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복(同福). 초명은 오기(吳祁). 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오선(吳璿)이다.
충렬왕(忠烈王) 때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간신 김원상(金元祥)·석천보(石天補) 등과 함께 왕이 연락(宴樂)을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전국에서 명기(名妓)들을 뽑아 들이고, 「삼장사(三藏寺)」와 「사룡(蛇龍)」 등의 노래를 지어 가무(歌舞)를 관람하게 하는 등 임금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그 뒤 지신사(知申事)·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감찰대부(監察大夫) 등을 거쳐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올랐으나 항상 충렬왕·충선왕(忠宣王) 부자를 모함하여 이간시켰고, 어진 신하들을 모함하고 살해하여 많은 원망을 샀다. 그러나 두려워 말하는 자가 없었다.
원나라의 사신인 단사관(斷事官) 티므르부카[帖木不花]가 왔을 때 전 호군(前護軍) 원충갑(元冲甲) 등 50인과 김심(金深) 등 군관(軍官) 150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오잠의 죄를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원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무사하였다.
뒤에 김심·오감량(吳監良) 등에 의해 원나라에 압송되어 안서(安西: 장안의 서쪽 변방)에 유배되었다. 충선왕 때 다시 등용되어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었고, 1313년(충숙왕 즉위년)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에 올랐으며, 그 이듬해에는 삼사사(三司使)가 되었다. 1320년 찬성사가 되고 이어 구성군(龜城君)에 봉해졌다.
1321년 왕이 원나라에 갈 때 따라가서 유청신(柳淸臣)·양안길(楊安吉) 등과 함께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의 일당이 되어 왕을 모함하였고, 1323년에는 원제(元帝)에게 고려에 행성(行省)을 설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의 직속령으로 할 것을 청하는 등 나라에 많은 해를 끼쳤다.
시호는 문제(文齊)이다.