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성책동은 고려 후기 고려를 원나라의 행정 구역 중 하나인 행중서성(行中書省)으로 편입하고자 획책했던 사건이다. 총 7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1차와 2차는 요양행성(遼陽行省)과 그곳의 고관이었던 홍중희(洪重喜)가, 3차와 4차, 7차는 부원(附元)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 일으켰으며, 5차와 6차는 원나라 측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고려 측은 고려 왕조 체제를 보전하는 것이 세조(世祖) 황제의 유지라는 점과 행성을 설립했을 경우 실익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고, 결과적으로 이 논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당시 고려에는 이미 정동행성(征東行省)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동행성은 원나라 내지의 다른 행성(行省)들과 같은 지방 행정 기관이 아니었고, 오히려 고려 국가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 지위를 원나라의 한 행성으로 규정하기 위한 형식적인 기관이었다. 입성책동(立省策動)은 이를 폐지하고 원 내지의 다른 행성들과 같은 새로운 행성을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입성책동은 충렬왕 말년부터 충혜왕 때까지 총 7차례에 걸쳐 단속적으로 일어났다. 대부분 원나라에 가 있던 고려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고려의 왕위 계승과 관련되어 일어났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새로운 행성의 설치는 정동행성의 폐지 뿐만 아니라 고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으므로 고려의 모든 정치 세력이 맹렬히 반대하였다. 원나라로서도 그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아 논의에 그쳤을 뿐 실행에 옮겨진 적은 없었다.
최초의 입성책동은 1302년(충렬왕 28)에 있었다. 이때의 입성론(入省論)은 요양행성(遼陽行省)에서 제기한 것으로 일본 원정 계획이 사실상 무산된 상황에서 정동행성을 요양행성과 합쳐 별도의 행성을 설치하자는 제안이었다. 이는 고려의 국체를 부정하자는 논의가 아니었던 점에서 훗날 이어지는 입성책동과는 성격이 다르다.
두 번째 입성책동은 1309년(충선왕 1)경에 요양행성 우승(右丞) 홍중희에 의해 제기되었다. 홍중희는 일찍이 몽골과의 전쟁 중에 몽골에 투항해 고려 침략을 향도했던 홍복원(洪福源)의 손자로서 요양 지방에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지고 요양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충선왕을 탄핵하는 한편, 고려에 새로운 행성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충선왕은 고려왕에 복위한 직후부터 단행했던 개혁 정치의 일부를 철회하는 등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1309년에 홍중희가 실각함으로써 입성 논의도 잠잠해졌고, 1312년(충선왕 4)에는 고려에 새로운 행성을 두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입성책동은 각각 1323년(충숙왕 10) 1월과 12월에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 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보다 앞서 1320년에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실각하고, 고려인 환관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의 참소로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었다. 또한 다음 해에는 충숙왕이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고 원나라에 억류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원나라에서 심왕(瀋王) 왕고(王暠) 등이 충숙왕을 참소하는 가운데 고려에서는 심왕 옹립 운동이 일어났는데, 유청신과 오잠은 심왕 고의 편에 서서 입성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이때의 입성 논의는 상당히 진전되어 행성의 이름을 삼한행성(三韓行省)으로 정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이제현(李齊賢) 등이 원나라의 중서성(中書省)에 상서해 부당함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원나라의 승상 배주(拜住),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왕약(王約) 등이 반대함으로써 실행되지 않았으며, 1325년(충숙왕 12)에는 공식적으로 철회되었다.
다섯 번째 입성책동은 1330년에 충혜왕이 즉위한 직후에 장백상(將伯祥)과 양재(梁載) 등에 의해 추진되었다. 장백상은 중국의 강남(江南) 사람으로 충숙왕 때 정동행성 낭중(郎中)을 지낸 바 있었고, 양재 역시 중국인으로 충숙왕의 측근으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이해에 충숙왕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충혜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서 입성책동을 일으켰는데, 그 목적은 분명하지 않다. 이 논의는 충혜왕이 직접 원나라의 우승상 연첩목아(燕帖木兒, 엘테무르)에게 요청함으로써 곧 중지되었다.
여섯 번째 입성책동은 1336년(충숙왕 복위5)에 노강충(盧康忠) · 왕의(王誼) · 왕영(王榮) 등 원나라 측 인사들이 일으켰다. 이들의 관력 등은 뚜렷하지 않으며, 고려와 특별한 연고를 가졌던 사실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들은 충숙왕의 죄를 원 조정에 고소하면서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행성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충숙왕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서둘러 입조하였는데, 그 후 특별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때의 논의도 곧 무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곱 번째 입성책동은 1343년(충혜왕 복위4)에 역시 원나라에서 이운(李芸) · 조익청(曹益淸) · 기철(奇轍) 등이 일으켰다. 이들은 충혜왕이 탐음부도(貪淫不道)하므로 고려에 행성을 세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원나라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듯하며, 대신 충혜왕을 퇴위시키는 조처를 취하였다.
부원배(附元輩)들의 책동에 의해 제기되었던 일곱 차례의 입성 문제는 실행되지 않고 모두 좌절되었다. 따라서 고려는 국가의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입성 문제가 제기되고 논의되는 과정에서 원나라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증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새로운 행성을 두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정동행성이 원나라의 다른 행성들과는 다른 형식적인 기관이었음을 말해주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