은 사단은 이에 칠정은 기에 분립할 수 없고 사단 역시 칠정에 포함되어 있다(七包四)는 통일된 해석을 제시하였다. 기대승은 이와 기의 합(合)이라는 하나의 관점으로 모든 인간의 감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황 역시 기대승의 이기 구도에 동의했지만 인간의 선(善)한 감정(四端)이 발생하는 경로를 감정 일반(七情)의 발생 경로와 내용적으로 독립시켰기 때문에 서로의 의견이 일치할 수 없었다.

이황은 나중에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른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탄 것(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이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이와 기의 결합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 우선성에 따라서 사단과 칠정을 분립시킨 것이다.

이이(李珥) 역시 이황의 이기사칠론(理氣四七論)에 비판적이었다. 이이는 이황의 사단과 칠정의 분립에 반대하고 칠정이 사단을 내포한다(七包四)고 주장하였다. 이황의 이기호발설에서도 ‘기가 발하여 이가 탄다(氣發理乘)’는 것만을 옳다고 인정하였다.

더 나아가 이이는 이와 기를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묘합(妙合)의 관계로 해석하였다. 이는 이이고 기는 기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선후가 없고 사이가 없기 때문에 둘로 나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이는 자신의 이기론을 이통기국(理通氣局)으로 총괄하고 있다. 즉 우주에는 하나의 동일한 이가 관통하여 있으면서도 서로 차이나는 기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사물들의 차이가 생긴다고 하였다. 이이는 이와 기를 각각 분리하여 논의할 수 있는 선택적 개념으로 보지 않고 동시적 상관 관계에 있는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

예학적 변용과 그 구현

이기심성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한창이던 16세기 말엽부터 예학(禮學) 역시 매우 고조되었다. 유학에서 분류하는 예의 종류는 300∼3000종이 있다고 할 만큼 잘 세분화되어 있다. 성리학자들은 예학을 연구하여 각각의 상황에 합당한 인간의 행위 규범을 제정·준수하고자 하였다.

예의 준수는 성리학의 의리 정신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자(君子)·소인(小人)의 분별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예를 둘러싼 복상 문제(服喪問題)나 예송(禮訟)의 시비가 당쟁으로까지 비화되기도 하였다.

예학은 임진왜란과 두 번의 호란(胡亂) 등으로 문란해진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인간의 생활 양식을 제도화하는 성리학적 행위 규범이었다. 불교의 비윤리성·반사회성을 비판하였던 성리학은 예를 통하여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형식화시킴으로써 성리학적 규범을 제시하였다. 특히 성리학이 관학화(官學化)된 이후로 예의 정립과 실천은 정책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고려 말기에는 ≪가례 家禮≫의 시행을 적극 권장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삼강행실도≫·≪국조오례의≫ 등이 간행되어 윤리적 실천 지침이 되었다. 또한 향교와 향약은 오륜(五倫)에 근거한 미풍양속을 전국으로 보급시켜 일반 서민 계층에서도 예가 준수될 수 있게 하였다.

정구(鄭逑)·김장생(金長生) 등이 예학에 대한 전문 서적을 내놓으면서부터 실용적 예절로만 행해지던 예가 학문적 연구 분야로 부상하였다. 예는 ‘보편적 이치가 구체로 드러난 형태(天理之節文)이며, 사람들이 따르고 지켜야 할 형식(人事之儀則)’이라는 성리학적 예 관념은 예학을 통하여 매우 세세한 일상사에서 구체화되었다.

정구는 ≪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를 지어 예를 종류 별로 정리하였고 김장생은 ≪의례문해 疑禮問解≫를 지어 처 부모의 칭호를 자칭·타칭의 경우에 각각 어떻게 불러야 옳은가 등등 예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성리학의 의리 관념은 예학의 정통성(正統性) 문제와 직결되었다. ≪의례≫나 ≪의례도≫에 근거하여 정통(正統)을 중요시하여 한 집안이나 한 나라에 있어서 계통을 바로하고자 하였다.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 조(趙)씨의 복(服)을 일 년[朞年]으로 할 것인지 삼 년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서인이었던 송시열(宋時烈)과 남인이었던 윤휴(尹鑴)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것은 효종을 가통(家統)으로 볼 것인지 왕통(王統)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이 달라지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정통성의 계열 분류를 놓고 발생했던 예송은 당쟁이라는 정치적 성격을 띠기도 하였지만 직접적으로는 성리학적 행위 규범을 해석하면서 나타났던 입장의 차이였다.

인성·물성의 동이론

퇴계·율곡 이래 사단칠정의 논변이 1세기 정도 전개되었을 무렵 사람의 성(性)과 동물의 성(性)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논변이 시작되었다. 보통 이것을 ‘인물성 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라고 부른다.

청풍(淸風)의 황강(黃江 : 堤川 寒水)에 살던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서 인물성에 대한 논변이 발단되었다. 이간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고 하고 한원진은 다르다고 함으로써 서로 공박하였다.

이 논변이 전개될 당시 대체로 호서(湖西)의 학자들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주장에 동조하였고 낙하(洛下)의 학자들은 같다는 주장에 동조하였기 때문에 뒷날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도 불렀다.

이간은 인간과 동물이 다섯 가지 온전한 덕성인 오상(五常: 仁義禮智信)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태극·천명·오상을 동일한 본체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이 동일한 오상을 갖는다고 보았다. 다만 인간과 동물은 기질적 차이 때문에 오상의 드러나는 정도가 다르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사이에도 기품의 맑고 탁함(淸濁粹駁)에 따라서 차이가 생기지만 마음이 발하지 않을 때의 기는 본질적으로 순선(純善)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한편 한원진에 의하면 태극과 천명은 무제한○무시종의 보편타당한 본체여서 형기(形氣)를 초월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상은 사람의 형기 가운데 있는 기질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였다. 인간과 동물의 기질이 다르므로 기질에 내재한 본성 역시 다르다고 추론하였다.

이간은 본연지성(本然之性)에서 보면 만물이 동일하지만(一原) 기질지성(氣質之性)에서 보면 인간과 동물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치우침과 온전함(偏全)의 차이가 생긴다(異體)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간이 일원이체(一原異體)의 입장에서 인물성을 이해하는 것과 달리 한원진은 이와 기질(氣質)이 교섭하는 세 가지 계층을 나누어 인물의 본성을 해석하였다.

이는 본래 하나이지만 형기를 초월한(超形氣) 태극의 층이 있고, 기질로부터 나오는(因氣質) 건순·오상의 층이 있고, 기질과 섞여 있는(雜氣質) 선악(善惡)의 성(性)에 해당하는 층이 있다고 하였다. 기질로부터 나오는 건순·오상의 층에서 보면 사람과 동물의 성은 서로 다르고, 기질과 섞여 있는 층에서 보면 인간과 인간 또는 동물과 동물의 특성이 다르다고 보았다.

이간과 한원진의 주장은 모두 이기론의 구도를 취하여 기질의 차이로써 존재의 차이를 해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통기국(理通氣局)의 구도에서 보면 이간은 이통(理通)의 측면에 일관되었고 한원진은 기국(氣局)의 측면에서 인물성의 다름을 논의하였다. 이들의 인물성론은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을 자연계에까지 심화확대하였던 것이다.

성리학에 대한 도전과 성리학의 응전

15세기 말엽부터 왕양명(王陽明)의 심학(心學)이 우리 나라에 전해지기 시작하였지만 이황을 비롯한 정주계(程朱系) 학자들의 강한 배척 때문에 제대로 수용할 수 없었다.

남언경(南彦經)·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등에 의해 왕양명의 심학은 겨우 피상적으로 소개된 정도였고, 오직 정제두(鄭齊斗)에 의해 본격적인 연구가 외롭게 시도되었다. 이어서 신대우(申大羽) 부자와 이충익(李忠翊)·이건창(李建昌) 일가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어 오다 20세기에 들어 정인보(鄭寅普)·박은식(朴殷植) 등에게서 긍정적인 재평가를 받는 정도였다.

일본에서는 양명학이 중심 사상이었던 것에 비교하면 조선시대의 양명학은 매우 미미하였고 이단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성리학은 여러 측면에서 양명학을 비판하였다. 양명학은 ‘마음이 곧 이치(心卽理)’라고 하여 마음을 벗어나서 이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성리학은 주희가 말한 ‘성이 곧 이치(性卽理)’라는 입장에 서서 양명학이 충효와 같은 객관적 규범을 주관적 마음의 문제로 혼동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양명학에서 주장하는 ‘양지(良知)’와 ‘지행합일(知行合一)’ 등의 학설 역시 객관적 이치를 모르는 주관적 독단이라고 비판하였다.

이황은 ≪백사시교변 白沙詩敎辨≫·≪전습록논변 傳習錄論辨≫ 등을 지어 양명학을 비판하였다. 이 밖에 박세채·한원진·이익·안정복·정약용 등 대부분의 한국의 성리학자들은 양명학을 선(禪)불교와 유사한 것으로 여겨 비난하였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양명학은 연구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위축되고 말았다. 한편 이기심성론을 주로 탐구하는 한국 성리학의 이론적 경향에 비판을 가하면서 학자들의 관심이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부분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유학의 텍스트와 제자서(諸子書)에 두루 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 학문(實事求是)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학문을 실학(實學)이라고 부른다. 서명응·홍양호·홍대용·박지원·이덕무·유득공·박제가·성해응·정약용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성리학의 지나친 이론적 천착과 예 의식의 지나친 형식성·명분성 등을 비판하면서 경세치용(經世致用)에 힘쓰고자 하였다.

성리학자들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여겨 배척하였지만 실학자들은 현실적으로 닥친 국고의 고갈과 민생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청나라를 왕래하며 다양한 모색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성리학 이외의 학문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지 않고 양명학·서학·고증학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청나라의 객관적·실증적 학문 태도를 받아들였고, 17세기 초부터 중국에서 전래된 서양의 천주교·과학 기술·문화 등에도 개방적 태도를 보였다. 개방성·실용성·실증성 등을 지녔던 실학은 이기심성론에 치중하였던 성리학의 일면성을 크게 보충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서학(西學)으로 불렸던 천주교를 비롯한 서구의 문물이 유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적 위협 및 침략이 노골화되었다. 이항로(李恒老)·기정진·이진상(李震相)·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인석(柳麟錫) 등의 성리학자들은 천주교의 우주관·인생관·윤리관이 국기(國基)를 흔드는 오랑캐[夷狄] 또는 금수의 사상이라고 배척하고 유교의 삼강오륜을 지키려고 애썼다.

이들은 서구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쇄국(鎖國)·주전(主戰)·척화(斥和)를 주장하면서 의병(義兵)을 조직하여 목숨을 바치며 대항하였다. 성리학적 가치관에 근거하여 민족을 보호하고 천주교 사상을 가진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려 하였던 이들의 활동을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폐쇄적 태도가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와 민족을 보호하려고 하였던 것은 정당하고 용기있는 정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 성리학의 특징

① 정주학의 절대 우위 : 정주학 계통의 성리학은 처음에는 불교의 비인륜성을 비판하였고 나중에는 육상산·왕양명 계통의 심학을 이단시하면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일부 소론(少論) 계통의 학자들이 양명학에 개방적 태도를 보인 적도 있었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처럼 발전할 수 없었다.

특히 17세기경부터 정주학은 교조주의적 성격을 띠어 조금이라도 주희의 이론과 다르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붙여 배척하였으므로 정제두를 빼고는 이렇다 할 양명학 연구자가 없었다.

한편 정주학 계통의 성리학은 이기심성론·사단칠정론·인물성동이론 등 많은 부분에서 연구를 진척시켰다.

②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 : 정주학은 주지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양명학은 주정주의(主情主義)적 경향이 강하므로 정주학이 발달하였던 한국 성리학은 주지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졌다. 사실 사단칠정론, 인물성 동이론 등의 탐구는 200∼300년 여에 걸쳐 논의되었고, 그 내용 또한 중국이나 일본의 성리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심오하고 풍부하였다.

특히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본적 토대였던 이와 기에 대한 담론이 활발해져 주리(主理)·주기(主氣)·유리(唯理)·유기(唯氣) 등의 다양한 학설이 나왔다.

③ 예학(禮學)의 발달 : 합리성을 추구하는 한국 성리학의 주지주의적 정신은 명분론적 예학을 꽃피웠다. 성리학자들은 의리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형태를 예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성리학적 이기론은 공허한 관념에 머물지 않고 예의 실천을 통하여 체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정몽주가 ≪주자가례≫를 실천하고 권근이 ≪예기천견록≫을 저술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정구·김장생·박세채(朴世采) 등의 예론에서 연구의 절정을 이루었다.

한편 윤휴(尹鑴)와 송시열(宋時烈) 등의 예송에 의한 당쟁은 예 실현을 향한 열의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④ 주리론(主理論)의 보수성 : 한국성리학은 주기론 보다는 주리론이 우위를 차지하면서 명분론적 사고가 두드러졌다. 변화하는 감각적 세계(氣)의 근저에 있는 초감각적·불변적 원리(理)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이념형적 가치를 강하게 추구하였다. 왕통·가통 등 정통성을 중시하면서 이 규범에 어긋나는 행위는 가차없이 지탄받았다.

이러한 주리적 경향은 변화하는 현실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기존의 규범과 가치를 묵수하려는 보수성이 강하였다.

그러나 주리파의 명분 의식은 개항기에 우리 민족의 주체 의식을 발양시키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대표적 주리론자인 이항로·김평묵과 그 문인들이 척사 위정을 부르짖으며 창의호국(倡義護國)운동을 일으킨 것이 그 실례이다.

⑤ 인존정신(人尊精神)의 지향 : 성리학은 공자와 맹자의 유교를 계승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이론화시켰다. 사칠논변을 통하여 인간의 선한 감정이 무엇인지 연구하였고 인물성 동이론을 통하여 인간의 본질을 밝히고자 하였다.

특히 인간의 본성을 우주의 보편적 원리인 이(理)로부터 해석하여 인간 존재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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