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잠은 고려 후기에 상의회의도감사, 삼사사, 찬성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간신이다. 지신사, 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등을 거쳐 지도첨의사사에 올랐으나, 항상 충렬왕·충선왕 부자를 모함하여 이간시켰고, 어진 신하들을 모함하고 살해하여 많은 원망을 샀다. 원나라에 압송되어 안서(安西: 장안의 서쪽 변방)에 유배되었다. 충선왕 때 다시 등용되어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삼사사, 찬성사에 이어 구성군에 봉해졌다. 1323년(충숙왕 10)에는 고려에 행성을 설치하여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두어야 한다는 입성책동을 벌여 고려 측에 많은 해를 끼쳤다.
본관은 동복(同福). 자(字)는 흥우(興雨), 호는 동헌(東軒)이다. 초명은 오기(吳祁)이며, 오자의(吳子宜)라고 하다가, 충렬왕으로부터 오잠(吳潛)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오선(吳璿)이고, 조부는 오광례(吳光禮)이며, 증조는 오대승(吳大陞)이다. 어머니는 안강군대부인(安康郡大夫人) 안씨(安氏)로 안부(安孚)의 딸이다. 부인은 이천군부인(利川郡夫人) 신씨(申氏)로 이천(利川) 사람으로, 신욱(申頊)의 딸이다. 맏아들은 오길(吳佶), 둘째 아들은 오선(吳僐)이다. 원(元)나라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한인(漢人) 엄씨(嚴氏)의 딸을 얻어 오눌(吳訥)을 낳았다.
1275년(충렬왕 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279년(충렬왕 5)에 지공거(知貢擧) 박항(朴恒)과 동지공거(同知貢擧) 곽여필(郭汝弼)이 주관한 과거에 조간(趙簡)· 권부(權溥, 권영(權永))· 김순(金恂)·이세기(李世基)·한사기(韓謝奇) 등과 함께 합격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간신 김원상(金元祥)· 석천보(石天補) 등과 함께 왕이 연락(宴樂)을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전국에서 명기(名妓)들을 뽑아 들이고, 「삼장사(三藏寺)」와 「사룡(蛇龍)」 등의 노래를 지어 가무(歌舞)를 관람하게 하는 등 임금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뒤 지신사(知申事),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감찰대부(監察大夫) 등을 거쳐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올랐으나, 항상 충렬왕(忠烈王)· 충선왕(忠宣王) 부자를 모함하여 이간시켰고, 어진 신하들을 모함하고 살해하여 많은 원망을 샀다. 그러나 두려워 말하는 자가 없었다.
1302년(충렬왕 28) 지공거로 동지공거 지우공(池禹功)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최응(崔凝)·조광한(曹匡漢) 등을 선발하였다.
원나라의 사신인 단사관(斷事官) 티므르부카[帖木不花]가 왔을 때 전(前) 호군(護軍) 원충갑(元冲甲) 등 50인과 김심(金深) 등 군관(軍官) 150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오잠의 죄를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원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무사하였다.
뒤에 김심·오감량(吳監良) 등에 의해 원나라에 압송되어 안서(安西: 장안의 서쪽 변방)에 유배되었다. 충선왕 때 다시 등용되어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1313년(충숙왕 즉위년)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에 올랐으며, 그 이듬해에는 삼사사(三司使)가 되었다. 1320년(충숙왕 7)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이어 구성군(龜城君)에 봉해졌다.
1321년(충숙왕 8) 왕이 원나라에 갈 때 따라가서 유청신(柳淸臣)·양안길(楊安吉) 등과 함께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의 일당이 되어 왕을 모함하였고, 1323년(충숙왕 10)에는 원나라 황제에게 고려에 행성(行省)을 설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의 직속령으로 통치하는 입성책동(入省策動)을 청하는 등 나라에 많은 해를 끼쳤다.
시호는 문제(文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